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칼럼에서 넷플릭스 시리즈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를 통해 국악이 한국적 소재 콘텐츠에서 '음향 효과' 수준에 머물렀던 아쉬움을 이야기한 바 있다.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정작 우리의 소리가 배제된 이 사례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가장 한국적인 것을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은 놀랍게도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한 공공기관의 홍보 기획이었다.
바로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Imagine Your Korea’의 ‘Feel the Rhythm of Korea’ 시리즈이다.
딱딱하고 상투적인 기존 홍보 영상의 틀을 완전히 깨고 조선팝(Chosun Pop)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전세계에 한국의 역동적인 매력을 각인시킨 이 기획은 가장 한국적인 콘텐츠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전통과 혁신, 그 경계에서 길을 찾다
이 기획의 성공은 단순히 재미있는 광고를 넘어 전통 예술과 한국만의 특성이 가진 잠재력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발현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한국관광공사는 코로나19로 해외 관광객 유치가 어려워진 상황을 ‘어떻게 하면 다음 여행지로 한국을 떠올리게 할 것인가?’라는 장기적인 기회로 전환했다.
이 전략의 핵심은 ‘문화 가치의 정립’이다. ”방문하세요“라는 직접적인 메시지 대신 한국의 ‘흥’과 ‘정서’라는 무형의 가치를 시각적, 청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
‘범 내려온다’로 유명한 밴드 이날치의 판소리 현대화와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의 독특한 춤사위는 낯선 풍경을 배경으로 압도적인 시너지를 냈다.
딱딱한 관광지 소개 대신 지역의 정서와 흥을 그 자체로 리듬과 퍼포먼스로 풀어내니 부산의 활기, 전주의 고즈넉함, 안동의 신비로움이 마치 한 편의 세련된 뮤직비디오처럼 다가왔다.
이는 단순히 여행지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 한국 문화 그 자체를 매력적인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Feel the Rhythm of Korea 시즌2를 선보였다. ‘조선 힙합’이라는 네티즌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한국 유명 힙합 레이블인 하이어뮤직과 AOMG가 참여한 음원과 영상을 제작했다.
대구의 골목, 순천의 전통적 삶, 서해안 갯벌 주민들의 생활 모습 등 각 지역의 문화와 K-힙합을 결합한 총 8개의 영상은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통해 지역의 ‘로컬 브랜딩(Local Branding)’을 강화하려는 새로운 시도였다.
이러한 성공을 발판 삼아 ‘Feel the [ ] of Korea’ 시리즈는 ‘길’, ‘밤’, ‘모험’, ‘쉼’ 등 다양한 테마를 전면에 내세우며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지역의 숨겨진 명소를 배경으로 각 테마에 맞는 전통 예술 요소를 결합한 이 시도는 하나의 성공 공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 지속 가능한 콘텐츠 확장 전략을 보여주었다.
서산의 바지락 갯벌을 배경으로 한 ‘머드맥스’ 콘셉트처럼 전통적인 공간에 현대적인 위트를 더하는 발상은 보는 이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로써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며 한국 문화가 지닌 다채로운 면모를 꾸준히 선보일 수 있었다.
성공의 이면에 숨겨진 예술경영의 원칙
이러한 성공의 배경에는 문화예술경영의 핵심 원칙들이 녹아 있다.
첫째, 철저한 ‘수요자 중심의 사고’가 자리한다. 전통 예술을 접하기 어려워하는 젊은 세대를 위해 억지스러운 퓨전이 아닌 팝과 대중음악에 익숙한 세대의 귀에도 자연스럽게 들리는 새롭고 감각적인 국악을 전면에 내세웠다. “어, 이게 국악이라고?”라는 물음표를 던진 뒤, “엄마, 나 국악 좋아하나봐!”라는 긍정적인 느낌표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어떻게 하면 관객을 개발할 것인가’에 대한 전통적인 질문에 새로운 방안을 제시한다.
둘째, 전통을 '보존'이 아닌 '활용'의 대상으로 본 통찰이다. 'Feel the Rhythm of Korea'는 전통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가장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했다.
한복 정장을 입은 댄서들의 움직임은 전통 무용의 춤사위와 서양의 스트릿 댄스가 어우러진 결과물이며 영상에 사용된 음악 또한 판소리 춘향가 '사랑가'의 한 부분을 힙합 사운드와 결합한 것이다. 이는 전통을 박물관에 가둬 두는 대신 '창작과 융합의 원천'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한다.
셋째, 이야기(서사)의 재해석과 활용이다. 캠페인은 단순히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담긴 깊은 서사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시켰다.
'범 내려온다'는 판소리 수궁가의 일부이지만 시각적 퍼포먼스와 결합해 '한국의 역동적인 리듬'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서사 재해석은 서울 편 외 다른 도시 영상들에서도 빛을 발했다. 대구 편은 '골목이 키운 도시'라는 콘셉트 아래 복잡한 골목길을 한 도시의 서사로 풀어냈고 순천 편은 전통적 삶의 풍경을 경주 편은 천년의 역사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며 각 지역의 고유한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담아냈다.
이처럼 전통 속에 담긴 철학과 정서를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해 다시 풀어내는 과정은 한국의 이미지를 더욱 풍부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이를 통해 외국인들은 한국의 힙한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깊은 흥과 한의 정서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K-콘텐츠의 ‘히든카드’를 찾아
‘Feel the Rhythm of Korea’ 기획은 전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흥’을 전달하며 8억 회가 넘는 누적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는 단순히 좋아요나 댓글을 넘어 문화 콘텐츠를 통해 국가 이미지의 가치를 높이는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오래된 명제는 더 이상 막연한 주장이 아니다. 이는 국악을 넘어 한옥, 한글, 전통 공예 등 우리가 가진 모든 문화유산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콘텐츠를 창조하는 일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
한국의 전통과 예술이 가진 힘은 고정된 형태에 갇혀 있지 않다. 시대의 리듬을 타고 변화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K-콘텐츠의 다음 무기이자 우리가 개척해야 할 ‘블루오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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