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호남 첫 교회인 전주 '은송리교회'터를 둘러싼 논란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린다.
호남선교의 요람인 '전주서문교회'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가 1893년 7인의 선발대에 앞서 믿을 만한 한국 기독교인인 정해원을 보내 전주성 바깥 전주천 건너편 은송리에 초가집 한 채를 구입한 것에서 비롯된다.
132년전 호남에 뿌리를 내린 전주서문교회의 '은송리교회'터를 두고 최근 개신교계와 학계에서는 최소 3곳 이상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의 동완산동 행운슈퍼 옆 공터(동완산동 307번지)는 그동안 서문교회가 '호남선교의 요람'으로 꾸준히 기려온 장소다.
그러나 뚜렷한 표식이 세워지거나 객관적 증거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새로운 의견이 대두됐는데 2015년 전주 기독교계 일각에서 일정한 논의 과정을 거쳐 선정한 서완산동 좋은교회 옆 공터(서완산동1가 165번지 일원)와 지난해 말 한 연구자에 의해 새로 제시된 명륜맨션 터(청학산 언덕) 등이 새로운 '은송리교회'터였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최근 발행된 전주문화원의 회원지인 '호남제일성' 제148호에 실린 논문 '개신교 호남 첫 '은송리교회'터와 예배당에 관한 논쟁'이 이같은 논란의 종결될 수 있을 지에 관심이 모인다.
특히 아시아 최초로 기독교 선교기지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지방정부협의회가 지난 6월 출범한 가운데 호남의 첫 선교지이면서도 첫 교회터에 대한 정확한 고증조차 없어 타지역에 비해 위상이 약화된 전주시에도 이번 논문은 든든한 지원군이 될 전망이다.
역사학자인 김중기 오래된미래연구소 이사(문학박사)는 이번에 발표한 글에서 호남 개신교의 첫 교회터는 현재의 동완산동 행운슈퍼 옆 공터 임을 선교사의 기록과 초기 교인들의 증언, 사진 등을 통해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또한 서완산동 좋은교회 옆 공터와 명륜맨션 터 등 기존 주장들의 논지를 살펴보고 어떤 맹점이 있는지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어 호남 첫 교회터에 대한 논증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은송리 교회터에 대한 기존의 주장들
은송리교회터에 대한 교계와 학계의 주장은 앞서 언급한 것 처럼 모두 세 곳이다.
전주서문교회가 과거부터 옛 교회터로 기리고 있는 '행운슈퍼 옆 공터'는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이 희미해지고 점차 증언에 의존해야 할 형편이 되면서 이후에 제기되는 다른 주장에 비해 밀리는 형국이 되었다.
서문교회는 1978년에 제작한 기념앨범을 통해 해당 지번의 기와집 사진을 싣고 '서문교회 최초의 건물'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에도 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와 원로장로 등을 통해 해당 지번이 은송리 교회터였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두 번째 전주시 기독교연합회가 주장하는 서완산동 '좋은교회 옆 공터'는 2014년 전 전주문화원장을 지낸 서승 완산교회 은퇴장로가 해당 지역을 추정하면서 이후 은송리 첫 교회터로 특정되고 교계와 전주시가 협의를 거쳐 안내판을 설치하게 됐다.
가장 최근에는 김경미 전주대 연구교수에 의해 '명륜맨션 터'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재근 광신대 교수는 그 주장에 신빙성이 있음을 인정한 바 있는데 이 연구에서는 1900년에 제작된 완산도형'과 1910년대의 전주지도를 비교해 지리적 위치 해석을 시도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김중기 박사는 이 세 곳의 은송리교회터 가운데 신뢰성이 높게 그려진 '완산도형'을 김경미 교수가 연구에 활용한 결과 도면에 표시된 '미국인점옥처' 내부 범위로 교회터의 위치를 한정할 수있었던 점은 큰 수확이어서 그 범위에서 벗어난 좋은교회 옆 공터는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남은 두 곳 가운데 결론적으로 김중기 박사는 서문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행운슈퍼 옆 공터'가 '은송리교회터'에 가깝다고 손을 들어 준다.

가장 큰 이유로는 당시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확인한 '교회(church)'와 '예배당(chapel)'이 서로 다른 건물이라는 점을 규명해 이를 근거로 제시했다.
당시 선교본부의 연례보고서(1897.4.1~1898.4.1)에 수록된 전주선교거점의 자산목록 또한 '아직 완공되지 않은 예배당'과 '교회로 사용되는 초가집'이 별도의 건물로 등록되어 있는 점도 오해나 논쟁의 소지가 전혀 없는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김중기 박사는 "완산도형을 활용한 연구자들은 교회와 예배당을 동일한 건물로 여기고 교회의 위치를 완산도형의 맨 위쪽에 자리한 예배당 터로 선정했기에 혼란을 빚었다"고 앞선 연구의 맹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초기의 기록들에 뚜렷하게 명기된 것 처럼 교회와 예배당 건물은 별개의 것이고 정해원이 구입한 첫 교회가 된 초가의 터는 '완산도형의 맨 아래쪽에 그려진 세 채의 초가 중 가장 낮은 집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뒤 "그 구체적인 위치는 그동안 서문교회에서 기억해 온 행운슈퍼 옆 공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초기의 기록들이 분명히 증언하고 완산도형과 현재의 지도가 가리키고 있으며 초기 교인들의 구체적인 증언이 뒷받침되는 곳을 지금에 와서 가볍게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김 박사의 결론인 셈이다.
김중기 박사는 "은송리 첫 교회터는 호남지역 근대화의 출발점과도 긴밀하게 맞물려 있어 단순히 미국 남장로회 호남선교 요람의 의미를 뛰어넘는 상징성이 크다"면서 "이번 논의를 계기로 호남선교 초기 역사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더욱 증진되고 지역의 근대사 연구도 한층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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