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17일, 경북 영주시의 분만취약지 지원병원에서 출산 중 산모가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사고의 발생은 보건복지부의 엉성한 혈액관리 지침과 병원의 부실한 운영이 맞물리며 일어난 구조적 인재(人災)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 “5파인트 이상 비치” 지침… 단서조항은 ‘면책구멍’
보건복지부는 지난 2014년부터 A병원을 분만취약지 지원병원으로 지정하고 매년 약 5억 원의 국고를 지원해왔다.
이에 따라 ‘분만취약지 지원사업 현지점검표’를 통해 경북도와 영주시가 함께 연 1회 운영 실태를 점검해왔다.
그러나 현지점검은 보조금 집행이나 장비·시설 기준 준수 여부에 집중돼 있었고, 실질적 의료 대응 역량에 대한 검증은 소홀했다.
특히 이번 사고의 핵심인 혈액 보유·관리 항목은 형식적으로만 점검해오면서 ‘있으나 마나한 규정’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침에는 “혈액형별 적혈구 5파인트 이상 유지(단, 분만기관 상황 및 혈액관리본부의 수급 사정에 따라 탄력적 운영 가능)”라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탄력적 운영'이라는 단서조항 문구로 인해 병원 측이 자의적으로 기준을 낮출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침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 “탄력적 운영” 문구 하나가 생사를 갈랐다

A병원 측은 “과거에는 대구혈액원에서 수급받았기에 5팩 이상 비치했지만, 현재는 안동혈액원에서 수송받고 있고 폐기율이 90%에 달해 매일 2팩씩만 받고 있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사고 당일 오전, 병원이 보유하고 있던 혈액 2팩은 다른 과 수술에 먼저 사용됐고, 이후 응급분만 상황이 발생했지만 수혈가능한 혈액이 모자라면서 사망사고로 이어진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결국 '응급 상황에서도 안전한 출산을 보장하겠다'는 분만취약지 지원 제도의 본래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의료계 관계자는 "'분만기관 상황에 따라 탄력적 운영 가능'이라는 단서조항이 오히려 엄정한 관리감독을 방해하는 구조적 허점이 됐다”며 “결국 그 모호한 문구 하나가 산모의 생사를 갈랐다”고 지적했다.
▲복지부 지침 허점, 병원 운영 실태와 맞물려 제도 취지 훼손
분만취약지 지정 병원은 응급출산 상황에 대비해 분만 전용 혈액을 별도로 보유하고 독립적인 수혈체계를 갖춰야 할 책임이 있는데도 A병원은 이 원칙조차 이행하지 않았고, 타과와 혈액을 공유하면서 치명적인 수혈 공백을 초래한 것이다.
이번 사고는 단순한 의료기관의 과실을 넘어, 복지부의 지침 설계와 점검 체계 전반에 구조적 결함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연 1회 실시되는 형식적인 점검만으로는 혈액 비축 실태나 응급 대응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방증이다.
프레시안은 복지부에 ▲응급상황 대비 혈액 5팩 보유 기준이 절대적인지, 상황에 따라 2팩 보유도 가능한지 ▲응급용 혈액을 타 수술에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 등 두 가지 핵심 쟁점에 대해 질의했으나, 복지부는 “제도적 결함을 보완해 재발 방지를 위한 해결책을 마련 중”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밝혔다.
경북도 건강관리국 관계자는 “지침 해석 권한은 복지부에 있으며, 경북도는 복지부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고 둘러대며 “현행 지침은 분만취약지 병원의 혈액 관리 기준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영주시 보건소 관계자도 “사업 초기에는 복지부와 국립중앙의료원이 직접 점검했지만, 이후에는 영주시 단독으로 진행했고 2023년부터 경북도와 합동 점검을 실시하고 있다”며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복지부 및 경북도와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 출산은 안동과 원주로… 제도 전면 재검토 목소리 높아져
영주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출생아 수는 330여 명이며, 이 중 분만취약지 병원인 A병원에서 출산한 경우는 39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산모들은 대부분 안동이나 원주의 대형병원으로 ‘출산 원정’을 선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역 맘카페 회원 B씨는 “이래서 어떻게 아이를 안심하고 낳을 수 있겠느냐”며 “복지부가 명확한 기준만 마련했어도 산모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분만취약지 지정제도 전반에 대한 재검토와 함께 복지부 지침의 명확화, 실효성 있는 점검체계 구축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의료계와 시민사회는 “형식적인 점검과 관행적 행정이 결국 한 생명을 지키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며 제도 전반의 개편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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