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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반환에 대한 한일 간 차이, 회담 전부터 이미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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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반환에 대한 한일 간 차이, 회담 전부터 이미 나타났다

[일본은 왜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는가?] 제1부 ②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문화재 반환 인식

'대일배상요구조서'와 약탈 문화재 반환

이승만 대통령의 문화재 반환에 대한 큰 관심과 대일배상요구 준비는 '대일배상요구조서'의 약탈 문화재 반환 명시로 이어진다. 1949년 3월 15일에 완성된 '대일배상요구조서'는 서문에서 일제강점기의 피해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한국 국민의 자유의사에 반한 일본 단독의 강제적 행위로서, 그 장구한 대한민국 지배는 정의, 공평, 호혜의 원칙에 입각치 않고 폭력과 탐욕의 지배였던 결과, 한국 및 한국인은 일본에 대한 여하한 국가보다 최대의 희생을 당한 피해자이다."

이와 함께 대일배상은 "일본을 징벌하기 위한 보복의 부과가 아니고 희생과 회복을 위한 이성적 권리의 요구"라는 점을 천명했다. 그리고 조서는 제1부 '현물피해목록', 제2부 '확인 채권', 제3부 '중일 전쟁 및 태평양 전쟁에 기인한 인적・물적 피해', 제4부 '일본정부의 저가 수탈에 의한 피해'에 관한 목록을 수록했다.

▲ '대일배상요구조서' 표지와 전문에 실린 대일배상요구의 근거. ⓒ엄태봉

이 중 문화재 반환 관련 내용은 제1부 '현물피해목록'에 있었다. '일본인에게 약탈된 서적의 반환을 요구함'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는 과거 일본인에게 비합법적으로 약탈되었던 서적과 미술공예품 전부의 반환을 기하고, 여기에 제1차로서 서적의 반환을 요구"한다는 취지를 설명하면서 문화재 반환을 요구했다.

▲ '대일배상요구 일람표' 중 문화재 반환 관련 항목. 고서적과 미술품, 공예품 등 문화재의 상세 항목과 수량이 적혀 있다.ⓒ한국정부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문화재 반환 목록에는 고서적 212종, 미술품 및 골동품 827종 총 1,039종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와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등의 개인 소유 문화재, 박물관 소장 문화재, 몽유도원도, 종(鍾), 고서적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문화재 반환 목록은 제1차 한일회담에서 한국 측이 제출한 '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협정 요강 한국 측 제안'에 포함되었다.

한일회담 준비와 문화재 반환 문제

대일강화회의에 참가하여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려고 했던 한국 정부의 노력은 1951년 7월 초 대일강화회의에 참가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양자 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유진오와 임병직을 일본에 파견하여 자료 수집과 일본 사정을 파악하기로 한다.

유진오는 1951년 9월 10일부터 약 50일간에 걸친 출장 결과를 '재일 동포의 국적 문제', '일본 및 일본인에 대한 한국 및 한국인의 재산 및 채권을 포함한 청구권 문제'로 정리한다. 한국 외교문서인 <한일회담 예비회담(1951.10.20-12.4) 본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유진오는 이 출장 보고서에서 문화재 반환 문제를 약탈재산으로 생각했으며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United States Initial Post-Surrender Policy for Japan' 및 'Basic Post-Surrender Policy for Japan'에는 일본은 식별할 수 있는 모든 약탈재산을 즉시 반환할 것이 규정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한국은 일본의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이 규정은 엄격히 말하면 한국에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정이 필요한 한일 간의 관계는 반드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발생된 문제에 국한되어야 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따라서 약탈재산 반환의 문제는 한국의 경우 적어도 청일전쟁까지 소급해서 올라가야 할 것이다."

▲ 주일대표부 유진오 법률고문의 일본 출장 보고서 중 문화재 반환 부분. 약탈재산으로써 문화재 반환 문제를 간주하면서 청일전쟁까지 소급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적었다. ⓒ 한국정부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유진오는 미국의 대일배상정책과 관련한 약탈재산 반환을 그대로 한국에 적용할 수는 없지만, 한일 양국은 '조정'이 필요한 관계이기 때문에 청일전쟁까지 소급해서 문화재 반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조정'이란 청일전쟁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불법적·강제적으로 지배한 과정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점, 즉 침략과 식민지 지배로 인한 과거사의 청산이었을 것이고, 유진오는 문화재 반환 등 약탈재산의 반환을 통해서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본의 문화재 반환에 대한 인식

일본 정부는 패전 이후 한국과의 문화재 반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이를 명확하게 언급한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일본 정부가 작성한 '할양지에 관한 경제적 재정적 사항의 처리에 관한 진술'(1945년 11월 21일)과 '일본인의 해외 활동에 관한 역사적 조사'(1946년 9월 28일)라는 자료를 통해 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먼저 '할양지에 관한 경제적 재정적 사항의 처리에 관한 진술'은 조선을 식민지 지배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일본이 식민지를 착취했다는 것은 정치적 선언 내지 실정을 모르기 때문에 나온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지역들은 모두 당시의 국제법, 국제관례상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방식으로 취득되었다. 세계 각국들도 오랫동안 일본 영토로 승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한일 관계에서 생각해 본다면, 일본 정부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합법적이었고, 식민지 조선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발전이 이루어졌으므로 조선에 대한 착취 등과 같은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 일제가 조선에서 발굴한 문화재를 수록한 조선고적도보. 일본은 이와 같은 문화재 발굴과 보호가 식민지 지배의 성과라고 생각했다. ⓒ조선고적도보 제2권

한편 '일본인의 해외 활동에 관한 역사적 조사'의 '<조선편> 제7장 제6절: 조선 문화재의 보존과 연구조사'는 다음과 같이 일본이 조선의 문화재를 보존·보호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그 시정 초기부터 수탈은 엄격하게 경계했으며, 오히려 종래 등한시되었던 문화재 존중 정신을 고양하고, 그 보호시설을 충실하게 하여 연구 자료를 정비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에는 없는 것을 행한 것이며, 초대 총독의 현명한 대책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일제강점기는 합법적이었고 식민지 조선을 다방 면에서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이와 함께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한 문화재 보호는 일본에서도 실시되지 않았던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현명한 대책'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사업에 참가하고 한일회담에서 문화재 반환을 반대했던 후지타 료사쿠(藤⽥亮策)의 견해에서도 이와 같은 인식은 확인할 수가 있다. 그는 일본이 조선에서 실시한 문화재 관련 정책에 대해 "일본의 한반도 통치의 빛나는 기념비로써 유식자들을 통해 세계 사람들에게 널리 이해시키고, 동시에 한반도 사람들이 이 점만은 영구히 기억하길 바란다"라고 회고했다.

한일회담 개최 이전 이미 상반된 문화재 반환 인식 드러나

이와 같이 패전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물론이고, 조선에서 이루어진 문화재의 발굴, 보호, 반출도 정당한 방법으로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이는 한일회담의 문화재 반환 교섭으로 이어졌고, 식민지 지배와 문화재 약탈이 불법적·강제적이라고 생각했던 한국의 인식과 큰 괴리를 보이며 충돌했다.

한일 양국은 '광복'과 '패전'이라는 상반된 역사를 경험한 만큼 식민지 지배와 문화재 반환에 관해서도 이미 한일회담 개최 이전부터 상반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일 양국은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한일회담에 임했고, 문화재 반환 문제를 둘러싼 대립의 요인이 된다.

■ 참고문헌

대한민국정부, <대일배상요구조서>, 1949.

엄태봉,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문제의 구조'>, 경인문화사, 2024.

大蔵省管理局, <日本人の海外活動に関する歴史的調査>, 発行年不明.

高崎宗司, 日韓会談の経過と植民地化責任-1945年8月~1952年4月, <歴史学研究> 第545号, 1985.

藤田亮策, 朝鮮古文化財の保存, <朝鮮学報> 第1集, 1951.

森田芳夫,<韓国における国語・国史教育-朝鮮王朝期・日本統治期・解放後>, 原書房,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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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봉 대진대학교 강의교수

엄태봉 대진대학교 국제학부 강의교수는 정치학자로 문화재 반환 문제, 강제동원문제,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의 역사인식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한일 관계 전문가다. 역사인식문제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로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 <교과서 문제는 왜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가?>, <일본 '영토·주권 전시관'의 영토 문제 관련 홍보·전시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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