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대통령선거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로써 작년 12월 3일 밤에 시작된 내란과 그 진압 과정이 일단 매듭을 지었다. 실패하기 힘들다는 친위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진압한데다 정권 교체로 마침표까지 확실히 찍었으니, 산뜻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개표 결과를 마주하며 썩 유쾌해하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내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이재명 후보가 '압도적 승리'를 거둬야 한다는 논리가 선거판을 지배했는데, 막상 최종 득표율(49.42%)은 '압도적 승리'에 미달한다고 느낀 것이다. 상대 비율이 아닌 절대 수치로 따지면, 이재명 후보를 선택한 1729만여 표는 대한민국 역사상 한 후보가 받은 최다 득표다. 앞으로도 이에 근접하는 득표 기록은 나오기 힘들다. 그럼에도 50%를 넘느냐 못 넘느냐는 상징성이 사람들의 기분을 더 크게 좌우한다.
아니, 많은 시민들이 실망한 것은 '압도적 승리'를 하지 못했다고 느낀 탓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내란 지지-동조 세력의 '압도적 패배'를 실현시키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탓이었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30%대 득표율에 그치리라는 출구조사 결과들과는 달리, 41.15%를 득표했다. 이 경우에도 '40%' 이상이냐 이하냐는 상징성 때문에 '패배'의 빛이 기대보다 희미하게 다가온다.
이로 인해 지난 며칠 동안, 내란 동조 정당이 낸 후보를 선택한 40% 이상의 시민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는 심각한 고민과 한탄이 쏟아졌다. '극우'가 국민 3분의 1을 넘어 절반 수준을 넘본다니, 이 정도면 나치당 집권 직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아닌가. 어떤 이들은 김문수 후보 표에 이준석 후보 표를 더하면 이재명 당선자가 받은 지지보다 더 많다는 산술적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다고까지 말한다. 모처럼 새 정부가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려와 불안이 한국 사회에 불길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과연 '극우'가 40% 이상인가?
그러나 나는 이런 분위기에 좀 딴죽을 걸고 싶다. 40% 이상의 유권자가 김문수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는 사실을 한국 사회가 그만큼 '극우화'했다는 뜻으로 해독하려면, 몇 가지 강한 전제가 필요하다. 김문수 후보에게 투표한 이들이 무엇보다 최근 국민의힘의 이념, 노선, 정책에 끌려 그렇게 투표했다고 전제해야 하며, 특히 선거운동 막판까지도 친위쿠데타와 선을 긋기는커녕 윤석열을 옹호한 김문수 후보-국민의힘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동의하여 그런 선택을 했다고 전제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전제들보다 더 한국 정치 현실과 어긋나는 명제는 생각하기 힘들다. 대통령 중심제를 취하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대통령선거에서 주된 판단 기준은 정당이 아니라 인물이다. 소속 정당의 이념, 정책이 아니라 후보 개인을 둘러싼 논란이나 호불호가 결정을 좌우한다. 더구나 한국의 경우에는 지역별 투표 관성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결정 요인이 작동한다.
또한 최근에는 '저쪽이 싫어서 이쪽을 선택한다'는 논리, 정서 역시 중대한 역할을 한다. 정치평론가 김민하가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반대를 앞세워 손익을 셈하는 한국 정치>(이데아, 2022)에서 탁월하게 지적한 것처럼, 양대 정당 구도가 뿌리 내린 많은 나라에서는 요즘 들어 단지 '저쪽이 싫어 이쪽을 선택'하는 악무한의 게임이 민주 정치의 전부가 되어가고 있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은 이런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의 전형적 사례 중 하나였으며, 그렇다면 이번 대선에서 김문수 후보에게 쏠린 지지 중 상당수 역시 이 게임의 연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김문수 후보 득표율 41%는 결코 '극우'나 '내란 지지'와 등치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와 사연을 담고 있다. 친위쿠데타에 동조하면서 그 불발이 아쉬워 국민의힘 후보를 선택한 유권자들도 분명히 있겠지만, 그런 입장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다른 여러 명분을 내세우며 동일한 선택을 한 유권자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렇다면 물음이 바뀌어야 한다. 비판과 우려, 문제제기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문제는 '극우'를 선택한 40% 이상의 시민이 아니다. 40% 이상의 시민이 '극우'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이번 대선의 구도와 동학이야말로 진짜 문제다. 극우 대중과 그렇지 않은 대중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마치 극우파가 절반에 육박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익숙한 정치 질서와 그 논리야말로 이번 대선을 계기로 우리가 더욱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다.

'압도적 패배'를 실현시켰던 2017년 대선
불과 8년 전에 한국 사회가 마주했던 전혀 다른 투표 결과를 돌아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그때는 '압도적 패배'가 실현됐었다. '압도적 승리'는 몰라도 '압도적 패배'는 분명히 달성됐다. 이번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탄핵-파면 탓에 실시된 2017년 조기 대선 이야기다.
이때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41.08%를 득표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얻은 지지보다 8%포인트 이상 낮고 400만 표 적은 수치다. 득표율로 따지면, 이번에 김문수 후보가 거둔 성적과 비슷하다. 승리하기는 했지만, 분명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현 국민의힘의 직접적 뿌리라 할 자유한국당은 확실히 '압도적 패배'를 당했다. 홍준표 후보의 득표는 24.03%, 785만여 표에 머물렀다. 민주자유당 창당 이래 이 계열 정당이 거둔 성적으로는 최악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반대한 세력이 거둔 '압도적 패배'였다.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번 대선과 달리 2017년 대선은 실질적인 다자 구도였기 때문이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21.41%, 700만여 표를 받아 3위를 기록했고, 220만여 표(6.76%)를 받은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201만여 표(6.17%)를 받은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그 뒤를 따랐다. 75%가 넘고 2500만 명에 육박하는 유권자가 홍준표 후보 아닌 다른 후보들을 선택했기에 탄핵 반대 정당이 '압도적 패배'를 당했다고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간혹 이때 구도를 혼동하는 이들이 있다. 안철수, 유승민이 현재 국민의힘에 속해 있기 때문에 2017년에 두 사람에게 쏠린 표 역시 현재의 국민의힘 지지층과 직결된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 + 심상정' 대 '홍준표 + 안철수 + 유승민'이 '5 대 5'로 호각을 이루는 세력 균형이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 한국 사회를 지배한다고 바라본다.
하지만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2016-17년 촛불시위에서 더불어민주당이나 진보정당들만큼이나 적극적인 참여 세력이었다. 핵심 지지 기반도 현재 이재명 대통령-더불어민주당을 확고히 지지하는 호남의 오랜 범민주당 투표층이었다. 한편 유승민의 바른정당은 비록 새누리당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이었지만 어쨌든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국회 가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두 세력 모두 당시에는 엄연히 탄핵 찬성 블록의 구성원들이었다.
2017년 대선에서는 이렇게 탄핵 찬성 블록의 다양한 정당-후보들이 실질적인 경쟁을 벌인 덕분에 80-90%를 오르내리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찬성 여론이 거의 그대로 대선 결과에 반영됐다. 달리 말하면, 이런 다당 구도 덕분에 탄핵 반대 세력에게 '압도적 패배'를 안겨줄 수 있었다.
반면에 이번 대선에서는 8년 전 안철수, 심상정 표의 상당 부분이 이재명 후보에게 가기도 했겠지만, 안철수, 유승민 표 중 그 이상이 김문수 후보에게 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압도적 승리'도 없었고, '압도적 패배'도 없었다. 2017년 대선과 2025년 대선 사이의 사뭇 다른 결과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서로 다른 정당 체제의 관건적 역할이다.
물론 그 사이에 한국 사회 자체가 변화한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2017년에는 25%였던 극우 성향이 40% 이상으로 확대됐다는 식으로 해석될 만큼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이런 상당한 '착시'를 낳도록 정치 질서가 변화했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 2017년에는 안철수, 유승민 등의 선택지가 있었기에 '극우'와 혼동되지 않았던 대중이 이번에는 양대 정당에 훨씬 더 집중된 구도 탓에 '극우연합'의 일원으로 계산됐다.
진실로 걱정되는 것은 이런 계산법이 종이 위의 '극우연합'을 오히려 실제로 과반에 육박하며 공통의 정체성을 다져가는 '극우연합'으로 몰아갈 가능성이다. 김문수 후보-국민의힘이 만들어내지 못한 40% 이상 투표층의 '구심력'이 역설적으로 이들을 '극우'라 싸잡아 규정하는 담론의 범람으로 인해 실제로 형성될 가능성이다.
정치 개혁이 '반극우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이유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8.34% 득표를 둘러싼 논란에서도 비슷한 위험을 느낀다. 물론 이준석 의원은 분열과 혐오를 부추겨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위험한 정치인이다. 윤석열의 어설픈 파시즘보다 훨씬 더 영악한 극우 포퓰리즘을 구사할 줄 안다는 점에서 장기적 위험성은 윤석열 도당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신당은 민주 정체의 노골적 파괴와는 분명히 선을 그었고, 그렇기에 12. 3 친위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일단 선택 가능한 대안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도 일부 언론과 분석가들은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김문수 투표층과 이준석 투표층을 '극우'라는 동일한 범주로 한데 묶는다. 김문수 후보 지지층에 대한 분석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들은 이준석 후보를 선택한 유권자들의 다양한 이유를 이준석식 정치의 극악한 면모 몇 가지로 환원한다. 노골적 여성 혐오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 가운데 여성들마저 이준석 후보에게 상당한 지지를 보낸 이유나, '반페미니즘' 말고도 젊은 남성들이 이준석 후보를 지지한 또 다른 이유들은 시야에서 쉽게 삭제한다. 8%의 시민들은 졸지에 혐오로 무장한 '이준석주의자들'이 되고, '이준석주의자들'을 낳은 한국 사회는 구제불능이라는 결론이 뒤따른다.
그러나 정치는 시민사회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자생적 '이준석주의자들'이 아래로부터 성장한 덕분에 이준석식 정치가 상승세를 탄 게 아니다. 무정형의 시민사회에 꼴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정치의 기능이다. 양대 정당 독점 구도에서 유일한 원내 제3세력으로 남은 혐오주의자 이준석이 존재하고 행동했기에, 다른 형태로 결집할 수도 있었을 시민사회 내 흐름들이 하필이면 혐오주의자 이준석 지지층으로 결집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생적 '이준석주의'의 요소들(가령 일베나 펨코식 부족주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신랄하게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극우 포퓰리스트 이준석 말고는 양대 정당 바깥에서 다른 대안이 성장하지 못하게 가로막아온 현 정치 체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재명 49 : 김문수 41 : 이준석 8 : 권영국 1'이라는 대선 결과가 한국 시민사회가 도달한 현실을 반영한다고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단언해야 하며, 양대 정당이 독점하는 현 정치 체제가 현실을 '나쁜 방향으로 끊임없이 굴절시킨다'고 비판해야 한다. 정말로 극우화에 맞서고 싶다면 현실을 이렇게 굴절시키는 정당 체제를 뒤흔들고 바꿔낼 정치 개혁을 압박하고 관철해야 하며, 이런 격동을 통해 이번 대선에서 '김문수 41'과 '이준석 8'로 나타난 일시적 동맹이 참으로 '일시적' 현상에 그치도록 몰아가야 한다.
이런 강력한 정치 개혁 담론-운동을 동반하지 않는 '반극우 정치'는 역설적으로 '김문수 + 이준석 = 극우 49%'의 논리를 현실로 굳혀줄 뿐이다. 이번 대선에서 단지 느슨한 수준으로 김문수이나 이준석 지지층에 합류한 이들에게 더 끈끈하게 결합할 이유만 더해줄 뿐이다.
'극우'가 결국 승리하도록 길을 닦아주는 '반극우 정치'. 대선 결과를 바라보며 우리가 가장 심각하게 읽어내야 할 두려운 조짐은 오히려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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