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유시민만큼 윤석열을 비판했느냐
"나는 군 복무를 26개월간 했다." 이렇게 시작하면서 쓴 글이 있다. 가부장제의 유산이 남자의 삶 안에 여전히 존재함을 잊지 말자는 내용이었다. 경험상, 이런 글은 저자가 현역인지 면제인지를 따지는 이상한 반응으로 이어짐을 잘 알고 있어서다. 방송에서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니 실시간 검색어가 '오찬호 군대'였다. 그래서 미리 말하고 싶었나 보다. 군대 다녀온 남자라고 생각이 다 같지 않다고.
나는 유시민 작가의 글을 26년 전부터 읽고 있다. 1999년, 군대 내무반에서 십여 년 전 누가 두고 갔다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손에 집은 게 처음이었다.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 당시, 모두가 이회창 이야기만 하던 대구에서 나는 그의 책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를 교본 삼아 상대와 설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다는 아니지만 꾸준히 읽었다. 내 의식체계 일부에 유시민의 설계도가 어찌 없다고 하겠는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이유는 이 글의 결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다. 대선 며칠 전, 유 작가는 김문수 후보의 배우자 설난영 씨를 평가하며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올라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식의 말을 해서 논란이 되었다. 그러자 '맥락을 이해하라'는 지지자들의 반격이 이어졌다. 나는 맥락을 이해해도, 비약과 비하가 심한 건 사실이라는 입장을 SNS에 끄적거렸다. 그리고 이상한 DM을 많이 받았다. '맥락도 파악 못 하는 수준이 알만하다', '너는 유시민만큼 윤석열을 비판했느냐', '김문수 좋은 일 하고 자빠졌네' 등등의 문장이 욕설과 함께 섞여있었다.
그러려니 했다. 하나하나 짚은들, 당시 상황이 대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보수언론은 '옳거니 잘 걸렸다'는 식으로 대선후보도 아닌 자의 발언을 과하게 보도하는 중이었고 이에 편승해 유시민에 대한 공격이 곧 이재명 공격이라 여기는 여러 정치인이 '이때다!'하면서 맹렬히 달려들던 상황이었다. 그러니 논리적 토론이 불가능했다. 무슨 말이든 정치적으로 우리 편이냐 아니냐의 기준에서 해석될 소지가 다분했다.
무엇보다, 2002년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했던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를 흉내 내며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김문수 후보의 모습은 참으로 기만적이었다. 노무현은, 장인의 빨치산 경험을 문제 삼는 색깔론과 싸운 거다. 정치인과 언론의 융단폭격을 정면돌파한 거다. 하지만 김문수 후보는 자신을 물어뜯는 기득권과 싸운 게 아니다. 언론과 정치인이 유시민 작가를 비판하는 바람을 타고 이재명을 공격했을 뿐이다.
그러니, 내 의도가 무엇이든 당시의 유시민 비판은 김문수 도와주는 꼴이라고 누군가는 여길 수도 있었다. 그거 신경 쓸수록 공론장이 퇴행함을 잘 알지만, 내란 심판이라는 이번 선거의 의미를 쉽게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선거가 잘 끝났으니, 짚고 넘어가자. 이는 정치적 진영의 문제가 아니기에, 나는 넓은 의미에서 '유시민 키즈'임을 낯간지럽지만 밝힌 거다. 유시민 좋아해도, 이런 말 할 수 있는 거다. 같은 편이라고 같은 생각으로 뭉치자는 거, 그게 더 위험하다.

맥락에 무엇이 간과되었는가
시작은, 설난영 씨는 도대체 왜 그런지를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그럴 만하다. 설난영은 무례한 노조 식별 관상학을 피력했다. 그리고 법인 카드 어쩌고를 말하며 상대편 배우자를 끊임없이 자극하더니 본인 동의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했을 후보 배우자 토론회에 찬성했다. 이 괴상함, 유시민 작가의 말처럼 지금까지의 선거에서는 없었던 유형임은 분명하다. 그러니 '저런 사람' 심리 분석도 가치가 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의 배우자니 사회적 의미가 없진 않았을 거다.
그래서 당사자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느끼며 살아갔을지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통해 '본인 인생엔 없는 자리에 가서, 발이 공중에 떠 있다'는 분석이 도출되었다. 이 틀은, 차별과 혐오가 일상 속에서 어떤 씨앗으로 존재하는지를 오랫동안 취재하고 채집해 온 내 입장에서는 무척 익숙하다. 하지만 어색하다. 왜냐하면, 이는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을 차별할 때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철저히 외부에서 사용하는 틀이라는 거다.
나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와 <진격의 대학교>(2015)라는 책을 집필하며 대학생들의 차별적 사고가 어떤 구조로부터 발현되는지를 추적한 바 있다. 정시 합격생이 수시 합격생을 비하하는 정당성을 찾았다. 본교 캠퍼스 학생이 지방 캠퍼스 학생을 우롱하는 근원을 확인했다. 편입생을 조롱하는 이유를 물었다. 인문계 전공자들을 놀리는 배경을 파헤쳤다. 그때마다 가해자에게 일관되게 발견되는 의식의 틀이 바로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주제에'였다. 각각의 추임새는 이러하다. "수능 점수로는 이 대학 절대 못 오는 수준이면서", "야구 잠바에 적힌 대학 이름만 보면 아무도 지방 캠퍼스인 줄 모르겠네", "편입 아니었으면 쳐다도 못 볼 대학에 운 좋게 와 놓고", "인문계 선택 안 했으면 이 학교에 다녔겠어?"
유 작가의 결론은 당사자에게서 발견하기 힘든 거다. 본인 스스로를 '나는 내 인생에 오지 않을 곳에 왔다'라면서 의식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설난영, 김문수 부부의 행보를 다르게 해석한다. 이들의 세밀한 삶의 변화는 모르지만, 유시민이 언급한 '동고동락했던 과거 동지의 전화를 매몰차게 응대하는' 사람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할 때 노조는 아주 그냥 과격하고, 세고, 못생겼지만, 저는 예쁘고, 문학적이고, 부드러운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노조를 접하게 됐단 말이죠"라면서 자신의 과거를 왜 부정하는지를 연결하는 건 어렵지 않다.
자신의 인생에서 절대로 가지 못할 곳에 갔다고 생각한다면, 저렇게 희화화하지 않았을 거다. 과거의 자신에게 미안해서라도 그렇게 못한다. 하지만 '내가 진작에 갔어야 할 곳에, 드디어 왔다'라고 스스로 확신한다면, 한때의 자신 모습을 배신하는 게 왜 어렵겠는가. 훌륭한 남편을 만나 고양된 게 아니라, 자신과 급이 맞는 남편을 만나 원래의 인생을 이제야 찾았을 뿐인데, 변절자라는 주변의 소리가 들릴 리 없다. 그래서, 두 다리가 하늘에 떠 있는 게 아니라 아주 꼿꼿하게 그 높은 땅에 박혀있다. 이때부터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표현처럼, 어떻게 저 사람이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행동과 말이 이어진다. 김문수 후보가 한순간에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이 위에서 사람 내리깔아 보는 시선을 마주하면서도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간 인물이라 생각한다. 대학도 안 나온 변호사 노무현, 중·고등학교 근처도 못 간 소년공 출신 이재명은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한 정치권 한가운데를 뚫었다. 천박한 엘리트 정신을 찬양하는 언론과 싸웠다. 그들이 들은 "촌놈, 팔자 폈네"는 일반적인 시골 사람들이 듣는 수준보다 훨씬 날카로웠을 거다. 팔자 폈다는 말 뒤에는 늘 "공중에 붕 떠 있겠지. 인생에서 상상도 못한 자리에 있으니까"라는 빈정거림이 따라붙었을 거다.
사람들은 이 어색함을 잘 안다. 그래서 공격받는 두 명의 대통령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거다. 엘리트라는 거대한 벽이 사람을 조롱하는 모습은 대통령을 꿈꾸지 않아도 한국 사회 어디에서나 만나니까 말이다. 회사에서 누구의 승진을 출신 대학과 비교해 운이 좋았다면서 비꼬는 자는 얼마나 많은가. 이 아파트 입주민치고 직업이 이상하네 따위의 헛소리는 드물지 않다. "본인이 대단한 줄 아나 봐"라는 수군거림은 곳곳에 부유한다.
유시민 작가는 설난영 씨를 분석했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이 분석 당한 기분을 느꼈을 거다. 내가 겪은 예전의 한순간이 눈앞에 펼쳐지기에 숨이 막힌다. 아, 그때 그 사람도 날 '주제도 모르고 설친다고' 생각한 거구나. 그 찝찝한 표정은 '까불지 말라'는 뜻이었구나. 발버둥 치며 겨우 잊으려고 한 악몽이 재발하니 얼마나 끔찍한가. 그래서 비판하는데, 이를 정치적 올바름에 매몰된 자의 피해망상으로 규정해서야 되겠는가. 자꾸만 맥락을 보라면서 윽박지르는데, 그 맥락에 무엇을 간과했는지를 무시하면 되겠는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