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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보도] 하루 종일 일해도 8천 원…‘도급’ 뒤에 가려진 노인노동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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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보도] 하루 종일 일해도 8천 원…‘도급’ 뒤에 가려진 노인노동의 현실

한국 밥상의 매운맛, 노인의 땀방울로 완성되다

“하루 종일 고추 꼭지를 따고도 손에 쥐어진 건 ‘8천 원’. 그래도 ‘집에서 놀면 뭐하나, 손주들 용돈이라도 벌어야지"라고 말한다.

경북 영주시의 한 고추 가공 작업장에서 만난 할머니는 쓴 웃음을 지었다. 하루 종일 고춧가루 냄새 속에 앉아 고추 꼭지를 따도, 손에 쥐는 돈은 1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

▲ 산더미처럼 쌓인 말린 붉은 고추. 하루 종일 손질해도 다 채우기 힘든 노동의 결과물이지만, 어르신들이 받는 품값은 한 푸대 1만5천 원 남짓에 불과하다.ⓒ프레시안(최홍식)

임금 체계는 단순하다. 큰 마대(한 포대)를 채워야 1만5천 원. 하지만 고추를 채우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손을 놀려도 한 포대 채우기는 버겁다.

한 어르신은 “고추밭에 가면 일당 13만 원에 점심까지 주는데, 여기서는 물 한잔 없이 하루 종일 해도 8천 원”이라고 하소연했다.

결국 시간당 1천 원 꼴. 올해(2025년) 최저임금인 1만430원의 10분의 1 수준이다.

‘도급’이라는 법적 장막 뒤에 자행되는 불합리한 노동

노동부는 이를 ‘도급계약’으로 규정한다. 건별 단가 지급이기 때문에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사업주가 임금을 직접 지급하는 근로계약이 아니므로 노동법적 차원의 해결은 어렵고, 민법상 불공정한 계약으로 법원에 소송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용계약서조차 본 적이 없는 어르신들에게 법정 소송은 먼 나라 이야기다.

정작 어르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저임금이나 열악한 환경이 아니다. 이런 일자리마저 없어질까 하는 조바심이다.

OECD 최고 수준인 한국의 노인빈곤율(36.6%)이 이 불안을 떠받치고 있다. 생계를 위해 선택한 노동은 저임금·고위험 구조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고, “집에 있는 것보단 낫다”는 자기합리화로 이어진다.

매운 냄새에 하루 종일 노출되는 어르신들

현장에는 임금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추를 다루는 과정에서 퍼져나오는 매운 냄새는 노인들의 눈과 호흡기를 직접 자극한다.

▲주름진 손으로 고추 꼭지를 하나하나 잘라내는 노인의 손길. 바닥에 흩어진 꼭지 더미는 값싼 품삯 뒤에 가려진 고단한 노인 노동의 현실을 보여준다. 턱없이 낮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자녀와 손주들에게 작은 용돈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이 이들의 노동을 이어가게 한다. ⓒ프레시안(최홍식)

전문가들은 고춧가루의 매운 캡사이신 냄새에 장기간 노출될 경우 만성 기침, 기관지염, 천식 유사 증상, 시력 저하, 피부염, 두통과 불면 등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면역력이 약한 노인들에게는 만성 폐질환이나 심혈관계 질환 악화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현장에는 환기시설도, 보호 장비도 없고 콘크리트 바닥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고추더미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매일 ‘숨 가쁜 노동’을 이어간다.

외국의 아동노동에는 분노하면서, 우리 노인의 값싼 노동에는 침묵한다”

국제사회는 커피농장에서 학대당하는 아동들의 노동에 분노한다. 아이들이 농약과 무거운 자루에 시달리는 장면은 세계적 공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정작 우리 곁에서 매운 냄새에 눈물 흘리며 고추 꼭지를 따는 어르신들의 노동에는 침묵한다. 먼 나라 아동의 눈물은 사회적 분노를 일으키면서, 가까운 곳의 노인의 고통은 외면하는 이중 잣대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영주시 고용노동청 관계자는 “관내에서는 단 한 건의 신고도 접수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는 신고할 엄두조차 못 내는 현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노인들의 노동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구조적 편견을 드러낸다.

“문제를 외면하는 건 내일을 포기하는 것”

한국인의 밥상에서 빠질 수 없는 고춧가루에는 노인들의 피땀 어린 노동이 배어 있다. 그러나 그 땀방울은 단순한 생계가 아니라, 우리가 외면해온 노인들의 거친 손마디가 만들어낸 노동의 가치가 스며 있었다.

외국의 커피농장에서 학대당하는 아동들의 노동에는 분노하면서도, 정작 곁에서 매운 냄새에 눈물 흘리며 고추 꼭지를 따는 어르신들의 노동에는 침묵해온 사회. 이 불편한 모순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없어질까 두려운 일자리’가 아니라, 정당한 댓가와 건강이 보장되는 노후 노동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인의 밥상을 지켜온 고춧가루의 붉은 빛은, 사실 노인들의 손 마디에 새겨진 상처와 피땀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 진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내일을 준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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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식

대구경북취재본부 최홍식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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