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회 현충일인 6일 광복회 광주지부와 광주전남의병헌창회 회원 40여 명은 광주에서 전남 담양·구례까지 왕복 약 300㎞의 여정을 이어가며 독립운동가와 항일 의병들의 흔적을 기렸다.
이들은 전남 담양에 위치한 고인석 애국지사 묘소를 찾아 참배하며 일정을 시작했다. 고 지사는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매년 현충일이면 광복회 회원들이 그 정신을 기려 묵념을 올리고 있다.
이어 구례 연곡사로 향한 참가자들은 1907년 이곳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장렬히 순절한 고광순 의병장의 순절지를 찾아 참배했다. 이날 현장에서는 고 의병장이 군기로 사용했던 '불원복(不遠復)' 태극기의 복제본이 펼쳐졌고, 헌화와 묵념이 이어졌다.

'불원복'은 머지않아 광복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념을 담은 말로, 고 의병장이 부인에게 붉은 자수로 수놓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 태극기의 실물은 독립기념관에 보관 중이다.
고재청 광주·전남 충의사 현창회장은 "고광순 장군은 항일 의병 10년을 관통하며 가장 체계적으로 무장을 갖춘 지도자였다"고 설명하며 그의 세 가지 항쟁원칙을 소개했다.
첫째는 가국지수(家國之讐), '일제는 가문과 나라의 원수'라는 원칙이다. 고 의병장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제봉 고경명 선생의 12대 손이다.
둘째는 불원복(不遠復), '광복은 멀지 않다'는 희망과 결의를 담은 정신적 상징이었다. 그는 의병 창의 때 이 문구를 태극기에 새겨 군기로 사용했다.
셋째는 축예지계(蓄銳之計), 무기를 준비하고 병력을 훈련시키는 전략이었다. 고 의병장은 지리산 연곡사에 의진을 조직해 무기와 군량을 비축하고 훈련을 지속했다.
고 회장은 "즉흥적이던 기존 의병 활동과 달리 녹천은 체계적으로 항쟁을 준비했다"며 그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이처럼 일제는 고 의병장을 제거하기 위해 1907년 일본은 포대를 연곡사까지 끌어와 포격전을 감행했다. 포병부대까지 동원된 의병 항일전은 고 의병장이 유일하다고 고 회장은 전했다.
이날 연곡사 순절지에서는 구례군민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세운 고광순 의병장 추모비 앞에서 묵념이 이어졌다.

고욱 광복회 광주지부장은 "과거엔 지역민이 자발적으로 비를 세우고 추모했지만, 이제는 정부가 더 관심을 갖고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역사현장을 찾는 것이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후손으로서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동한 석주관성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지리산 요충지로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구례 의병들이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날 참배한 석주관칠 의사 묘역에는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왕득인,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왕의성 의병장과 구례현감 이원춘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칠의사는 승병 153명과 화엄사에서 제공한 군량미 103석을 지원받아 석주관성에서 최후의 혈전을 벌였으며 모두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행사는 고재청 녹천 고광순기념사업회장이 주관해 진행됐으며 의병단체와 연곡사 주지스님도 조화를 보내는 등 지역 종교계와 보훈단체의 참여 속에 조용하고도 의미 깊게 이어졌다.
현충일 70주년을 맞은 이날 참가자들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 후손으로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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