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박스쿨". 그 이름을 듣고 이명박을 떠올리면 떠올렸지 실제 의미인 이승만과 박정희를 떠올리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이름을 딴 '리박'이라는 걸 듣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웃었다는 것은 그래도 이승만과 박정희의 이름이 웃을 수 있을 정도로 '후져졌다'는 의미고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다. 후지고 웃기지만 매우 심각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걸 우리가 뒤늦게야 알았기 때문이다.
리박스쿨은 지난 5월 <뉴스타파>의 심층 보도로 알려졌다. 이 단체는 '댓글로 나라를 구하는 자유손가락 군대'(자손군)라는 '댓글부대'를 운영하며 여론조작을 벌이는 한편,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늘봄학교의 강사로 적극 나서 극우 역사관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주입하려 시도했다. 집회에 나오거나 댓글 조작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늘봄학교 강사로 취업시켜 수입을 보장하겠다고 강사 양성과정도 운영했다. 즉 여론조작 조직과 교육 조직이 동일한 인물들에 의해 운영된, 조직적인 이데올로기 전파 시도였다.
반민주적인 교육 방식의 문제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 이토록 노골적인 시도는 보기 드무니 당연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리박스쿨을 앞다투어 비난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비판 근거가 '교육의 중립성 위반'이다. 학교 교육은 중립적이어야 하는데 특정 편향을 담아 교육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자, 그럼 생각해 보자. 환경보호교육은 중립적인 교육인가?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은 중립적인 교육인가? 요즘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재창조돼 전 세계적으로 유행인 민화 속 호랑이를 조선 후기 백성들의 문화라고 설명하는 것은 중립적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애시당초 중립적인 교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육의 중립성은 허구적 개념이다. 심지어 군부 독재 세력이 헌법을 개정하면서 만들어 낸, 국민 통제를 위한 수단이었다. 어떤 교육을 '편향적'이라고 비난한다면 우리는 어떤 교육도 할 수 없다. 파울로 프레이리가 <페다고지>에서 지적했듯이, '교육의 중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기존 지배 구조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리박스쿨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하는 역사교육을 실시하면서 이를 '객관적 역사교육'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교육의 중립성 개념이 가진 허구성에 기초한 주장이다.
그렇다면 리박스쿨은 왜 문제인가?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것은 교육의 목적과 방법의 문제이다. 앞서 교육 내용이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는데, 교육 방법 측면에서도 소위 '중립적' 교육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주입식 교육은 지식과 가치관을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권위주의적 교육방식으로, 학생들을 수동적 지식 수용자로 규정한다. 반면 토론과 참여 중심의 교육은 민주적 교육 방식으로 여겨진다. 이때의 '민주적'이라는 의미는 토론과 참여 중심의 교육 방법이 교육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권력을 학습자에게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문제는 결국 누구에게 결정 권한이 있느냐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국회 청문회에서 공개된 리박스쿨의 수업 장면은 민주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역사 수업이라며 '이승만이 왜 친일 청산을 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객관식 문제로 제시하고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젋은이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정답을 제시, 반복해 읽게 한다. '아동 권리 협약' 제13조는 아동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교육은 아동이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한다. 즉 리박스쿨이 실시한 교육은 학생에게 역사를 이해하는 관점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지하거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지원하지 않고, 특정한 역사관과 정치적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복합적인 학생들의 자율적인 판단 능력을 기르는 교육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이, 이들의 교육 방법이 반민주적인 이유이다.
학습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교육이란
그래서 우리는 리박스쿨에만 반대할 수 없다. 교육에서 리박스쿨을 반대한다는 것의 의미는 학습자에게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교육, 학습자에게 자기결정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 교육, 일방향으로 지식과 가치를 전달하기만 하는 교육을 반대한다는 의미와 같다. 극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다른 것을 주입하는 것은 정당한가? 절대 그럴 리 없다. 학습자와 소통하지 않고 정해진 정답을 제시하는 형태를 교육에서 없애 나갈 때, 리박스쿨 같은 사례는 재발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볼 때, 교육의 민주화와 학습자 권리 신장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랜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교육은 체제 순응적 인간을 양성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비판적 사고력보다는 암기와 순응을 강조하는 교육이 주를 이루었다. 박정희 시대의 반공 교육, 국민윤리 교육 등은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를 억압하고 체제 순응적 인간을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 교육이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교육 현장에서는 권위주의적 문화와 획일화된 교육 방식이 남아 있으며, '진보 교육감'이 혁신교육을 기치로 등장한 것은 권위적인 교육을 벗어나 민주시민교육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열망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리박스쿨이 얼마나 문제적이고 극우세력이 얼마나 보기 흉하고 우스꽝스러운지에 관심을 두기보다, 민주적인 교육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 리박스쿨이 아동을 대한 방법 그 자체를 우리는 비판하고 없애 나가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리박스쿨은 방법만 문제이지, 내용은 문제가 아니라는 말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는 않다. 리박스쿨은 보편적 가치와 특수 이익을 혼동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다시 말해 인권, 민주주의,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특정 정파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가치는 국제인권규범과 헌법적 가치로 확립된 것으로, 특정 정치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류 역사, 한반도 역사와 함께 고찰되고 온 사회 구성원이 함께 수십, 수백, 수천 년간 구축해 온 것이다. 유엔의 인권선언들, '아동권리협약', 대한민국 헌법 등에 명시된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교육에서 강조하는 것은 '편향'이 아니라 교육의 당연한 책무이며 동시에 학습자의 권리 보장이다.
리박스쿨이 파고든 한국 사회의 취약성
또 한 가지 중요하게 짚을 부분이 있다. 리박스쿨은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 즉 온라인 공간과 아동 돌봄이라는 영역을 노렸다. 예컨대, 김건희의 목걸이가 진품인지 가품인지로 세상이 떠들썩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우리는 대응할 방안이 있다. 가품일 경우에는 상표법 위반으로, 진품인 경우에는 재산신고 누락 및 청렴비위 관련 법규로 처벌될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 정치 공간에 조직적으로 개입하고 늘봄학교에서 반민주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에 대해 우리 사회가 적용할 수 있는 제도나 법규가 존재하는가? 선거 기간에 이루어진 댓글들에는 '공직선거법' 위반이 적용 가능하겠지만 선거가 아닌 기간에도 지속적으로 운영된 댓글부대에 대해선 개별 민사소송 외에 별다른 대응 방안이 없다. 늘봄학교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계약 해지 외에는 전무하다. 계약 해지는 재발 방지 조치일 뿐, 그 전에 이루어진 활동들에 대한 조치가 되지 않고, 업체명을 바꾸어서 다른 학교에 들어가는 일 역시 막을 수 없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리박스쿨이 구성원들을 늘봄학교와 방과후학교 강사로 취업하게 한 것은 댓글 정치 선전에 대한 대가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를 돌보는 노동이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다. 거칠게 말해 지금의 어린이 돌봄은 정해진 시간 동안 누구든 아동을 데리고 있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지향이다. 더욱이 늘봄학교를 전국, 모든 학교에 일시에 확대하겠다고 밀어부친 윤석열 정부의 정책은 전국의 초등학교에 늘봄 강사 인력난을 만들어 냈다. 20년 가까이 제도로 다듬어져 온 방과후학교를 무너뜨리고 늘봄학교로 전환시켰다. 많은 방과후 강사들이 급속히 변화하는 근무 여건 속에서 학교를 빠져나갔다. 공백이 커진 가운데 누구든 하겠다고 손만 들면 늘봄 강사로 취업할 수 있는 학교들이 생겨났고, 그렇게 들어온 이들은 시간당 급여를 받고 초등학교에 와서 어린이들을 데리고 있어 주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리박스쿨 사태를 해결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돌봄을 사회화하고 돌봄의 공공성을 강화하겠다는 정책이 필요하다.
온라인 댓글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서 온라인 댓글 공간이 문제가 된 건 하루이틀이 아니다. 1992년에 이미 여중생이 PC통신에서 성적인 폭언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온라인에서 혐오나 차별적 발언에 대한 전 사회적 대응은 공익 광고와 '선플 달기' 운동 정도다. 차별금지법조차 제정되지 않고 있다. 2024년 불법 합성 성착취물(딥페이크) 사태가 역사상 유례 없는 대규모로 터졌는데도 여전히 온라인 공간에 대한 대책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인터넷을 빠르게, 많이 사용하는 국가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없는 광활한 온라인 공간을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가에 대한 전격적 고민이 필요하다.
허구적인 교육의 중립성 개념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교육에서의 민주주의, 돌봄의 공공성, 온라인에 대한 민주적 개입. 리박스쿨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다. 여기에 주목하자.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