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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유대인 죽였으면 만족했을 것…나는 명령 수행 관리였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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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000만 유대인 죽였으면 만족했을 것…나는 명령 수행 관리였을뿐"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7]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45

12.3 계엄 때 윤석열과 손잡았던 장군들은 지금 감옥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란에 성공했다면 그들이 누렸을 법한 권력과 부귀영화를 상상하고 있을까. 차마 그렇진 못할 것 같다. "왜 나는 그때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 계획을 말리지 못했을까" 또는 "왜 나는 동참하라는 그의 말을 거부하지 못했을까" 하며 스스로를 꾸짖으면서 한숨 쉬고 있을 것이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걸 타고 12.3 당일로 돌아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겠지만... 늦었다.

이들 12.3 장군들은 곽종근 특수전사령관(중장)말고는 대부분 법정에서 발뺌을 거듭하는 '생존 전략'을 세운 모습이다. '나는 모르쇠'에다 '명령에 따른 정당한 임무 수행' 버전을 뒤섞은 방어 전략이다. 이미 김용현 전 국방장관은 '무죄'를 주장했다. 역사의 기록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12.3 내란 음모를 놓고 훗날 역사가들이 내릴 평가는 결코 너그럽지 않을 것이다.

1961년 4월11일 예루살렘 법정 피고석에 처음 앉은 아돌프 아이히만의 '생존 전략'도 12.3 장군들과 닮았다. 어눌한 말투로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아이히만에겐 15개의 죄목이 붙었지만, 상부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을 수송열차에 태워 보내도록 했다는 '교사'(敎唆) 부분만 빼고는 모두 '무죄'라 우겼다. 아울러 "나는 괴물이 아니다.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라며 전쟁범죄의 책임을 윗선으로 미뤘다.

'유대인 전문가' 아이히만 50명만 있었다면....

아이히만 중령은 친위대 안에서 '유대인 전문가'로 통했다. 그가 속한 국가보안본부(RSHA) 제4부는 비밀경찰(게슈타포) 사무실로서 두 개의 하위 부서를 두었다. 제4부 A과는 공산주의, 사보타주, 자유주의, 암살행위로 고발된 '국가의 적' 감시와 체포 임무를 맡았고, 제4부 B과는 종교(가톨릭과 개신교)와 유대인 관련 일들을 맡았다. 아이히만은 제4부 B과장으로 유럽 유대인들의 삶과 죽음을 갈랐다. 주요 지역(폴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그리스, 이탈리아, 헝가리)의 유대인들 상당수가 아이히만의 손을 거쳤다.

특히 1944년 4월말부터 7월초까지 헝가리 유대인 44만 명을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는 일을 아이히만이 맡아 해냈다.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죽음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무렵 유럽 유대인들 사이엔 아돌프 아이히만의 악명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독일에 두 명의 아돌프(히틀러, 아이히만)가 있다"는 말들이 나돌 정도였다. 아이히만의 위세는 대단했다. 1944년 4월 헝가리의 유대인 지도자 조엘 브란트를 부다페스트 머제스틱 호텔 집무실로 부른 아이히만은 '협력'을 강조하며 이렇게 큰소릴 쳤다.

"내가 누군지 아세요? 나는 독일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 추방과 수송) 작전을 수행한 사람입니다. 이제 헝가리 차례입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576쪽)

아이히만은 친위대 안에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직속상관인 제4부장 하인리히 뮐러(1900-?)는 아이히만을 가리켜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뮐러는 히틀러 자살 다음날인 1945년 5월1일 베를린 총통 지하벙커를 떠난 뒤 행방불명이다. 히틀러 비서부장 마르틴 보어만처럼 베를린 탈출을 꾀하다 죽은 것으로 짐작된다. 아이히만처럼 도망쳐 숨어 살았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 1940년대 친위대 중령 시절의 아이히만과 1959년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취업한 메르세데스-벤츠 트럭 공장의 신분증.Ⓒ위키미디어

'악의 평범성' 논란

모두의 예상대로, 아이히만은 교수형을 피하지 못했다. 예루살렘 지방법원의 1심(1961년 4월11일-12월15일)에서 사형선고 받은 뒤 2심인 대법원 항소심(1962년 3월-5월)에서 형이 확정돼, 1962년 6월1일 교수형으로 죽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가 폴란드 최고국가재판소 판결에 따라 1947년 4월16일 처형됐으니, 15년이란 터울을 둔 셈이다. 아이히만의 시신은 곧바로 화장됐고, 이스라엘 해군 경비정이 지중해에 흩뿌려 없앴다.

이로써 아이히만은 사라졌지만,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논란으로 남았다. 널리 알려졌듯이,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이히만을 지켜보면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을 내놓았다. 그 이유를 아렌트는 이렇게 밝혔다.

[(이스라엘) 법정은 아이히만을 이해하지 못 했다.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그의 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된다. 그의 덕은 나치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그는 지배집단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는 희생자였으며, 오직 지도자들만 처벌받아야 한다. 그는 다른 수많은 낮은 계급의 전범들만큼 그렇게 지나치지도 않았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21, 343쪽)

여러 나치 연구자들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 자체가 지닌 의미와 아렌트의 통찰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다른 수많은 낮은 계급의 전범들처럼 그저 평범한 인물'로 보고, 더구나 '희생자'로 본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남겼던 녹취록을 꼼꼼히 들여다본다면, '사악한 전쟁범죄자' 아이히만에게 '악의 평범성' 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는 얘기들이다.

사선 인터뷰와 '아르헨티나 문서'

다른 대부분의 나치 전범들과는 달리, 아이히만은 자신의 나치 행적과 관련해 제법 많은 분량의 기록을 남겼다. '아르헨티나 문서'라 불리는 그 문서들은 세 가지로 나뉜다.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썼던 1300쪽 분량의 자필 회고록(미출간) △아르헨티나에서 네델란드 출신의 나치 도망자 빌럼 사선(Willem Sassen, 1918-2002)과 계약을 맺고 1957년 구술 증언을 녹음하고 이를 바탕으로 풀어쓴 700쪽 분량의 녹취록 △아이히만 납치 뒤 아이히만이 남긴 녹음과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담은 자술서 등이다.

그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어진 녹취록과 녹음테이프다. 나치 시절에 아이히만이 어떠한 생각을 지녔고 '유대인 문제 최종해결'에서 아이히만이 했던 역할을 담은 녹음은 70시간 분량이었고, 녹음에 쓰인 테이프는 67개였다. 1950년대 중반만 해도 녹음테이프 가격이 비쌌기에 한번 쓴 테이프를 재활용하는 바람에 실제로 남은 녹음테이프는 15시간 분량이다.

아이히만 녹취록을 만든 빌럼 사선은 네델란드 육군 포병 출신으로 1940년 5월 독일군의 네델란드 침공 때 포로가 되자 변절자가 됐다. 친위대 소속의 종군기자를 지내며 코카서스와 노르망디 전선을 취재 보도했던 이른바 '친독파 언론인 부역자'였다. 그랬기에 전쟁 뒤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

1951년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위조 신분증으로 아르헨티나로 도망친 아이히만은 여러 직업을 거쳤다. 자동차 부품회사의 용접공과 정비공, 물 정화 필터와 가전기기 부품을 제조 판매하는 회사의 현장 기술직으로 지냈다(1960년 5월11일 이스라엘로 납치되기 전 마지막 1년 2개월 동안은 메르세데스-벤츠 트럭 조립공장의 용접공). 아르헨티나에서의 삶이 그런대로 안정되자, 그곳 나치 도망자들과 어울렸다. 빌럼 사선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조직한 사교 모임(이른바 '사선 서클')에는 루돌프 폰 알펜슬레벤(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참모장) 같은 고위직 나치도 있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증언을 책으로 내고 싶어 했고, 그 증언이 돈이 될 것이라 판단한 사센이 거들어주기로 했다. 둘은 책 판매 수익금의 절반을 나눠 갖기로 계약을 맺었다. 아르헨티나 시절의 아이히만 행적을 파헤친 독일 철학자․역사학자인 베티나 슈탕네트의 책(Eichmann vor Jerusalem, 2011)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아이히만의 말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특별히 그의 감성을 자극하거나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그의 말을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이 친위대 퇴역 중령이 일단 말을 시작하면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말을 하려는 아이히만의 욕구는 그의 경계심보다 언제나 더 컸다. 그는 믿을 만하다고 여긴 사람들 사이에선 자신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베티나 슈탕네트,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글항아리, 2025, 323-324쪽)

"난 단순한 명령 수행자 아냐. 그랬다면 얼간이"

1957년 봄부터 여름 사이에 아이히만은 토요일이나 일요일마다 사선의 집에서 녹음기를 틀어 놓고 지난 행적을 털어놓았다. 몇몇 나치 도망자들이 그의 증언을 함께 들었다. 담배와 술을 무척 좋아한 아이히만 앞엔 커피에다 포도주과 담배가 넉넉하게 차려져 있었다. 그 무렵 아이히만의 입에서 나온 주요 발언을 들어보자.

"나는 유럽에서 '유대인 교황'으로 불렸어요. 제 부하들은 저를 존경해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제게 왕관을 올리도록 만들 정도였어요. 유럽 안팎의 유대인 사회에서 저는 얼룩무늬 개처럼 유명했죠. 저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당신에게 솔직히 말할게요. 우리가 10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였다면 만족했을 것이고,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난 일반적인 명령수행자가 아니었어요.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얼간이에 불과한 거죠. 난 (나치 지도부와) 함께 생각했으며, 이상주의자였습니다."

"나는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유대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것은 총통의 명령이었어요. 일할 수 있는 유대인은 일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최종해결책으로 보내졌어요.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요(Ich habe kein Gewissensbiss gefühlt)."

"전쟁 중에 (나치의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양심의 위기를 겪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지나고 나서 보니,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헛소리이고 변명이죠."(베티나 슈탕네트, 376쪽)

▲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 1933년과 1958년의 모습이다.Ⓒ위키미디어

"유대인들을 도살장에 보냈다"

1960년 5월11일 아이히만이 모사드 요원들에게 납치돼 이스라엘로 끌려갔을 때는 이미 '사선 서클'에서의 인터뷰가 마무리된 뒤였다. 아이히만이 재판에 넘겨지고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자, 그동안 녹취록을 만들었던 빌럼 사선은 그 일부 내용을 서방 언론에 팔아넘겨 당시로선 거액인 수만 달러를 챙겼다. 하나는 독일 <슈테른(Stern)> 잡지다. 예루살렘 1심 재판이 열리던 전인 1960년 6월25일자로 '아이히만의 마지막 흔적 발견'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Stern> 에 실린 아이히만의 핵심 발언은 이러했다.

"내가 만약 10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였다면, 나는 만족하며 말했을 것이다. 좋아, 우리는 적을 제거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임무를 완수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나는 단지 명령을 수행한 관리였을 뿐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다른 하나는 미 <라이프(LIFE)> 잡지로, 1960년 11월28일과 12월5일 두 차례에 걸쳐 인터뷰 내용이 실렸다. <LIFE>에 실린 아이히만의 발언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렇다.

"나는 유대인들을 도살장으로 이송했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내 책임이 아니다. 내가 무덤에 뛰어들어야 한다면, 이미 500만 명의 적들이 짐승처럼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LIFE>와 <Stern> 두 군데 모두 나타나는 문장은 "나는 단지 명령을 수행한 관리였을 뿐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였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나는 이른바 유대인 혐오자(Judehasser)가 아니다. 이상적인 국가시민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이히만은 숱한 유대인들을 가축열차에 태워 수용소로 몰아넣었던 전쟁범죄자였다.

문제는 빌럼 사선이 아이히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재판이 열리기 앞서 서방 미디어에게 '독점 기사'를 유출했다는 점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아이히만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자신의 법정 전략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교활한 아이히만은 곧 불끄기에 나섰다. 독일인 변호사에게 "빌럼 사선은 기삿거리에 굶주린 기자였는데, 우연히 카페에서 순진한 아르헨티나 시민 클레멘트(아이히만의 가명)를 만났고, 자신이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냈다"고 둘러댔다. 법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내가 실제로 한 말과 일치하는 것이 없고 자극적으로 꾸몄다"면서 인터뷰 내용을 부인했다.

아이히만의 녹취록 내용 일부가 공개되자, 이스라엘 검찰은 이를 유죄의 결정적 증거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아이히만과 그의 변호사가 막아섰다. 2015년 미 작가 알렉산더 제이콥은 아이히만 녹취록의 주요부분을 번역하고 편집한 328쪽 분량의 책을 냈다. 여기엔 아이히만이 녹취록이 재판 증거로 채택되는 것을 막으려고 법정에서 했던 말이 실려 있다.

"녹음 당시에 나는 레드와인을 많이 마셨고, 빌럼 사선이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꾸미고, 심지어 거짓으로 녹취록에다 옮겨놓은 것이다. 그 기록은 단순한 '펍 토크'(pub talk, 술집에서 오가는 가벼운 대화)였을 뿐이다."(Adolf Eichmann, Alexander Jacob, <The Eichmann Tapes: My Role in the Final Solution>, Black House Publishing. 2015, 6쪽)

아이히만에겐 다행스럽게도 사선과의 인터뷰 녹취록 모두가 법정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다만 아이히만이 고치거나 보충 설명하는 주(註)를 단 83쪽 분량만 증거로 삼았다. 문제의 인터뷰 녹음테이프와 녹취록 원본은 현재 독일의 코블렌츠 연방문서보관소(Bundesarchiv Koblenz)에 있다(2020년까지는 미공개 상태로 있었으나, 최근엔 다큐 제작을 비롯해 공익 목적의 경우엔 열람이 가능하다).

"아이히만은 반유대주의 확신범"

독일 철학자․역사학자 베티나 슈탕네트는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Eichmann vor Jerusalem, 2011)을 써낸 데 이어, 철학 수필집 <Böses Denken>(나쁜 생각, 또는 악의적인 생각, 2016)에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다시 다뤘다. 슈탕네트는 아이히만이 (아렌트의 평가처럼 생각이 부족한 평범한 관료가 아니라)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반유대주의자'였다고 여긴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임무가 낳을 끔찍한 결과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슈탕네트는 아이히만이 예루살렘 재판에서 살아남을 '단 하나의 가능성'은 그 자신을 '실제보다 작게(kleiner) 보이는' 쪽으로 법정 방어전략을 짰다고 본다. 그 자신을 '상부의 지시를 잘 따르는 순응적인 관료'로 보이도록 애쓰면서 자신을 '희생자'처럼 포장한 것은 책임을 피하고 죄를 덜기 위한 꼼수였다는 얘기다. 슈탕네트의 '생각론'을 들어보자.

[생각은 (길을 걷다가) 걸려 넘어지는 것과는 다르다(Denken ist nicht wie Stolpern). 우리는 특정한 사유 방식을 따르고 그 생각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Bettina Stangneth, <Böses Denken>, Rowohlt, 2016, 206쪽)

슈탕네트는 길 가다 돌부리에 부딪쳐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비틀거리는 것과는 달리, 우리 인간은 다들 나름의 생각을 한다고 여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철저한 무사유'를 문제점으로 꼽았지만, 슈탕네트는 "살인자(Mörder)도 생각을 한다"고 못 박는다. 따라서 '아이히만은 악인이 아니라 평범한 관리'라는 아렌트의 평가엔 고개를 가로 젓는다. 아이히만은 '사악한'(böse) 쪽으로 생각했고, 의도적이고 능동적인 '악의 실행자'이자 '가해자'(Täter)로 나섰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슈탕네트는 아이히만이 저질렀던 악행은 '생각이 모자란 탓'이 아니라 '도덕적인 숙고'(moralischen Nachdenkens)를 의도적으로 거부한 탓이라며 아이히만의 도덕적 불감증을 비판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 속았다"

슈탕네트와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나치 연구자들도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악의 평범성'에 관련시킨 것에 비판적이다. 크리스토퍼 브라우닝(노스캐롤라니아대, 독일현대사)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Ordinary Men, 1992)에서 독일 함부르크의 보통사람들이 101예비경찰부대로 폴란드에 간 뒤 어떻게 '살인기계'로 바뀌었나를 살펴본 연구자다(연재 92-95). 브라우닝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을 높이 사면서도, 아이히만에겐 적용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이 홀로코스트의 수많은 가해자들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이히만에 대해선 아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자기연출 전략에 속아 넘어갔다. 그럴 수 있었던 부분적 이유를 꼽자면, 아이히만이 흉내를 낼만한 (그럴싸한 변명으로 전범 처벌을 비껴간 뒤 연금까지 버젓이 받고 있던) 숱한 '가해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Christopher Browning, <Collected Memories: Holocaust History and Postwar Testimony>,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03, 3-4쪽)

유대민족사와 홀로코스트 연구자인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세라자니(런던대, 2015년 타계)도 '악의 평범성' 개념이 아이히만에 적용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단순한 군 행정관료'로 본 것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의 아이히만 연구서 <Becoming Eichmann>(아이히만 되기, 2004)의 부제목에 '탁상 살인범'(desk murderer)라는 용어를 붙인 것도 아이히만이 '사무실에서 서류만 만지작거렸던 관리'가 아니라는 반어적인 뜻이 담겼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생각 없는 관료'로 그려냈지만, 실제로 그는 권력을 추구하고 나치 이념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나치 기계 안에서 단순한 톱니바퀴가 아니라(not just a cog in the Nazi machine), 자신의 경력을 발전시켜 적극적으로 행동한 인물이었다.](David Cesarani, <Becoming Eichmann>, Da Capo Press, 2004, 132쪽)

세라자니는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가리켜 '단지 윗선 명령에 따랐던 관료'(a mere bureaucrat following orders)로 보는 것은 "홀로코스트에서 아이히만의 이념적 헌신과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라 했다. 유대인 추방과 이송을 위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곳곳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던 아이히만은 '반유대주의 신념을 지녔던 범죄자'로 못 박았다.

▲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이히만은 방탄유리로 둘러싼 피고석에서 재판을 받았다(1961년 12월15일).Ⓒ위키미디어

"아이히만은 나치 이념에 충실했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비판한 연구자들 가운데 데보라 립스타트(미 에모리대, 유대현대사)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자신 유대인인 립스타트는 아이히만을 '결코 평범하지 않은, 확신에 찬 골수 나치'로 봤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생각이 없는 존재'로 여겼다. 아렌트는 이성과 인간 존엄의 보편성을 거부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틀(ideological frame)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자신의 반유대주의를 숨기지 않았고, 그 이념 아래 자발적으로 행동했고 사명감마저 느꼈다.](Deborah Lipstadt, <The Eichmann Trial>, Schocken, 2011, 118쪽)

립스타트는 1996년 '홀로코스트는 없었다'고 우기는 영국 작가 데이비드 어빙 때문에 치열한 명예훼손 소송전에 휘말렸다. 영국 유대인 여배우 레이첼 바이스가 '립스타트'로 열연을 한 '나는 부정한다'(Denial, 믹 잭슨 감독, 2016)는 이를 소재로 한 영화다(본 연재에서 곧 다루게 될 '홀로코스트 부정론' 관련 글에서 립스타트-어빙 논쟁을 좀 더 살펴볼 참이다).

국내의 나치 연구자 이동기(강원대, 평화학)도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속았다고 여긴다.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보인 연기(어리숙한 법정발언과 자세를 한껏 낮추는 태도)에 넘어가 판단을 잘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지적을 들어보자.

[법정에서 아렌트가 관찰한 아이히만은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고 나치즘을 자기 것으로 만든 신념에 찬 나치가 아니었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파괴적 이념과 반인간적 정치에 물든 악마적 인간이 아니라, 다만 선과 악을 구별할 줄 모르는 관료제적 타성과 인습적 관례에 따른 '명령 수행자' 또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불과했다. 이런 아렌트의 아이히만 분석은 잘못됐다.](이동기, <현대사 몽타주>, 돌베개, 2018, 111쪽)

결론적으로, 이교수는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관찰했던 것과는 반대로 나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반유대주의자였다"고 못 박았다. 인권 연구자 조효제(성공회대 명예교수)도 "진부함이나 평범함만으로 악을 설명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조교수는 "보통사람들이 평범하게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이히만은 공격적으로 평범한 사람"이라 했다. 아이히만의 '파괴적 평범성'이 그의 죄과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조효제, '홀로코스트가 남긴 숙제 '인성교육'⇒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474434.html).

아렌트가 놓친 것과 남긴 것

그렇다면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왜 아이히만의 '맨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잘못 판단했다는 지적을 받게 됐을까. 연구자들이 꼽는 요인은 △예루살렘 재판을 방청할 때만 해도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관련된 주요 자료들(특히 아르헨티나 녹취록)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고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이 보여주었던 (윗선의 명령을 성실히 따른 책상물림 관료인양 꾸몄던) 의도된 연출과 변명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아렌트를 비판하는 연구자들은 아렌트가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을 연구할 시간이 많지 않았고, 특히 문제의 아르헨티나 녹취록을 포함한 1차 자료들에 담긴 섬뜩한 아이히만의 발언들을 모두 다 챙겨볼 수 없었기에 아렌트가 그를 저평가했다고 여긴다. 아렌트가 그 자료들을 꼼꼼히 살폈다면, 아이히만을 달리 보았을 것이란 얘기다. '악의 평범성' 개념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크지만, 적어도 '사악한 전쟁범죄자' 아이히만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아렌트는 121회에 걸쳐 열렸던 예루살렘 공판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 것이 아니라 일부만 참석했다. 아이히만 관련자료(특히 아르헨티나 녹취록)도 일부만 참고했다.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세라자니는 아이히만의 성격이나 범행 동기는 아렌트가 방청하지 못한 재판에서 더 뚜렷이 드러났다고 했다. 다른 연구자들도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예전 발언과 행적에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을 나타냈다.

여기서 아렌트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이런 반론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아렌트는 기본적으로 아이히만을 떠벌리길 좋아하는 속물적이고 허튼 인간으로 봤다. '허풍은 아이히만을 파멸시킨 악덕'이라 했다. 그랬기에 "500만 명을 죽였다는 사실이 내 양심에 큰 만족감을 준다"는 아이히만의 말을 '허풍'으로 여겼다(연재 116). 아렌트가 예루살렘에 줄곧 머물면서 121회 모든 재판을 다 지켜보고 '아르헨티나 문서'를 다 챙겼다 하더라도, 아이히만을 보는 아렌트의 눈길은 '악의 평범성'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듯하다.

끝으로 짚어볼 점 하나. 아렌트의 아이히만 평가에 비판적인 연구자들도 그의 '악의 평범성' 개념만큼은 뛰어난 성찰을 담고 있다고 인정한다. 나치 시절은 물론 21세기 지금도 곳곳에서 보통사람들은 '주어진 명령이니까...'하며 이렇다 할 고민이나 죄의식 없이 악행을 저지른다. 나는 지시에 따라 유대인들을 기차역까지만 데려갔을 뿐이고, 나는 아우슈비츠로 가는 열차를 운전만 했을 뿐이라는 식이다. 보이스 피싱범의 하수인은 "나는 중간에서 돈 봉투를 받아 전달만 했을 뿐"이라 발뺌한다.

유대인 출신의 미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뉴욕시립대, 1933-1984)의 '복종 실험'은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는 한 가지 보기다. 그 실험은 실험주관자의 지시에 따라 (이를테면, 전기 자극을 최대로 높이는 방식으로) 아무 망설임 없이 남에게 필요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제까지 넥타이 매고 출근하던 이웃집 아저씨가 내전이 터진 다음날 인종청소범으로 바뀌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멀리 갈 것 없이 6.25 한국전쟁에서도 같은 마을사람들끼리 좌우로 갈려 잔혹행위를 저질렀다. 이와 관련, 다음 주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지닌 현실적 의미와 문제점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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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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