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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범죄 침묵하고 '피해자 기억' 앞세우던 독일과 일본, 그래도 독일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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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범죄 침묵하고 '피해자 기억' 앞세우던 독일과 일본, 그래도 독일은 달랐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28·끝]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56

오늘로 '전쟁범죄 이야기' 연재가 끝난다. 일본-독일의 전쟁범죄 연재를 처음엔 1년 정도로 내다보고 2023년 1월부터 매주 1회 올렸다. 독자 분들의 도움 말씀에 힘입어 쓰다 보니 2년 7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일본의 전쟁범죄>는 670쪽 두께의 책으로 나왔다(진실의 힘, 2024).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를 다룬 원고 분량도 처음 생각보다 많아졌다. 200자 원고지로 가늠하면 3500매에 이른다. 큰 틀에서 다시 고치고 가다듬어 올 연말이나 새해에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로 펴낼 참이다.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고 내일의 길잡이라 일컫는다. 전쟁범죄로 얼룩진 과거사를 함께 살펴보면서 건강한 역사 인식을 다져온 독자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6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은 수많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엔가 한 민족의 생명력이 가장 영광에 찬, 그리고 가장 용감한 증거로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맺어진 나와 병사들의 연대 안에서, 그 어느 날엔가 독일의 역사에서 그 씨앗이 싹트고 민족사회주의(나치) 운동의 빛나는 재생이 시작되어, 참다운 민족협동체가 실현될 것이다](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동서문화사, 2014, 1141-1142쪽).

위 글은 1945년 4월30일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자살하면서 남긴 유언장의 일부다. 히틀러의 시각에선 전쟁에서 지긴 했지만 '위대한 독일' 건설 꿈이 사라진 게 아니다. 유언장 어디에도 그가 벌인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하는 대목이 없다. 오히려 '나치의 부활'이란 허황된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이즈음 유럽의 신나치주의자들은 이런 히틀러 망령을 좇고 있는 모습이다.

'파괴의 난교' 군 장성과 당 간부들의 잇단 자살

몇 년 전에 독일을 여행하면서 하이델베르크 고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 부부를 만났다. 그들의 말을 옮기자면, "요즘 독일 젊은이들이 히틀러나 2인자 괴링, 그리고 친위대 사령관 힘러가 자살했다는 사실은 알아도 다른 여러 장군들이 자살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살한 이들은 연합군에 붙잡힐 경우, 특히 소련군에 붙잡히면 처형될 게 뻔하다고 여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이나 자신의 전쟁범죄에 책임을 느끼고 사죄하는 마음을 지녔을지 의심스럽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크리스천 괴셀(맨체스터대, 근대유럽사)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패배 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다시 항복할 때까지 37년 동안 독일인들의 자살 실태를 들여다봤다. 괴셀이 쓴 책(Suicide in Nazi Germany, 2009)에 따르면,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는 사회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끊었다. 1933년 히틀러 집권 뒤 이룬 경제성장과 더불어 자살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1930년대 후반 다시 늘어났다. 특히 나치의 인종차별정책으로 탄압을 받던 유대인들이 많이 자살했다. 1945년 봄 전쟁이 끝나갈 무렵 독일군 지휘관과 나치당 간부들의 자살이 늘어났다. 특히 소련군의 진격을 코앞에 둔 동부 독일과 베를린에서 자살율이 급격하게 치솟았다. 괴셀의 집계를 보자.

[독일국방군 장성들 가운데 패전 무렵 목숨을 끊은 이는 78명에 이른다. 육군 장성 554명 가운데 53명, 공군 장성 198명 가운데 14명, 해군 제독 53명 가운데 11명 등이다. '가우라이터'(Gauleiter)라고 불리던 나치당 대관구 지도자 41명 가운데 8명,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 47명 가운데 7명도 자살자 속에 이름을 올렸다](Christian Goeschel, <Suicide in Nazi Germany>,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153쪽).

괴셀은 1945년 4월과 5월 수백 명의 나치당 주요 인물들이 마치 '파괴의 난교'(orgy of destruction)을 벌이듯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한다(171쪽). 국방군의 영관급이나 위관급 장교들, 그리고 제3제국 정부와 나치당의 하급 당원들을 포함하면 자살한 숫자는 수천 명으로 크게 불어난다. 위의 독일 역사교사 말대로 이들이 죄를 뇌우쳤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죽음으로써 승자의 손에 심판 받길 거부했다는 점이다. 그들을 따라 많은 젊은이들도 자살했다. 괴셀에 따르면, 히틀러 유겐트 활동을 하면서 (히틀러나 선전장관 괴벨스만큼이나) 자신의 삶을 제3제국의 번영과 동일시해왔던 청소년들이 천년제국 건설의 꿈이 사라지는 상황에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1935년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돌격대(SA)의 거리 행진을 사열하는 히틀러 총통. 10년 뒤 패전 무렵 나치당과 독일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자살했다. ⒸCharles Russell Collection, NARA.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

1945년은 독일인들에게 이중적인 의미로 기억되고 있다. 6년에 걸친 전쟁(1939-1945)에서의 패배일뿐 아니라, 12년에 걸친 나치 히틀러 정권(1933-1945)의 몰락이다. 이는 독일민족의 패배이자 다른 하나는 새로운 민주국가로의 출발이다. 국외적으론 항복이었지만, 국내적으로는 나치 파시즘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독일인들은 1945년 5월8일을 0시(Stunde null), 1945년을 0년(Jahr Null)라 불렀다. 0년은 어두운 과거와의 단절과 함께 새 출발의 뜻도 담겼다(네덜란드 작가 이안 부루마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림으로써 현대세계가 시작됐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책 이름을 <0년>이라 붙였다).

0년을 맞은 패전국 독일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식량 문제에 주거 문제, 밀려드는 난민 문제 등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식량을 비롯한 주요 물자는 배급제 아래 얻을 수 있었지만 턱없이 부족했고, 암시장이 판을 쳤다. 게다가 그 무렵 독일 사회는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나치 정권의 전쟁범죄가 남긴 상처로 몸살을 앓았다. 철학자 칸트와 음악가 베토벤을 낳은 문명민족이란 자부심을 흠집 내는 주홍글씨였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말은 그 시대의 아픔을 상징한다. 문제의 구절은 나치의 억압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쳤던 유대인 출신의 독일 사회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1903-1969)가 1949년에 썼고 1951년 다른 사회학자의 기념 출판물로 나온 <문화비평과 사회>(Kulturkritik und Gesellschaft)에 실렸다. 이는 큰 논란을 불렀다. 특히 시인들은 "그럼 앞으로 우린 시를 쓰지 말라는 거냐"고 직설적 반응을 보였다.

아도르노는 자신의 발언이 나치의 야만을 겪은 독일의 문화계 전반을 겨냥한 것이라면서 "(히틀러 정권의) 이처럼 극악한 야만이 실제로 벌어진 세계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름다움과 정서를 노래하는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야만의 연장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아도르노가 내건 문제 제기의 요점은 홀로코스트라는 엄청난 참극을 겪은 마당에 패전 뒤 독일 지식인의 임무는 무엇보다 왜 그런 야만이 일어나게 됐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같은 맥락에서 아도르노는 동료 사회학자인 막스 호르크하이머(1895-1973와 함께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ärung, 1947)을 써냈다. 호르크하이머는 아도르노와 마찬가지로 나치의 유대인 억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이른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맹장이다. 한때 마르크스주의에 기울었던 이들 두 망명 지식인은 '사회주의혁명'을 내다본 마르크스의 분석과는 달리, 독일을 포함한 유럽에 파시즘과 전체주의가 생겨나 전쟁의 참화 속에 빠져든 이유를 따져봤다. 이들은 묻는다.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야만에 빠져들게 됐는가?" 두 사람은 계몽과 신화, 그리고 이성에 대해 말하면서, 계몽의 시대에 우리 인간은 이성을 신뢰함으로써 낙관적 미래를 기대했지만, 이성이 비판 기능을 잃고 '폭력과 학살의 도구'로 전락하는 '야만의 시대'를 겪게 됐다고 풀이했다.

처벌을 비껴 간 나치 전범자들

[독일인 중에도 아우슈비츠를 기억하기 앞서, 연합국의 융단폭격을 받아 폐허가 된 함부르크와 드레스덴을 잊어선 안 된다고 역설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에게는 공습으로 파괴되어 수십 년 동안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던 성모교회(Frauenkirche)가 독일인을 전쟁 희생자로 각인하는 상징이다](비교역사문화연구소, <기억과 전쟁: 미화와 추모 사이>, 휴머니스트, 2009, 191쪽).

위의 글은 최호근(고려대, 서양현대사)이 독일의 기억문화에 대해 쓴 글이다. 함부르크와 드레스덴 대공습은 그야말로 엄청난 피해와 더불어 충격과 공포를 남겼다. 독일인들이 "우리도 피해자였다"는 항변을 할만 했다. 밤낮 없이 방공호로 달려가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노인들은 공습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저절로 몸을 떤다고 한다. 독일인의 '피해자 기억'의 중심은 함부르크, 드레스덴, 그리고 베를린이다(연재 47-51 참조).

이렇듯 연합국도 비무장 민간인을 무차별 살상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전범재판엔 '승자의 논리'가 작동한다는 말들을 한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대화편에도 "(싸우는 양쪽 다 정의롭다고 주장하지만) 정의는 승자에게 더 이롭다"고 했다. 아무리 심각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어도 승자는 피고석과 거리가 멀다. 함부르크와 드레스덴 대공습, 도쿄 대공습,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등으로 숱한 비무장 민간인들이 희생됐지만, 미국의 전쟁지도부는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나치의 극악한 전쟁범죄로 말미암아 패전국 독일이 전쟁 책임을 비껴가긴 어려웠다. 전승국들은 특히 나치 독일의 5대 권력기관인 △히틀러 내각(Reichsregierung) △나치당 최고위원회(Vorstand) △나치 친위대(SS)와 제국보안대(SD), 돌격대(SA) △비밀경찰조직인 게슈타포(Gestapo) 등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에서 '히틀러의 도부수(刀斧手)'였던 지휘관들을 처벌하려 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1945년 11월20일-1946년 10월1일)과 이어 열린 12개의 후속재판(1946년 12월9일-1949년 4월13일)에서 전범 군인들과 관료, 기업인들, 법률가들, 의사들이 처벌을 받았다(뉘른베르크 재판은 연재 31-33, 후속재판은 99-103 참조 바람).

나치의 잔재를 걷어내는 일은 유럽의 평화를 위해서도 중요했다. '탈(脫나치'를 명분으로 나치 당원들을 공공기관에서 추방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많았다. 미군 점령지역에선 프라게보겐(Fragebogen)이란 이름의 질문서가 나돌았다. 131개 항목의 질문이 담겼다. 예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 나치에 관련된 단체에 가입했는지 등을 물었다. 대답은 성심껏 이뤄지지 않았다.

미 점령당국이 형식적인 앙케이트 설문조사로 나치 가담 정도를 가려낼 것으로 여겼다는 것은 오늘날까지 웃음거리로 남았다. 그 많은 질문지를 평가할 인력이 모자랐다. 독일어 해독 능력을 지닌 미국인들은 아주 소수였다. 나치 가담을 추궁 받은 '작은 나치'가 곤경에서 벗어나는 방식도 문제였다. 자신이 나치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누군가의 증언을 받아 내밀면 됐다. 나치 수용소에서 고생하다 풀려난 사람의 증언이면 더 좋았다.

[제3제국(나치 독일) 시기에 부를 축적한 지역 유지들은 종종 나치 박해에서 살아남은 일부 생존자(이른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목격자로 매수하는 방법으로 곤경에서 빠져나왔다](이안 부르마, <0년>, 글항아리, 2016, 242쪽).

나치의 만행에 침묵했던 독일 교회도 '나치'로 출두 통고를 받은 자들에게 신원보증서를 써주었다. 성직자들은 특정 개인이 나치당원이나 친위대원이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선행과 착한 성품을 보증해주는 데 앞장섰다. "아무개 가족과 함께 식사 기도를 올리곤 했다"는 따위의 상투적 문구들이 쓰였다. 이런 신원보증서는 나치들을 전범 목록에서 빼주었다. 비판자들은 '성직자들의 신원보증은 탈나치화를 가로막는 태업행위'라 지적했다(로버트 에릭슨, <홀로코스트의 공모: 나치 독일의 교회들과 대학들>, 한국기독교연구소, 2024, 263쪽).

▲ 나치 전범들이 암시장에서 구입해 신분 세탁에 악용하기도 했던 페르질 증명서. ‘귀하는 1946년 3월5일 민족사회주의 및 군국주의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Stadt Burgkunstadt

전범들이 사들인 '페르질 증명서'

심지어 신분을 세탁하는 증명서를 암시장에서 사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 증명서는 그 무렵 독일에서 많이 팔리던 세제(洗劑)였던 '페르질'(Persil)의 이름을 따 '페르질 증명서'라 일컬어졌다. 네덜란드 작가 이안 부루마의 글을 더 보자.

[1946년부터 시작된, 그 시대상을 말해주는 핵심 용어는 페르질샤인(Persilschein)이었는데, 여기서 페르질은 '세탁' 세재를 말한다. 셀 수도 없는 나치 출신들이 과거의 갈색 얼룩(나치 돌격대의 제복 색깔)을 씻어낼 수 있는 페르질 서류를 샀다. 나치 수용소에서 감금됐던 죄수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명서를 암시장에서 살 수도 있었다. 2만5000마르크 이상이었지만 그 정도면 많은 전직 나치 친위대 장교가 충분히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이안 부르마, 242쪽).

이런 방식으로 나치 지역당 간부들, 민간인 학살부대를 지휘했던 친위대 장교들, 강제수용소 안팎에 공장을 세워놓고 수감자들의 노예노동을 부렸던 전범기업 임원들은 처벌을 피해갔다. 패전 뒤 독일 사회의 분위기도 전범 처벌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쪽이었다. 동서냉전 구도 아래서 서독을 재무장시키려는 미국의 대외정책도 한몫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교수형을 용케 피한 전범들 대부분은 1950년대 중반 무렵 감형과 사면으로 풀려났다.

10년 넘게 서독 총리(1949-1963)를 지낸 콘라드 아데나워는 "죄(Schuld)가 없는 일반 당원들은 다시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포용정책을 폈다. 1951년 9월 헌법 131조에다 특별조항을 넣었고, 그에 따라 나치 전력으로 쫓겨났던 교사, 경찰, 판․검사, 군인 합쳐 80만 명이 복직 또는 연금을 받게 됐다(민간인 48만, 군인 32만 명). 1935년 악명 높은 인종차별법안인 '뉘른베르크법'(1935)의 초안을 만든 한스 글롭케를 '단순 가담자'(Mitläufer)라면서 측근으로 둔 것은 그의 포용적 인사정책의 한 극단적인 보기다(연재 119 참조).

나치 과거사 성찰이 없는 철학자들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전쟁범죄를 독일 지식인들은 어떤 눈길로 바라봤을까. 실존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카를 야스퍼스(1883-1969)는 유대계 아내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기에 이 문제를 놓고 그야말로 '실존적으로 치열하게' 고민했던 지식인이다. 그는 패전 다음해에 낸 <죄의 문제>(Die Schuldfrage, 초판 1946, 개정판 1965)에서 4가지 죄(법적인 죄, 정치적 죄, 도덕적 죄, 형이상학적 죄)를 꼽았다. 독일 보통사람들은 나치 전쟁범죄에 대해 법적 책임은 없다 하더라도 정치적 책임을 비롯한 '집단적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히틀러를 지지했던 독일인들이 나치 범죄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이 독일 국민들에게 '집단적 죄'를 묻지 않는 점을 다행으로 여겼다(연재 33 참조).

여기서 한 가지 물음. 그 무렵의 독일 지식인들이 야스퍼스처럼 집단적 책임에 대해 성찰을 하면서, 히틀러를 지지했던 잘못을 인정했을까. 사정을 알고 보면 딱히 그렇지 않다. 1950년 독일 브레멘에서 제1회 전독일 철학자회의가 열렸다. 그에 앞서 지역별로 철학자회의가 열렸다. 놀라운 사실은 지역별 회의나 전독일 회의에서 지난 히틀러 정권의 악행에 대해선 어떤 논의도 없었다.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인권문제에 철학자들이 어떤 해석을 내릴 것인가에 관심을 쏟았던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철학자회의를 이끌었던 학자 가운데 하나가 위르겐 하버마스(1929-)의 한때 스승이었던 에리히 로타커(1888-1965)다. 그는 인간 본성과 문화, 역사의 관계를 다룬 철학적 인류학의 선구적 연구자로 꼽히곤 한다. 나치 당원이었고 한때는 히틀러 내각에서 문교부장관 물망에도 올랐던 그에게 나치 과거사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그는 철학이란 그리스에서 시작돼 중세를 거치며 풍부해진 서구의 영원의 문제라면서, "(나치 시절을 포함한) 이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은 중요하지 않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독일 철학계의 주류가 나치 독일의 과거사에 입을 닫은 것은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와 관련이 없지 않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하이데거는 히틀러 집권 해인 1933년 프라이부르크대 학장에 올랐고, 나치당원이 된 전형적인 관변학자다. 그해 11월 총선에서 교수단 대표로 나서서 "히틀러를 지지하라"고 목청을 높이면서 나치즘이 '운동의 내적 진리를 지닌 위대한 이념'이라 치켜세웠다. 하지만 패전 뒤 하이데거는 자신의 나치 시절 행적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았다. 독일 철학계도 하이데거의 부역 사실을 입에 담는 것을 피했다. 이와 관련, 미시마 겐이치(오사카대 명예교수, 독일철학)의 글을 보자.

[이것(하이데거의 히틀러 지지 행각)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거니와, 그런 사실을 입에 담는 것조차 (독일)철학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많은 이들은 고작해야, 이상 국가(철인哲人이 다스리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시라쿠사(Ciracusa)로 갔다가 실패한 플라톤처럼, 철학자란 원래 세상사에 약하다는 식의 일반론으로 그 사실을 무마시켜버릴 정도였다](타나카 히로시 외, <기억과 망각>. 삼인, 2000, 143쪽).

"본회퍼는 배신자, 반역자다"

독일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직자들도 과거사 성찰과는 거리를 두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1933년 히틀러 정권에 협력하면서 홀로코스트에 침묵했던 부끄러운 과거사를 선뜻 인정하지 않았다. 1945년 10월 독일 개신교회의 '죄책 성명서'가 나오긴 했다. 사정을 알고 보면, 마지못해 내놓은 것이었다. 로버트 에릭슨(퍼시픽 루터란대, 역사학)은 그의 책(Complicity in the Holocaust, 2012)에서 성명서(슈투트가르트 선언)의 문제점을 이렇게 꼽았다.

[1)슈투트가르트 선언은 후회와 책임의 선언으로 자발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의 압력에 따른 것이었다. 2)선언은 죄책 문제를 극히 모호하게 표현하여, 나치에 맞서 '더욱 용감하게 행동하지' 않은 것을 사과했을 뿐, 나치와의 싸움에 (고백교회를 비롯한) 일부 기독교인들이 참여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유대인들이나 기타 희생자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3)선언은 교회 전체 안에서 큰 논쟁이 되어, 그 선언에 서명한 사람들은 적의 압력에 굴복함으로써 독일을 배반한 자들로 비난 받았다](로버트 에릭슨, <홀로코스트의 공모: 나치 독일의 교회들과 대학들>, 한국기독교연구소, 2024, 260-261쪽).

에릭슨은 한 마디로, 독일 교회는 전승국들의 탈나치화 계획에 협조할 준비가 안 돼 있었다고 못 박았다. 진정성 담은 참회 성명도 없었으며, (지난주에 살펴본) 마르틴 니묄러, 디트리히 본회퍼 같은 고백교회 목사들과 유대인을 비롯한 희생자들의 고난을 인정하지도 않았다는 비판이다. 1952년 본회퍼의 지인들이 모여 그가 처형됐던 플로센부르크 수용소에다 추모 명판을 세우려 했을 때도 말들이 많았다. 명판 제막식에 초청장을 받은 한 교회 지도자는 "그는 교회의 순교자가 아니고 국가의 반역자였다"면서 손을 내저었다. 이즈음 같은 분위기라면 상상하기 어렵다. 독일교회의 태도가 전향적으로 바뀐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 독일 오르드루프 수용소를 접수한 미군이 나치에 학살당한 수감자 시신들을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보여주고 있다(1945년 4월16일).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전쟁범죄를 부인․침묵하는 '제2의 죄'

21세기의 독일은 과거사 청산에 관한 한 나름 노력했다는 말을 듣는다. 이런 평가는 과거사 반성 얘기만 나오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일본과 대조를 이룬다. 그럼에도 아데나워 시절을 돌아보면, 전범 처벌을 온전하게 마무리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 독일 저널리스트 랄프 지오르다노(1923–2014)는 <두 번째 죄>(Die zweite Schuld, 1987)라는 화제작에서 1945년 뒤 각계에 포진한 전직 나치들이 지난날 전쟁범죄 연루 사실을 감추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또는 독일인이라는 부담감'(Oder von der Last ein Deutscher zu sein)이란 부제목을 단 책에서 지오다노는 나치 시절의 첫 번째 죄책감에 대한 억압과 부정이 '두 번째 죄책감'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시칠리아계 아버지와 독일계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지오르다노는 피아노 교사였던 어머니가 유대인이었기에 온가족이 박해를 받았다. 전쟁 중 지인의 집 지하실에서 숨어 지내다 간신히 살아남았다. 2010년 11월16일 지오르다노는 유대계 독일 미디어(Jüdische Allgemeine)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독일 외무부든 법무부든 재무부든, 그들은 모두 '총통'을 섬겼다. 그러나 (패전 뒤) 특히 책상 위의 살인자들은 사실상 아무런 반박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는 자기들만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서독에 무거운 짐이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큰 범죄들이 자행된 나라에 살고 있다. 수백만 명의 희생자가 독일 전선 뒤에서 곤충처럼 살해당했다. (패전 뒤) 가해자들은 몇 안 되는 예외를 제외하고, 처벌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상처 없이 자신의 삶을 계속할 수 있었다. 나는 히틀러 치하에서 저질러진 첫 번째 죄를 거의 집단적으로 부인하는 것을 '두 번째 죄'라고 불렀다](⇒https://www.juedische-allgemeine.de/politik/zweite-schuld/)

지오르다노에 따르면, 서독 법정에서 처벌 받은 자들은 '산업화된 연쇄살인, 대량살인, 집단학살의 사슬에서 가장 낮은 고리'에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른바 '작은 나치'들이다. 하지만 '죽음의 공장에 희생자들을 공급했던 그들의 상관들'은 대부분 처벌을 피해 숨었다.지오르다노는 나치 전범들을 사면하고 처벌을 외면한 아데나워 서독 총리를 가리켜 '가해자들과의 위대한 평화'를 이룬 '두 번째 죄'의 아버지로 꼽았다. 그는 특히 나치의 사법부에서 히틀러의 뜻에 따라 사형선고를 남발했던 나치 판사들이 '상처받지 않은 나치 종족'으로 남아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나치 판사' 문제는 연재 102, 119 참조).

패전 뒤 과거사와 관련된 불편한 진실에는 눈을 감으려 했던 독일이었지만, 1950년대 말부터 숨은 전범자들을 붙잡아 처벌하기 시작했다. 울름재판(1958-1961),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재판(1963-1965)을 비롯해 크고 작은 재판들이 열렸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 정당성 논란으로 지구촌이 몸살을 앓던 1960년대 말 이른바 68혁명의 바람 속에서 서독 의회는 1969년 나치 시절의 집단학살 전쟁범죄의 공소시효를 아예 없애버렸다. 1958년 문을 연 루트비히스부르크 중앙전범수사국은 지금도 나치 전범을 추적 중이다. 21세기에 들어와 열리는 전범재판은 나이가 많은 '작은 나치' 피고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런 재판을 지켜보는 시민들에겐 살아있는 역사교육이 되기 마련이다. 이른바 '기억 문화'의 형성이다.

독일과 다른 일본의 '피해자 중심 기억'

독일과는 달리 일본에선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다. 생각이 올바른 일본 지식인들은 일본의 전후세대가 지난날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에 대해 직접적인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더라도 역사적 문맥에서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여긴다. 위에서 실존철학자 야스퍼스가 했던 말과 같은 맥락이다. 고케쓰 아쓰시(야마구치대 명예교수, 일본근현대사)도 그런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두 번째 죄'를 말하는 지오르다노에 공감을 나타내며 이렇게 썼다.

[일본과 비교해서 훨씬 더 철저히 과거의 극복에 대한 노력을 쌓아가는 독일에서조차 제2의 죄가 논의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빈약하기 그지없는 역사인식으로 인해 전쟁 책임이 애매하게 되어, 전후 책임 문제는 (미국의 공습과 원폭 투하로 비롯된) 피해를 강조하며 매몰되고 있는 느낌이다](김재명, <일본의 전쟁범죄>, 진실의 힘, 2024, 528쪽에서 재인용).

전후 독일에서는 네오 나치를 비롯해 히틀러의 전쟁범죄를 옹호하는 듯한 목소리들이 줄곧 문제가 돼왔다. 하지만 일본의 현실을 돌아보면, "난징학살이나 '위안부' 성노예는 없었다"고 우기며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극우집단의 목소리가 독일보다 훨씬 더 크다. 위의 지오르다노의 논리를 넓히자면, 일본은 '제2의 죄'(지난날 전쟁범죄의 부정, 침묵)를 넘어 '제3의 죄'(세대를 초월한 부정, 침묵, 왜곡)를 짓는 모습이다. 일본의 보수 우경화 흐름을 타고 극우 지지도가 높아지는 것도 문제다. 2025년 7월 일본의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공명 연합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한 반면에 극우정당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따지고 보면, 자민-공명도 과거사 부정에 관한 한 오십보백보 차이다).

지난 연말에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들도 눈여겨 볼만한 책이 하나 번역돼 나왔다. 여러 일본 사학자들이 고대사부터 중세사․근세사․근대현대사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주요 논점들을 정리해낸 두툼한 책(論點·日本史學, 2022)이다. 여기서 아사노 도요미(와세다대, 동아시아관계사)가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들의 화해가 어려운 까닭을 이렇게 짚었다.

[넓게 보았을 때 (동아시아) 국민 사이의 화해가 어려운 이유는 제각기 다른 국민적 기억이 냉전 체제 하에서, 예를 들면 전후 일본의 피해자 중심 기억처럼 일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더하여 정부 사이의 화해에서는 국익이나 국력을 의식해 전개되는 외교의 변수로서 타협과 같은 의미에서의 '얕은 화해'가 각종 성명에서 반복되어 왔다](이와키 다쿠지, <논점·일본사학>, 빈서재, 2024, 516-517쪽).

여기서 '일본의 피해자 중심 기억'이란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과 8월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를 가리킨다. 독일인들이 연합군의 함부르크․드레스덴 공습으로 피해자 기억을 지닌 것처럼 일본인들도 "우리도 피해자였다"고 주장할 만하다.

하지만 큰 틀에서 일본과 독일이 이웃 국가들과 약소민족․집단에게 입혔던 피해의 총량(피해 기간과 규모, 심각성)을 따진다면 달리 덧붙일 말이 없을 듯하다. 그런 전쟁의 대참화를 누가 처음 일으켰느냐고 따져 묻는다면, 더더욱 '피해자 기억'을 앞세울 수 없는 노릇이다.

▲ 수감자의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던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베를린 북쪽 90km)에서 희생자들을 기리는 젊은이들. Ⓒ김재명

일본은 독일로부터 배워야

위의 지오르다노를 비롯해 독일의 반성적 지식인들은 많은 나치 전범자들이 처벌을 비껴갔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하지만 일본에 견주어 독일은 상대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을 만하다. 독일이 꾸준히 '작은 나치'들이라도 찾아 법정에 세워왔고, 과거사 청산과 배상에 나름의 성의를 보여 왔다("유대인들에게 너무 퍼주었다"는 소릴 들을 정도다. 연재 124 참조).

독일은 이웃 국가들과도 위 인용문처럼 '얕은 화해'로 얼버무리지 않았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것을 비롯해 이웃 나라들과 엉킨 불편한 실타래를 꾸준히 풀어왔다. 이웃국가들(프랑스, 폴란드)과 공동의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운용중이기도 하다.

그에 견주어 일본의 과거사 청산 노력은 한심스럽다는 표현 말고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일본이 강제노동이나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들 배상에 인색한 태도를 보여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전범자들도 자기들 손으론 단 한 명도 처벌하지 않았다. 패전 뒤 '도쿄 국제군사재판'에서 주요 전범자들이 처벌받은 걸로 끝이었다. 독일처럼 '작은 나치'들을 피고석에 세우는 (그래서 역사 교육의 생생한 자료로 삼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의 전범자들은 정계와 관계의 요직을 틀어쥐고 걸핏하면 망언(妄言)을 일삼아 왔다. "우린 세계 유일의 원폭 희생국"이라며 피해자 기억을 앞세우는 일본인들의 모자란 과거사 반성, "식민지 조선은 일본의 통치로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따위의 비뚤어진 역사인식은 동아시아 평화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나 성찰이 부족하다면, 언제라도 권위적인 지도자나 국가 중심의 이념에 쉽게 빠져들 수도 있다. 이른바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못하고 지난 잘못을 덮거나 왜곡하려는 국가나 사회는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나아가기 어렵다. 이즈음의 일본이 딱 그렇다. 글이 길어졌다. 과거사 청산에 관한 한, 일본은 독일에게 많이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그동안 꾸준히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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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일본의 전쟁범죄>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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