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두콩(Pisum sativum L.) 꼬투리가 살포시 열리면 햇살을 머금은 초록 알갱이가 구슬처럼 쏟아진다. 볕이 길어지고 기온이 20 ℃ 안팎으로 오르는 5월이 완두콩의 베스트 시즌이다.
완두콩의 밭을 가득 채운 담백한 향은 봄 농사 마무리를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밥상에서는 짧게 머무르지만 인류의 식문화와 농업사에 남긴 발자국은 의외로 깊고 넓다.
케임브리지대 식물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터키·시리아 경계 유적에서 확인된 탄화 완두콩 씨앗의 연대는 기원전 6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로마 농경서에도 '봄 파종, 초여름 수확' 작물로 기록돼 있다. 17세기 유럽 귀족 식탁에서는 콩을 덜 익힌 채 설탕·버터를 곁들여 ‘프티 푸아(petit pois)’라 부르는 별미로 등장했는데 이는 오늘날 냉동 그린피를 탄생시킨 전신이다.
조선에는 15세기경 중국을 통해 전해졌다. 『임원경제지』에는 '만두 콩을 삶아 껍질 벗기고 떡 고물로 쓰며 봄 나물에 곁들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60년대 농가 부엌에서는 쌀 부족을 메우고자 완두·보리를 섞어 지은 잡곡밥이 흔했고 1980년대 이후에는 통조림 완두가 식탁 반찬 부재료로 사용 되었다.
완두콩은 1970~80년대까지 콩·팥류 가운데 재배 면적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밥상에서 흰쌀 선호가 강화되고 수입 냉동 그린피가 늘면서 2000년대 초 급격히 줄었다. 농촌진흥청 통계에 따르면 1990년 1민 5000 ㏊였던 재배 면적은 2024년 3200 ㏊ 수준으로 감소했다.
반대로 최근에는 채식·저지방 단백질 수요 증가와 맞물려 슈퍼푸드로 재조명되고 있다. 전국 로컬푸드 직매장과 온라인 장터에서는 4~5월 햇완두 예약 판매가 조기에 마감되곤 한다.
완두콩은 수분을 제외하면 100g당 단백질 24g, 식이섬유 16g을 담고 있어 콩류 가운데서도 단백질 밀도가 높다. 국립농업과학원 식품성분 DB에 따르면 완두콩 100g에는 비타민K가 35㎍(하루권장량의 50 %), 엽산이 65㎍, 철이 1.5㎎, 칼륨이 270㎎이 들어 있다.
완두콩의 담백한 단맛과 부드러운 전분 질감은 의외로 많은 식재료와 조화를 이룬다. 특히 곡류와 만났을 때 시너지가 크다. 예컨대 현미나 보리와 함께 밥을 지으면, 곡물 속 메티오닌이 완두콩 단백질의 아미노산 구성을 보완해 영양 균형이 맞춰진다. 밥알 사이사이 초록 완두가 톡톡 씹히며 고소한 현미 향을 살려 주니 식감도 한층 풍성해진다.
채소 쪽에서는 당근이 대표 짝꿍이다. 지용성 비타민 A‧K가 풍부한 당근을 버터에 볶아 완두와 섞으면 버터 지방이 두 채소의 지용성 비타민 흡수를 동시에 끌어올려 주고 색감도 선명해진다.
허브와 과일 중에서는 페퍼민트와 레몬이 포만감과 가스 생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상큼한 레몬즙 몇 방울 잘게 찢은 민트를 완두 수프 위에 올리면 봄날 입맛을 깨우는 청량감이 살아난다.
단백질을 더하고 싶다면 닭가슴살이나 흰살생선을 곁들인다. 담백한 단백질원이 완두의 단맛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저지방‧고단백 식단을 완성해 준다.
이처럼 궁합 재료의 조합만 이해하면 완두콩은 어떤 형태로든 훌륭한 한 끼가 된다. 가장 손쉬운 활용은 완두콩 밥이다. 씻어 둔 햇완두를 불린 쌀과 함께 넣고 간을 위해 소금과 참기름을 약간 섞어 밥을 지어 보면 밥알 사이사이 연두색 구슬이 박힌다. 김을 살짝 걷어 내 뜸을 들일 때 완두 특유의 달큰한 향이 솟아오른다.

좀 더 서양식으로 즐기고 싶다면 완두 수프가 좋다. 양파를 버터에 투명해질 때까지 볶다가 데친 완두와 육수를 넣고 10분 남짓 끓인 뒤 블렌더로 곱게 간다. 우유로 농도를 맞추고 파르메산 치즈를 갈아 넣으면 부드러운 크림 속에서 완두의 단맛이 고스란히 녹아든 프랑스식 포타주가 완성된다.
완두의 싱그러운 색을 그대로 남기고 싶다면 페스토 형태가 제격이다. 삶은 완두에 바질, 견과류, 올리브유, 파르메산 치즈, 레몬즙을 넣어 갈아 두면 파스타 소스는 물론 브루스케타 스프레드, 샐러드 드레싱으로도 활용 범위가 넓다.
디저트로 응용하려면 완두콩 흑임자 무스를 추천할 만하다. 완두 퓌레와 흑임자 페이스트, 젤라틴, 우유를 섞어 차갑게 굳히면 초록과 검정이 어우러진 색감이 시선을 잡고 식물성 단백질과 칼슘까지 챙길 수 있다.
마지막으로 완두콩 전은 간식으로 사용하기에도 참 종다. 으깬 완두에 잘게 다진 당근과 부추, 달걀, 약간의 부침가루를 넣어 반죽을 완성하고 올리브유를 둘러 지져 내면 외부는 노릇하고 내부는 촉촉한 봄철 간식이 된다.
이처럼 완두콩은 곡류, 채소, 허브, 육류를 가리지 않고 어울려 밥상에 초록 기운과 고단백 영양을 더해 준다. 궁합 재료와 간단한 조리법만 기억해 두면 5월의 짧은 제철을 더욱 알차게 즐길 수 있다.
한편 완두는 뿌리에 공생하는 뿌리혹박테리아가 공기 중 질소를 고정하므로 추가 질소 비료 투입이 적고 토양개량 효과가 크다. FAO(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 유엔 식량농업기구)의 보고에 따르면 완두 재배지는 대두·옥수수 윤작 시 질소비료 사용량을 25%까지 줄인다. 이는 온실가스 감축과 직결되는 장점으로 꼽힌다.
완두콩은 구약성서 시대부터 현대 식물성 단백질 시장까지 8000년을 관통하며 인간 식생활을 책임져 왔다. 달큰한 맛·높은 단백질·뛰어난 토양개량 효과까지 겸비한 이 작은 초록 알갱이는 봄철이 아니라면 쉽게 만나기 어렵다.
5월이 가기 전 완두콩 밥 한 솥 짓고 파스타에 초록 페스토를 얹어 보자. 입안에 터지는 달콤한 전분 알갱이와 함께 완두가 품은 역사와 영양이 한 그릇에 오롯이 담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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