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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최종 설계자' 이용일, '역전의 명수'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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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최종 설계자' 이용일, '역전의 명수'를 추모하며

[이종성의 스포츠 읽기] 군산에서 일군 야구 전국화…한국 야구 개척한 거목의 일생

올 시즌 프로야구 관중은 1100만 명을 훌쩍 넘었다. 이 추세라면 시즌 종료 시점에는 1300만 관중 동원이 가능해 보인다. 이 수치는 프로야구 역대 최다 관중 동원 기록이다.

1000만 관중 시대를 연 지난 해부터 계속되고 있는 프로야구의 인기 상승 요인은 여러 측면에서 분석이 가능하다.

적지 않은 야구 전문가들은 최근 프로야구 흥행의 핵심 요인은 야구만 보는 경기장이 아니라 야구도 볼 수 있는 경기장이 많아졌다는 점을 꼽고 있다. 응원가를 부르고 치맥을 즐기며 스케치북 응원을 하는 팬들의 모습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프로야구가 '국민 스포츠'가 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동력은 야구가 몇몇 지역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관심이 높은 종목으로 자리잡은 데에서 찾아야 한다.

지난 7일 노환으로 별세한 이용일(향년 94세)의 삶을 되돌아 보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중요하다. '야구 전국화'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자 프로야구 창설의 최종 설계자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쇠락한 항구도시 군산에서 야구를 육성한 이용일

이용일은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났다. 만월표 고무신으로 유명했던 경성고무 창업주의 아들이었던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매부인 야구 국가대표 선수 출신 유복룡의 영향을 받아 그는 서울 경동중학교 시절 야구선수가 됐다.

서울 상대와 육군 야구부에서 활약하다 1956년 소령으로 예편한 이용일은 고향 군산으로 내려와 경성고무 상무로 취임했다. 그는 체중관리를 위해 다시 야구를 시작했다. 연습 장소는 군산중학교 운동장이었다.

하지만 <군산 야구 100년사>에 따르면 당시 군산은 방과 후만 되면 운동장에 파리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학교 운동부가 없어서인지 교내에 활력도 없었고 시내에는 불량배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이는 이용일이 군산에서 야구 육성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군산은 쇠락한 항구도시의 전형이었다. 일제시기 군산은 조선의 대표적 미곡 수탈항(港)이었지만 1960년대 정부의 공업 개발 후보지에서 제외되면서 경제적으로 소외된 도시로 전락했다. 군산에는 합판 제조업이나 양조업을 하는 작은 규모의 기업들이 도시 경제를 이끌고 있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군산의 유지인 경성고무의 상무 이용일은 쇠락한 도시를 야구로 바꿔보자는 꿈을 키웠다. 그는 사재를 털어 군산 4개 초등학교에 야구부를 창설했다. 이후에는 군산남중과 훗날 한국 고교야구의 판도를 바꾸게 되는 군산상고에도 야구부를 만들었다.

경성고무 공장의 화재 사건과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신화

군산상고에 야구부를 육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용일은 가난한 군산상고 선수들을 위해 경성고무 직영 정미소를 통해 쌀을 제공했다.

그는 야구를 할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기 위해 군산상고 동문들의 기부도 이끌어 냈다. 주산부로 유명했던 군산상고를 졸업한 인재들은 당시 한 해에 100명가량 금융기관에 취업했다. 화이트 칼라의 상징이었던 은행에 취업한 군산상고 동문들은 이용일이 주도한 학교 야구 연습장 조성에 큰 기여를 했다.

야구부 합숙소에 매점과 식당도 만들어 여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선수들의 부식비를 마련했다. 선수들의 동기 부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 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던 재일교포 스타 장훈도 군산으로 초청했다. 그는 군산상고 야구부의 발전을 위해 1968년부터 1972년까지 30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내놓기도 했다.

군산상고 야구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1970년 이용일이 경영하던 경성고무 공장에는 큰 화재가 났다. 군산시민들은 지역의 대표 기업인 경성고무를 위해 화재 의연금을 냈고 군산상고 야구부 선수들은 물동이를 들고 화재 진압에 참여하기도 했다.

공장 화재로 인한 큰 위기를 넘긴 이용일은 1972년 한국 야구 최대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군산상고는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대회에서 9회 짜릿한 역전극을 펼치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 경기 이후 군산상고에 '역전의 명수'라는 별칭이 붙게 됐다.

군산상고가 우승하자 대회가 열린 서울 동대문운동장 안팎에서 군산시민들의 '축제'가 펼쳐졌다. 군산상고의 원정 팬들은 우승이 확정되자 그라운드로 뛰어 들어와 선수들을 등에 업고 기뻐했다. 새벽에 원정 응원단과 선수들이 군산에 도착하자 1000여 명의 시민들은 술집에서 '야구 찬가'를 불렀다.

▲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승리한 군산상고 ⓒ군산야구 100년사

그 때까지 전국고교야구 대회 우승은 서울, 인천과 경상도의 두 도시(대구, 부산)학교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군산상고가 야구 불모지 호남 지역 최초의 고교야구 우승 팀이 되면서 고교야구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군산상고의 우승에 자극 받은 전라남도와 충청도에서도 야구 붐이 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광주일고(1975년)와 공주고(1977년)의 전국 제패가 그 달콤한 열매였다.

오랫동안 야구 휴화산이었던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야구에 대한 관심이 살아난 건 이처럼 개척자 역할을 했던 군산상고의 역할이 컸다.

군산상고의 화려한 등장 이후 정치적인 이유로 첨예하게 대립했던 영호남이 고교야구 무대에서 격돌하자 고교야구 팬들은 급증했고 이는 1982년 창설된 프로야구의 흥행의 중요한 기반이 됐다.

고교야구 대제전과 프로야구 출범

이용일은 군산상고를 자타가 공인하는 야구 명문교로 키웠지만 정작 그의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1974년에 군산 공장에 다시 화재가 발생하면서 경성고무는 어려움을 겪었다. 더욱이 경성고무의 고무신 사업이 사양길로 접어 들면서 1978년에는 회사를 선경(현 SK)에 넘겨야 했다.

그는 이후 기업 경영인이 아닌 야구 행정가로 변신했다. 그는 실업연맹, 대학연맹, 고교연맹으로 나뉘어 있던 한국 야구계를 통합해 새로운 기구인 대한야구협회를 출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대한야구협회의 전무로 재직하던 1979년 제1회 야구대제전을 기획했다. 야구대제전은 실업야구에서 활약하는 스타 선수들이 각각 출신 고등학교 소속으로 나서는 대회였다.

당대 최고의 국내 스포츠 이벤트였던 고교야구의 인기를 활용한 이 대회에는 구름 관중이 몰렸다. 최동원과 김용희가 크게 활약한 경남고의 우승으로 끝난 이 대회에는 '그라운드의 고교 동창회'라는 별칭이 붙었다. 참가 고등학교의 OB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재경 동창회가 경기장 스탠드를 빼곡히 메웠기 때문이었다.

이 대회는 1982년 출범하게 될 프로야구가 초기에 각 팀 연고지의 고등학교 출신 선수들을 영입하는 방식으로 팬덤을 키우는, 하나의 모범 답안을 제시해 줬다. 프로야구팀이 지역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 고교 야구와의 연계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이 대회를 통해 분명해 졌다.

이용일은 1981년 전두환 정권이 집권한 뒤 프로야구를 창설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야구 명문고 출신이거나 미국 유학 시절 야구에 매료됐던 청와대 고위 인사들과의 긴밀한 접촉을 통해 프로야구 창립계획서를 작성해 제출했고 정권이 이를 받아들여 이듬해 프로야구가 시작됐다.

비록 현실화되지는 못했지만 사실 프로야구 창립 계획은 1976년 재미교포 사업가 홍윤희에 의해 처음으로 공론화 됐다. 1977년 서울, 대전, 인천, 대구, 부산, 광주에 프로야구 팀을 만들고 야간 경기를 위한 시설을 갖춘 다는 게 홍윤희가 만든 프로야구 창립계획안의 골자였다.

실제로 이용일이 1981년 정권 수뇌부에게 전달했던 계획서는 5년 전 만들어졌던 홍윤희의 계획안을 기반으로 작성됐다. 한 달 만에 이용일이 계획서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도 홍윤희 계획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프로야구의 1차 설계자는 홍윤희이고 이용일은 프로야구의 최종 설계자라는 얘기가 나왔다.

군산상고 신화 창조로 프로야구 팬덤의 기초가 됐던 야구의 전국적 유행을 이끌었으며 스스로 프로야구의 최종 설계까지 담당했던 이용일 전 KBO 사무총장. 그가 하늘나라에서 한 시즌 1300만 관중 기록을 향해가는 올 시즌 프로야구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듣고 싶다.

▲프로야구 출범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용일 전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직무 대행이 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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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프레시안> 스포츠 전문기자 시절, 스포츠와 사회·문화·역사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구조에 주목했던 언론인 출신 학자다. 이후 축구의 본고장 영국으로 건너가 드몽포트대학교에서 '남북한 축구사'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야구의 나라>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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