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목전이다. "슈퍼위크"란 말이 하나도 과장됨이 없다. 동북아 국제관계를 전문하는 사람으로서 가슴이 설렌다. 미국과 중국의 지도자가 국빈방문(state visit)을 동시에 하고, 갓 취임한 일본의 지도자도 온다.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주요국 정상들이 모두 경주로 집결한다. 천년고도 경주가 동북아 초대형 외교 이벤트의 플랫폼으로 그 찬란함을 과시한다. 이미 한국의 가교 역할이 빛을 발한다.
동북아 역내 모든 국가들간의 양자관계가 분수령에 놓여 있고, 동북아 국제관계, 더 나아가 국제질서 전반이 분수령에 놓여 있다. 이같은 분기점적 시기에 열리는 경주 APEC이기에 의의가 유별나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의 국빈방문이다. 트럼프 1기인 2017년 가을에 국빈방문을 한지 8년 만의 일이다. 형식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이라지만 국빈방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 있어 한국이 너무나 소중한 파트너이고, 이재명 대통령도 귀히 여겨야 할 지도자라는 점을 안팎에 천명한 셈이다. 게다가 지난 8월 워싱턴 정상회담이후 불과 두 달 만에 한미정상회담이 한국에서 열리게 되었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초미의 관심사는 관세 및 투자 협상 종결 문제지만, 더 나아가 향후 미래지향적이고 포괄적인 한미동맹의 나침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런 합의를 통해 트럼프 행정부 임기동안 한미관계를 큰 소용돌이 없이 맺어가는 초석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못잖게 중요한 일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국빈방문이다. 필자는 지난 여름 중국 외교단체의 초청을 받아 베이징을 방문한 적 있다. 전직 중국 고위 외교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을 만나 세미나도 하고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당연히 APEC에 시진핑 주석이 방한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때 여러 인사들이 시진핑 주석의 방한에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을 너무 중시하고 한중관계 발전에 큰 관심이 없는 것 아닌가라는 인식이 강했다. 필자는 한중관계 발전을 위해서 시 주석이 경주를 꼭 와야 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국빈방문이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결국 국빈방문이 성사되었다. 이 자체가 우리 외교의 중대한 성과라 할 수 있고, 한국이 중국에 너무나 중요한 국가임이 확인되는 일이다.
갓 취임한 일본의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총리의 방한도 의미가 적지 않다. 그간 다카이치 총리는 "여성 아베"라 불릴 정도로 한일 간에 갈등의 불씨가 되는 과거사문제에 대해 강경한 발언들을 해왔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강행했던 정치지도자였다. 그래서 전임 이시바 총리의 유화적 한일관계 노선을 뒤집는 것 아닌가하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재명 대통령과 정부가 그간 들여온 협력적 한일관계 구축 노력과 셔틀외교의 복원이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였던 것이다.
그런 그마저 지난 21일 일본 의회연설에서 "한국은 중요한 이웃 나라"라며 이재명 대통령과의 대화를 이어가고 한일관계 강화에 적극 나서겠다고 천명하였다. 일단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아래 한국과의 파트너십을 진전시켜나가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에는 이재명정부의 선제적 행동도 한 몫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인데, 지난주 위성락 안보실장이 비공개리에 전격 도쿄를 방문하여 아소 다로 자민당 부총재와 스가 전 총리를 비롯한 정치지도자들과 만났고, 카운트파트인 이치가와 NSS국장과도 회동하였다. 그리고 다카이치총리와는 APEC의 사이드라인에서 흔히 하는 의례적인 회담이 아니라 격식을 갖춘 한일정상회담을 가질 것인데, 한일 간 셔틀외교를 다져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뭐니 뭐니해도 이번 경주APEC무대의 백미는 트럼프대통령과 시진핑 주석간의 미중정상회담일 것이다. 미중정상회담이 우리 안방에서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괄목할 만한 외교적 쾌거라 할 수 있다. 동북아 공동번영의 가교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이재명 대통령과 정부가 노력한 결실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미중정상회담의 결과다. 그 결과가 향후 미중관계, 동북아 국제정세, 그리고 국제 경제질서 및 안보질서에 두고 두고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이 정상회담을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단하기 어렵지만 긍정적 전망을 제시하고 싶다. 즉, 미중간의 패권경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간의 중단기적 타협 전망인 것이다. 중단기적 타협이란 기왕에 진행되어온 무역과 관세 협상을 마무리함으로써 양국 간의 갈등 확산을 방지하고 관계를 관리해나가고자 하는 절충을 말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언설을 요란하게 하지만 시진핑 주석과 대결적 태세로 일관할 수 없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국과의 적정한 타협을 통해 실리를 취하고자 할 것이다. 시진핑 주석 입장으로서도 시간에 쫓기지 않기 때문에 미중관계를 적절한 수준에서 관리해나갈 방향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경주 APEC은 미증유의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동시 국빈방문에 더해, 미중, 한미, 한중, 한일 등 각종 정상회담만으로도 한국외교의 위상을 세계 만방에 떨치는 무대가 되고 남는다. 한국외교사에 길이 남을 한 챕터를 장식할 것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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