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도시, 군산에서 시작된 연대의 씨앗"
바람이 많은 도시, 군산.
서해의 염분이 묻은 바람은 옛 항구의 녹슨 크레인과 붉은 벽돌 창고를 스치고, 오래된 철길과 부두로 흘러간다.
한 세기 전, 이 바람은 호남평야의 쌀을 실어 나르던 기차 바퀴 소리와 항구를 오가던 화물선의 경적을 품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근대화를 빌미로 수탈의 구조를 설계한 곳. 그 기억은 여전히 골목과 건물,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살아 있다.
KAALA 초대 이사장인 황석영 작가는 이곳을 “과거 수탈의 흔적이자, 미래 연대의 플랫폼”이라 부른다.
그의 말처럼 군산은 단순한 항구가 아니라, 역사를 품고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문을 가진 도시다. 그리고 이제, 그 문을 열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KAALA(칼라문화재단, Korea with Asia, Africa and Latin America)’ — 과거의 기억을 예술과 연대로 변환하는 새로운 문화운동이 문을 열었다.

프례시안: KAALA 창립총회를 군산에서 연 이유가 궁금합니다.
황석영 KAALA문화재단 이사장(이하 황석영 이사장): 군산은 일본 제국주의가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설계한 식민지 근대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이런 도시는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도시들도 제국주의의 유산을 안고 있죠.
KAALA는 이 도시들의 공간적 기억을 모아 예술적 상상력으로 재해석하고, 미래로 향하는 연대의 무대로 삼고자 합니다. 군산은 그 출발에 가장 알맞은 장소입니다.
“기억을 넘어, 연대를 잇다”
프레시안: KAALA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요?
황석영 이사장: KAALA는 ‘Korea with Asia, Africa and Latin America’의 약자입니다. 여기에는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작가회의(AALA)’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죠.
AALA는 냉전 시기, 제1세계(자본주의 강대국)와 제2세계(사회주의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제3세계의 문화연대였습니다.
그 정신은 분단된 한반도의 문화·예술계에도 강한 연대감을 주었고, 제가 그 과정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KAALA는 그 끊어진 네트워크를 21세기에 맞게 다시 잇는 작업입니다.

“전 세계의 근대는 왜곡의 과정이었다”
프레시안: 세계의 근대화 과정을 ‘왜곡’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황석영 이사장: 지구상 어느 나라든 ‘근대’라는 이름으로 겪은 변화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제국주의를 경험한 나라들은 모두 왜곡된 근대화를 겪었죠.
강대국 중심의 질서 속에서 식민지 경험은 국가와 민중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한국 역시 제국주의를 한 적이 없고, 오히려 식민지배와 전쟁,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를 동시에 겪었습니다.
한 세대 만에 근대화를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를 희생시킨 면이 큽니다. 이 ‘왜곡된 근대’의 경험이야말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 우리를 잇는 공통분모입니다.
프레시안: 지금 한국 사회에 글로벌 사우스와의 연대가 왜 필요합니까?
황석영 이사장: 최근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를 보면, 우리가 글로벌 사우스와의 네트워크를 충분히 다져오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제 무대에서 표 차이가 컸던 것은, 그간 소홀했던 문화·외교적 연결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KAALA는 그 잊힌 연대를 복원하고, 외교·문화·경제를 아우르는 플랫폼이 될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KAALA의 주요 활동 계획을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신다면요?
황석영 이사장: KAALA는 문학, 예술, 다큐멘터리, 환경, 평화를 아우르는 10개의 핵심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먼저 ‘글로벌 사우스 작가 포럼’을 정례화해 각국 창작자들이 교류하는 장을 만들고, 탈식민 미학을 주제로 한 국제 전시와 도시 공간을 활용한 미술 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입니다.
또 제3세계 현실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상영과 비평 세션, 청년·이주민과의 공동 다큐 제작 프로그램도 마련합니다.
여기에 분쟁 지역 평화운동가와 기후위기 대응 예술가를 시상하는 사업을 신설하고, 국제 문학상 ‘가디언 트리 프라이즈’를 제정해 제3세계 문학의 지형을 재조명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번역 및 공동 창작 레지던시, 워크숍 운영을 통해 문화 간 협업을 본격화하려 합니다.
이를 통해 서로의 경험과 상처를 공유하고, 예술적 상상력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국의 폐허 위에 연대의 숲을”
프레시안: KAALA가 군산과 한국 사회에 남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황석영 이사장: 저는 KAALA를 ‘제국의 폐허 위에 심는 연대의 숲’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군산에서 시작된 이 작은 씨앗이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를 잇는 굵은 뿌리가 되고, 그 위에 서로의 이야기와 예술이 자라는 숲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숲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면서도, 미래를 향한 새로운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황석영 이사장의 목소리에는 군산이라는 도시가 품은 역사적 무게와, 이를 세계와 연결하려는 문학인의 집념이 배어 있었다. KAALA가 만들어갈 ‘기억을 넘어 연대로’의 여정이, 제국의 폐허 위에 평화와 예술의 숲을 심는 첫 걸음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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