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지난 22일 '정치 개혁'을 주제로 한 기자회견에서 "국회의원 수를 줄이자는 압도적인 국민 여론에 따라 국회의원 정수를 10% 감축하겠다"며 "의원 수 감축은 의회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가장 상징적 장면이자, 모든 공공 개혁의 동력으로 승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의원 수 감축'이 '의회 기득권 포기'라는 얘기다.
△정말일까.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대법관 증원'을 추진하는 일과 맞물려 생각해보자. 민주당은 대법원이 이재명 대선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 재판에서 유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을 내리자, 이 판결이 이 후보를 제거하려는 조희대 대법원장 등 대법관 10명의 정치적 의도로 이뤄진 것이자 '3차 내란 시도'라고 주장하며 사법부 때리기에 나섰다.
민주당 주장의 시시비비는 일단 논외로 하고, 민주당이 내놓은 대법원에 대한 견제성 조치 중에는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재판소원제, 법왜곡죄 도입 등과 함께 '대법관 증원'이 있다. 민주당 법사위 간사인 박범계 의원은 대법관 수를 현재의 14인에서 30인으로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준비 중이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100명으로 늘리자'는 주장도 있다.
△김문수 후보 등 '의원 수 감축'이 '의회 기득권 포기'라는 논리에서 보면, 민주당이 추진하고 있는 것은 '법원 기득권 강화'인 셈이다. 정말 그런가? 대법관의 권위는 법원조직법으로 그 정원이 정해진 '3214명의 판사' 중 단 14인이라는 소수에서 나온다. 만약 대법관이 30명, 100명으로 늘어난다면 이들 한 명 한 명이 가지는 권위와 대표성은 떨어질 것이다. 따라서 민주당이 대법관 증원을 주장하는 것은 조희대 대법원에 대한 유효한 타격 수단이 된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마침 김문수 후보가 '정치개혁 기자회견'을 한 당일 오후 대한의사협회를 방문해 "무조건 사과드린다"고 백기를 든 의대 증원 문제다. '의원 수 감축'이 '의회 기득권 포기'라는 논리에 따르면,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은 의사 집단의 '기득권'(이라는 것이 있다면)을 강화하는 조치여야 한다. 그런데 왜 의협 등 의료계는 결사 반대할까.
△대법관, 의사, 택시기사(면허 도입 문제에서) 수를 늘리자는 주장은 이들의 '밥그릇 지키기'가 아니다. 정반대로 이들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일이다. 상식이다. 그런데 한국민들은 국회의원 정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지난 20년 간의 정치개혁 논의를 거치면서 정반대의 인식을 갖고 있다. 만약 현재의 국회의원들이 일을 너무 잘해서 굳이 의원 수를 늘리지 않고 현원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줄이자고 주장한다면 이는 생각해볼 문제다. 그런데 '의원들이 일은 안 하고 기득권만 누린다'고 비난하면서 그 숫자를 줄이자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택시기사들이 너무 불친절하고 길도 잘 모르니 택시 수를 줄이자'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가 줄어들어서 귀해진 택시는 더 마음대로 영업을 할 테고, 승객들은 불친절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의원 늘리면 그만큼 의원들 월급 주는 데 드는 세금이 늘어나서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한국 국회의원 1인이 대표하는 유권자 수는 약 17만 명으로 독일(13만), 프랑스(7만) 등 다른 OECD 국가(평균 8만)에 비해 많은 편이다. 또 정치개혁 차원에서 의원 수 확대를 주장하는 시민단체·진보정당은 '현재 국회가 사용하는 예산 총액은 그대로 두고 의원 수만 늘리자'고 하고 있고, 설사 예산이 다소 늘어난다 한들 의원 1명을 늘릴 때 추가로 부담해야 할 돈은 의원 본인 세비와 보좌진 인건비, 사무실 운영비 등을 합쳐 1년에 7~8억 수준이다. 이들 1개 의원실은 평균 2조25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다룬다. (2025년도 정부예산 677.4조 ÷ 의원 300인) 정부 예산집행의 감시자인 이들이 자신들이 심사하는 국가예산의 1%만 아껴도 들이는 돈 수십 배의 효능을 달성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김 후보가 '의원 10% 감축'을 주장한 날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일 하루 전이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중 국회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노무현 정신 계승'을 외치며 대선후보부터 당 지도부 전원이 봉하행을 한 민주당은 특히 곱씹어볼 말이다.
"물론 의원 정수를 늘리는 것에 대해 국민의 비판과 불신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의원 정수는 우리나라 인구 수와 비교할 때 많은 수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국회의원 숫자가 아니라 국회의 질입니다. 국회의원 200여 명의 소모적 정치공방에 발목 잡힌 국회보다, 국회의원 100여 명이 늘어나더라도 그 국회가 더 생산적일 수 있다면 그 비용은 기꺼이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이해를 구하면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200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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