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죽여야 하는 세상. '죽인다'는 설정이 과도하긴 하나 <어쩔 수가 없다>의 영화적 세계는 무한 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낯설지 않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는 비극에 익숙해진, 비극이 일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방증한다.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이 죽어도, 그들을 짓밟아도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된 현실을 <어쩔 수가 없다>는 거울효과로 비춘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다>에 대한 첫 인상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존재들의 참혹함과 저열함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맴돌았던 잔상들은 기이할 정도로 과잉된 이미지들과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이었다. 자본에 잠식당한 영혼들의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만들어 낸 기이함이자 자본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내려는 몸부림. 무엇이 되었든 과잉된 이미지와 인물들이 남긴 잔상들은 분명 자본에 대한 비판 그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 비판의 핵심이 무엇인지 가려내는 것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다. 오히려 영화가 끝났음에도 필자의 마음을 붙잡는 영화적 기이함이 이야기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더 궁금하다.

만수(이병헌)는 미국 기업에서 잘리고 중국 기업에 면접을 본다. 면접에 실패한 그는 다시 한국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자신의 경쟁자들을 처리하고 마침내 그 뜻을 이룬다. 미국과 중국을 거쳐 한국 기업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정확히 자본의 전지구적 상황을 반영한다. 자본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두 국가 사이에 끼인 한국의 제조업, 자본의 가장 중요한 핵심 동력이기도 한 제조업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국가의 고집이 경력을 인정받으려는 만수의 범죄에 깃들어 있다.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는 만수의 고집은 영화에서 처음부터 작동하지 않는다. 직업을 잃었을 때 그는 현실적으로 다양한 직업들을 전전하며 가부장으로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추동하는 것은 사회적 계급으로서의 자신의 지휘를 놓지 않으려는 욕망이었다. 범모(이성민)와 시조(차승원)를 거쳐 선출(박희순)에 다다른 순간 그는 제지 전문가로서 자신의 욕망을 명확히 발견한다. 다른 직업은 갖지 않으려 술독에 빠진 범모의 고집, 자신의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했을 때 겪게 되는 시조의 비참함, 모두가 욕망하는 자리에 있음에도 그 직업의 귀함을 깨닫지 못하는 선출의 천박함까지, 세 인물들이 처한 상황의 이미지들을 통해서 만수는 깨닫고 성장한다.
이들이 모두 중년 남성이라는 점, 사회적 활동을 통해 부와 명예를 쌓았고 이젠 그 모든 것이 무너졌거나 무너질 위기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어쩔 수가 없다>는 가부장의 몰락을 그려낸 작품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범모만이 유일하게 만수가 아닌 그의 아내 아라(염혜란)에 의해 살해되는 순간 이 작품이 가리키는 방향이 조금은 다를 수 있음을 깨닫는다. 등장 인물들 중에서 가장 고집스러운 존재는 범모다. 만수, 시조와 달리 그는 회사에서 잘린 뒤 다른 직업을 전전하지 않고 오로지 같은 직종에 취직하기 위해 애쓴다. 회사에서 잘렸다면 집에서 술이나 마실게 아니라 나가서 짐이라도 나르는 범모의 아내 아라(염혜란)의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니 그 어떤 직업을 택한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아라의 입장에서 범모는 직업을 귀하고 천한 것으로 나누는 계급주의자다. 그리고 알량한 자존심 하나로 가족을 돌보지 않는 파렴치한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면접을 보기 위해 독한 마음을 품고 술을 끊은 뒤 양복을 입는 범모의 태도에서 우리는 그의 고집이 계급을 고수하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직업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 깃든 결과임을 깨닫는다.

범모의 열망은 자칫 남성 가부장의 욕망으로도 보인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부여받은 가부장들이 몰락했을 때,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지 못해 어떻게 스스로를 갉아 먹으며 가족들을 고통속으로 몰아넣었는지, 우리는 여러 사회적 현상들을 통해 익숙하게 경험해 왔다. 가부장으로서, 사회의 '일꾼'으로서 대접받지 못한 중년 남성들이 어떻게 비루해질 수 있는지 <어쩔 수가 없다>는 굳이 숨기지 않는다. 노동력이 기술 문명에 의해 대체되는 현실에서 가장 먼저 노동 현장에서 내몰리는 중년 남성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증상들이 세 인물에게 깃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직업을 잃고 알코올중독에 빠진 범모의 모습은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만수, 시조의 태도와 상반된다. 손쉽게 대체가능한 자본의 노동력이 되지 않으려는 고집, 긴 시간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얻어낸 직업적 특수성을 존중받으려는 의지가 그의 단호함에 간절히 베어 있다.
그래서일까? 범모를 살해하는 것은 만수가 아닌 아라다. 손쉽게 대체 가능한 자본의 노동력이 되지 않으려는 고집, 그 고집을 북한에서 제작된 권총으로 아라의 손에 의해 꺾어내는 순간 만수의 직업적 숭고함이 이제 더는 그 어디에서도 존중될 수 없는 시대 속에 살고 있음을 영화는 관객이 자각토록 한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둘로 양분된 체제가 아닌 자본으로 통합된 전지구적 상황에서 밀려나는 직업들을 부여잡고 끙끙 앓아봤자 결국 만수처럼 거세될 수밖에 없음을 정확히 목도한 뒤로 만수는 살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만수는 역설적으로 범모를 지지하고 그의 감정을 살폈었다. 아내의 외도에 상처받지 않도록, 심리적으로 그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봤던 만수는 범모의 죽음 이후 마치 범모의 좌절된 고집에 대해 복수라도 하는 듯 살인을 이어 나간다. 만수의 변화에 가장 강한 영향을 끼친 자는 분명 범모임에 틀림없다.

만수의 변화 과정을 연결하는 도입부와 마지막 장면은 그 변화의 과정 곁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낸다. 직원들을 자르라는 회사의 입장에 반발하던 만수의 뒷배경엔 거대한 포클레인이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와 자제들을 집어삼킨다. 반면 그토록 원하던 회사에 입사한 뒤 전자동화된 거대 공장 안에서 홀로 외롭게 기계들과 함께 일하는 만수의 외소함은 그의 위치가 무엇에 의해 좌절되었는지 엿볼 수 있는 기회다. 이 순간 대비되는 것은 만수의 태도와 입장 차이가 아닌, 그의 뒤를 장식했던 녹슨 포클레인과 전자동화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로봇시스템이다. 둘 다 기계문명을 대변하는 상징이지만 적어도 녹슨 포클레인은 운전기사가 직접 운전하는 기계이기에 그 손은 인간의 손이 연장된 것이었다. 전자 패드의 시스템들을 버튼 하나로 조작하고 운영하는 로봇 시스템은 포클레인의 손보다 더 인간의 움직임과 행동을 닮아 있지만 정확한 움직임과 빠른 동작들은 절대 인간이 흉내 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육중하게 말려있는 종이를 망치로 직접 두들기던 만수의 일거리가 로봇 손에 의해 대체되었음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어쩔 수가 없다>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는다. 자본에 의해 쉽게 대체될 수 있는 노동력의 미약함, 이를 기계가 대체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중년 가부장들의 처연함이야말로 <어쩔 수가 없다>가 담고 있는 정서적 무드다.
여기까지가... 영화를 보는 동안, 보고 나온 직후 머릿속을 맴돌았던 생각들이다. 표면적으로 영화가 서술하는 내용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어쩔 수가 없다>가 자본주의, 더 나아가 기술중심주의를 어떻게 바라보고 사유하고 있는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선명했던 이미지와 서사가 흐릿한 기억들로 융해된 지금, 필자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영화적 과잉의 이미지들뿐이다. 특별히 아라가 범모와 함께 뒷산을 걸으며 자신의 오디션 경험을 늘어놓는 장면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서류를 보낸 회사에서 연락이 오지 않아 낙심하는 범모 옆에서 아라는 배우 오디션의 결과가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하며 흥분한다. 철이 없어 보이지만 범모와 대비되어 욕망에 충실한 자유로운 영혼으로 그려지는 아라의 연기는 필자에게 어색하게 다가올 정도로 과잉되어 있었다.
우린 모두 염혜란 배우가 어떤 연기력을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녀는 계급, 직업,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위치를 넘나들며 다양한 캐릭터들을 살아 숨쉬도록 만든 배우다. 그렇기에 그 순간의 어색함은 전적으로 의도된 것임에 분명하다. 물론 영화적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기이하고 어색하게 구성된 배우의 연기는 어쩌면 감독과 배우의 오판에 의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기이함은 영화 전반을 휘어감고 있는 그로테스크함과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인물들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반영하는 프로덕션 디자인. 몰락하는 사회적 계급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물들의 절박함과 괴리감은 고급스러운 물건들로 가득 들어찬 공간 디자인을 통해서 더욱 부각된다. 미장센이 과잉되는 만큼 인물들의 모순도 더욱 부각되는 형국이다. 하지만 모순을 지적하기 위해 과잉된 미장센이 현실성과도 거리를 두는 순간 관객은 극에 몰입할 힘을 잃어버린다. 만약 이러한 몰입의 벗어남조차도 감독의 의도라면, 우리는 현실성을 잃어버린 과잉된 이미지들 속에서 무엇을 건져 올릴 수 있을까?

<어쩔 수가 없다>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상징 중 하나는 바로 태양이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쬘 때 우린 시력을 잃는다. 너무 강렬하게 반사된 빛으로 인해 만수는 중국 기업과의 오디션을 망쳤다. 태양에 의해 지구의 모든 피조물들은 생명력을 얻어 살아갈 수 있지만 그 태양이 너무 강렬해지면 우리 모두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는 영화라는 기계 장치의 속성과도 맞물려 있다. 영화는 빛의 예술이다. 필름으로 이미지를 기록하던 시절, 빛을 어떻게 조율할 수 있는지에 따라 영화의 미학적 생명력이 결정되었다. 빛이 없으면 영화도 존재할 수 없다. 오직 빛을 통해서만 영화는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 극장 산업이 급변하기 시작하며, 여기에 AI의 도래로 영화의 생태적 구조 또한 커다란 변화를 마주하며 영화의 본질이었던 빛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1995년, <토이 스토리>가 처음 개봉했을 때 영화 학자들은 지시성을 잃어버린 디지털 이미지가 어디까지 현실과 가까워지게 될지 놀라워하면서도 두려움을 감추지 않았다. 근 30년 간 디지털 이미지가 영화 이미지를 잠식하는 동안에도, 필름이 디지털로 전환되는 과정 중에도 여전히 영화가 빛의 예술임을 부정하진 않았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극장'이라는 영사 시스템이 영화의 본질을 부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드는 과정이 어떠하더라도 결국 영화와 마주하는 공간은 본질적으로 빛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만드는 과정에서도 빛은 영화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만약 이러한 조건들이 OTT 플랫폼과 순수한 AI 디지털 이미지로 대체되어 버린다면 영화의 빛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만수가 강렬한 빛에 의해 면접을 망치는 장면에서 필자는 영화의 본질이었던 빛에 대한 감독의 두려움을 느낀다. 영화의 본질이 빛이었는데, 만약 그 본질이 훼손당한다면 앞으로 영화는 어떻게 될까? 직업인으로서 감독이 느끼는 두려움이 어쩌면 중년 남성 가부장들의 불안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영화적 과잉의 이미지들, 현실로부터 괴리되어 관객들의 이입을 막을 정도로 과잉된 영화적 순간들 또한 몰락해 가는 과거의 찬란했던 영화적 순간들을 복기하려는 감독의 과욕이 반영된 결과는 아니었을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 앞에서 우리는 '어쩔 수가 없다.' 변화는 이미 기정화된 사실이고,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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