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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권시대, 왜 '해월'을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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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권시대, 왜 '해월'을 읽어야 하는가?

[복지국가SOCIETY] 평민철학자 해월 최시형

국내의 협동조합운동사를 들춰보면 1920년 중반 이후부터 정말(丁抹)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덴마크의 한자식 표기다. 당시 인구의 10%이상이 참여했다는 기미년(1919년) 3·1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부는 만주와 연해주로 가서 무장독립운동을 시작했고, 국내에 남은 이들은 실력양성을 해야 한다는 자각을 하면서 학교를 설립하고 경제공동체로 협동조합을 만들기 시작했다. 1920~30년대 덴마크 배우기의 열풍이 있었다.

덴마크의 아버지, 그룬트비

19세기 중반 덴마크는 우울한 상황에 있었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집권하고 있던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해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주고, 곡창지대인 홀스타인도 넘겨주어야 했다. 남은 땅은 유틀란드 반도 중북부의 황무지였기에 국가는 파산상태에 몰렸고, 국민들은 절망상태에 있었다.

덴마크의 암울한 분위기에서 등장한 이가 그룬트비(1783~1872)였다. 그룬트비는 당시 라틴어를 암기해야 하는 강압식 교육을 반대하며, 덴마크어와 덴마크 역사속에서 국민들의 삶을 위한 학교(School for Life)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폴케호이스콜레로 그의 생각이 결실을 맺었다. 폴케호이스콜레는 식민지 시대에 '국민고등학교' '민중고등학교'로 번역되었지만, 국내에서 대안학교가 많이 만들어지던 2000년대 무렵에는 '평민대학' '민중대학'의 이름으로 불렸다.

인간 해방과 자유·평등을 강조한 폴케호이스콜레를 거쳐 간 농민들은 협동조합 설립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덴마크는 세계의 모범적 농업국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32년 국제협동연합회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협동조합운동에 참여한 약 50개국 중에 조합가입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덴마크였다. 당시 덴마크 전체 인구는 355만 정도였는데, 조합원 수는 145만 4천명으로 인구의 40%가 협동조합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식민지 조선에도 '정말(丁抹)식 농촌'을 만들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협동조합운동사의 한 장을 차지하게 됐다.

나라를 잃은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덴마크 모델은 새로운 희망으로 보였다. YMCA는 신촌에 '정말국민고등학교식 농민수양소'를 만들어 농촌운동가를 양성하기 시작했고, 덴마크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남강 이승훈도 평북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오산학교 부근에서 이상촌 운동을 전개했던, 이승훈의 조카 손자인 이찬갑은 해방후 남쪽으로 내려와 1958년에 충남 홍성의 홍동에 '풀무고등공민학교'를 열었다. '머리도 없는, 꼬리도 없는(無頭無尾)' '위대한 평민'을 키우고자 했던 국내 대안학교의 맏형이라고 하는 풀무학교의 출발이다.

평민철학자, 해월 최시형

덴마크에 그룬트비가 있었다면, 국내에서는 해월 최시형(1827~1898)을 다시 봐야 한다. 그룬드비와 거의 동시대를 살다간 해월의 철학을 다룬 <평민철학자, 해월 최시형>(모시는 사람들 출판)이 김용휘 교수의 수고로 출판됐다. 해월 최시형은 동학의 2대 교주로 역사교과서에 나오지만, 그의 철학과 행적을 아는 사람은 소수의 전공자를 빼고는 드물다. 해월이 없었다면 갑오년의 동학농민전쟁도, 기미년의 3·1독립운동도 일어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기는 하지만.

▲<평민철학자 해월 최시형>(김용휘 지음) ⓒ모시는사람들

해월은 1827년에 경주에서 태어났다. 6살 때에 어머니가 죽자, 계모가 있던 포항의 영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5살에 아버지도 죽고, 19살에 결혼해 머슴살이와 제지소 일꾼, 화전민으로 겨우 처자를 부양하며 살아가던 평범한 시골 촌부였다. 해월은 35세가 되던 1861년에 수운 최제우를 만났다. 최제우가 도를 깨우쳤다는 소문이 경주 일대에 돌기 시작했고, 해월도 소문을 듣고 그 해 여름에 찾아갔다. 해월은 수운을 만나자, 자신의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느끼고 공부와 수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운 최제우의 아버지 근암 최옥은 경주 일대에서 이름난 유학자였다. 서자로 태어난 최제우는 과거를 볼 수 없어 애시당초 출세길이 막혔지만, 그를 따르는 양반 제자들은 많았다. 해월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동학의 창립교주 수운은 2대 교주의 자리를 2년 만에 해월에게 넘겨주고, 64년 3월에 대구에 있던 경상감영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죄명은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는 죄(左道亂正之律)'였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교주 최제우 사형으로 동학에 대한 탄압은 본격화되었고, 해월이 1898년 원주에서 잡혀 1달 뒤에 스승과 같은 죄목으로 사형당할 때까지 35년간은 도망자의 신세였다. 인생의 절반은 도망다니면서 살았기에 그의 별명은 '최보따리'였다. 체포의 낌새가 보이면 보따리 하나 들고 바로 튀었고, 도망다니면서 포·접이라는 동학조직도 만들고, 갑오년의 농민전쟁도 준비했다. 도망다니면서 스승이 남긴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의 출판도 하고, 체포되기 1년 6개월 전에 의암 손병희에게 3대 교주의 도통을 전수했다. 과연 무엇이 '35년간 지명수배'라는 고된 삶, 엄혹한 현실을 견디게 했을까?

35년간의 지명수배, 무엇이 고된 삶을 지켰을까?

무엇이 해월에게 그런 고통을 견디게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의 사상과 철학을 통해 추측해보는 수밖에는 없다. 수운이 1860년에 영적인 체험을 하고, 크게 깨우친 이후에 바로 한 일은 자신의 집에 있는 2명의 여종을 해방시키고, 한 명은 수양딸로 다른 한 명은 며느리로 삼은 것이다.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양반사회에서는 엄청난 사건이었고, 이것은 수운을 죽음으로 이끈 계기로 작동했다. 천대받던 노비와 하층민에게도 천지개벽과 같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조선은 노비들의 노동력으로 유지되던 사회였다. 조선 최고의 학자라는 퇴계의 집안에서도 300여 명의 노비가 있었고, 수십만 평의 땅을 이들의 노동력으로 경작하면서 퇴계의 학문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영남의 이름 있는 양반가들은 보통 수십에서 수백의 노비를 두고 그들의 힘으로 먹고 살면서 성리학이라는 고담준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비해방이라니. 더군더나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다니. 이건 세계사에서도 사례를 찾기 힘든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해월도 수운의 '시천주'니 '사인여천'과 같은 추상적 담론보다도 그의 실천과 행동에서 큰 감동을 받지 않았을까?

동학은 사상과 행동이 어긋나지 않았기에 조선왕조와 양반,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모래에 물이 스며들 듯 퍼져나갔다. '사람이 바로 하늘이다(人乃天)' '하늘처럼 사람을 섬겨라(事人如天)'는 철학대로 천대받던 이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했기에 농민과 천민, 여성 등 고통받던 약자들이 몰려들었다. 동학은 전세계 어디보다도 빨리 여성운동, 어린이운동의 출발을 알렸다. 인사동 수운회관 앞의 큰 표석에 있는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라는 말이 헛된 말은 아니다.

김용휘 교수의 책은 해월의 사상과 철학을 중심으로 풀고 있다. 1장에서 해월의 우주론과 자연관부터 시작해 인간관과 윤리관, 수양론, 여성관과 생명론, 시간관과 생사관 등을 다루고 있다. 철학개념과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책은 비교적 쉽게 읽히고 해월의 철학은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영감과 울림을 준다.

해월이 말년에 보다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사상은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철학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조상이나 신에 대한 제사는 벽을 향해 있는 '향벽설위(向壁設位)'의 제사상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설날이나 추석, 부모의 기일에 차리는 제사상은 죽은 자가 편하게, 풍성하게 먹을 수 있도록 수저를 놓고 제사상을 차린다. 여성들이 명절을 고통스러워 하는 이유도 향벽설위의 제사 철학 때문이다. 향벽설위가 삶과 죽음이 분리된 이원론에 기초해 삶이 죽음을 경배하는 것이라면, 향아설위는 죽음은 현재의 삶 속에 있으니 오늘의 삶을 잘 살자는 스스로의 다짐에 가깝다. 저자는 '파천황적 전환'이라고 말한다.

동학은 향아설위의 철학에 기초했기에 귀한 음식으로 가득 차린 제사상이 아니라, 맑은 물(淸水) 한 그릇과 경건한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4대 제사, 거의 매달 제사상을 차려야 했을 조선말 여성들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소리였을 것이다. 오늘날의 대부분 종교들도 극복하지 못한 주체의 철학을 동학은 이미 150년 전에 제시하고 실천했다.

향아설위의 주체적 철학과 '부자와 빈자는 서로 도와야 한다(有無相資)'는 공동체 윤리가 자리잡으면서 동학은 거친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중속으로 스며들었다. 3대 교주 손병희가 3·1운동의 자금을 책임지며 실질적인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동학이 민중속에서 튼튼히 자리잡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독립선언서 이름을 올린 33인중 15인이 동학(천도교)계 인물이었고, 당시 동학(천도교)인구는 전체 인구의 10%가 넘었다고 한다.

국민주권시대, 해월을 새롭게 읽자

6개월의 내란사태를 겪은 끝에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다. 새로운 정부는 '국민주권정부'임을 자임하며 주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한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속설인데, 과연 이번 정부는 국민들에게 주권을 돌려줄까?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돌려받을 준비를 해야 하며, 돌려주도록 요구해야 한다. 돌려받지 않으면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행복해질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지난 12·3 이후 6개월을 반추해 보면, 세계사에서 사례를 찾기 힘든 묘한 경험들이 있었다. 계엄이 일어난 여의도에, 폭설이 내린 남태령에 주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밀물처럼 모여들었고, 함께 하지 못한 이들은 선결제로 밤새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혹시 향아설위, 유무상자의 오래된 생각들이 지금 우리에게도 핏속에서 면면히 흐르는 것은 아닐까?

만약 해월이 35년간의 도망자의 삶을 견디지 못했으면 갑오년의 동학농민항쟁도, 손병희에게 도통전수도, 기미년의 독립운동도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다. 많은 이들이 권력자들의 학대와 일제의 폭정에 분노했지만, 이를 연결해 주는 도화선이 없었다면 폭발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월을 '평민철학자'로 이름한 것은 제대로 맥을 짚었다. 그룬트비의 폴케호이스콜레(민중대학·평민대학)의 사상이 인근 스웨덴, 핀란드로 퍼져 나가 새로운 평등과 연대의 문화를 만들고, 20세기 초에 사민주의 정치와 연결되면서 북유럽이 '복지국가, 행복사회'로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해월의 철학을 새롭게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권력자가 아닌 평민의 철학의 되새기면서, 새로운 현실정치와 결합할 수 있을 때만이 헬조선에 벗어나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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