
“이 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전북 전주시 완산구 고덕산 자락.
평화동 송정서미트 아파트 뒤편 산길에 봄꽃이 피어나고, 이 길엔 요즘 유난히 따뜻한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학소암을 지나 보광재로 향하는 고갯길 일부가 최근 들어 새롭게 단장되면서, 등산객들 사이에서는 “이 길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궁금증도 커졌다.
사연인즉 올해로 팔순이 된 한 시민이 7개월 넘게 홀로 이 산길을 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전주시 평화동에 거주하는 이원준(80) 씨다.
"꽃길은 혼자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원준 씨는 지난해 9월 말부터 올해 5월 초까지, 7개월 넘는 시간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어김없이 산에 올라 길을 다듬고 정비해왔다.
그의 손길에 좁고 위험하던 길은 넓어졌고, 낡은 구간엔 돌계단이 들어섰다. 자비를 들여 구입한 꽃잔디는 길옆 둔덕을 환하게 밝혀줬다.
그가 손질한 구간은 학소암에서 보광재로 향하는 500여 미터 산길로, 그간 등산객들 사이에서도 ‘험한 구간’으로 악명이 높았다.
특히 비가 오면 질퍽해지고, 겨울에는 빙판이 돼 사고 위험이 컸지만 지금은 누구나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산책길로 탈바꿈했다.
이 씨는 처음부터 누구의 요청이나 지원도 받지 않고 이 일을 시작했다.
“어느날 보니까 길이 너무 엉망이어서요. 날 풀리면 더 심해지잖아요. 마침 시간이 되니까 내가 해보자 싶었죠.”

"고덕산 꽃길, 작은 호미로 만든 기적"
그가 등산로를 개척하는데 사용한 도구는 단 세 가지. 호미와 꽃삽, 작은 톱뿐이었다. 간단한 연장을 들고 하루 몇 시간씩 산을 오르내리며 삽질하고, 돌을 옮기고, 흙을 다지는 일이 반복됐다.
한때 건설업에 종사했던 그는 손에 익은 기술과 감각을 산길 위에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길옆에 핀 꽃잔디는 집 근처 꽃가게에서 직접 구입해 심은 것이다. 작지만 강렬한 이 변화는 등산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냥 다니는 사람들이 편하면 됐죠”
그의 정성은 점차 입소문을 타고 있다. 등산객들은 “이렇게 바뀐 줄 몰랐다”며 놀라고, 일부는 수고하신다며 막걸리나 음료를 놓고 가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의 작업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전주시청 홈페이지에도 게시했지만, 정작 시청 관계자들은 아직 이 사실을 잘 모른다.
그렇다고 이원준 씨는 대가나 보상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편하게 다니면 그걸로 됐죠. 뭐 대단한 일이라고.”
소탈한 외모에, 등산로를 닦느라 땀을 훔치며 웃는 그의 모습에 등산객들도 덩달아 마음이 상쾌해진다.
거창한 약속이나 예산이 없어도, 한 사람의 선의와 꾸준한 봉사가 지역의 일상을 바꿀 수 있음을 '고덕산 꽃길'이 증명하고 있다.
"매일 두 가지 일을 살아내는 사람"
그의 일상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씨는 매달 약 10일 정도는 노인일자리센터에 나가고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고덕산 꽃길을 가꾸는 데 투자하고 있다.
꽃길을 정리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는 매일 아침 산에 올라 정성껏 꽃길을 다듬고, 오후에는 노인일자리센터로 출근해 또 다른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그의 하루는 쉼 없이 이어지는 꽃길 정리로 가득 차 있다. 꽃길을 가꾸는 일에 쏟는 시간과 노력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이 일에 마음을 쏟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행정보다 앞선 마음의 손길"
최근 몇 년간, 지자체들은 ‘명품 숲길’이나 ‘힐링 등산로’ 같은 이름으로 막대한 예산을 들여 길을 조성하고 있지만, 정작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길은 행정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고덕산 산길에 핀 이 ‘작은 기적’은 행정의 뒷받침 없이도 무엇이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한 등산객은 SNS에 이렇게 적었다.
“고덕산에 정말 아름다운 길이 생겼습니다. 누가 만든 건지 몰라도, 그분 덕분에 오늘 마음까지 따뜻했습니다.”
이원준 씨는 오늘도 등산복 차림으로 산길을 오른다. 오늘은 또 어느 구간을 다듬을지, 그는 손에 작은 호미를 쥐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누군가에겐 그저 흙길이지만, 누군가에겐 잊지 못할 ‘고마운 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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