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는 포항의 상징이었습니다. 어릴 적 수협에서 고래를 해체하던 모습을 보며, 나는 이 도시가 가진 거대한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지난 24일 포항 포은중앙도서관. 장편소설 ‘붉은 고래’ 북콘서트의 무대 위에서 허화평(88) 미래한국재단 이사장은 그렇게 말을 꺼냈다.
'붉은 고래'는 포항 출신 허씨 삼형제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이대환(67) 작가의 장편소설로, 작품의 실제 모델 중 한 명인 허 이사장이 직접 무대에 올라 작가와 대담을 나누었다.
이 작품은 세칭 '5공의 설계자'로 회자되는 허화평 이사장 3형제 중 막내인 故 허화남씨(소설 속 허경욱 분)가 화자로, 그가족들의 실증적 배경이 바탕이 되어 분단이라는 현실속에서 사상적으로 명암이 드리워진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다.
■ 분단의 기억과 자유의 철학
허 이사장은 이날 “소설 ‘붉은 고래’를 픽션이 아닌 논픽션처럼 읽어야 한다”며 “작품의 핵심은 ‘판단의 자유와 판단의 억압’이라는 인간의 근본적 질문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냉전시대부터 현재의 국제정세까지 폭넓은 시야로 이야기를 이끌었다.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의 차이는 생각할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사상의 자유가 없으면 판단이 불가능하고, 판단이 없으면 인간은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허 이사장은 분단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짚으며 “통일이 완성되어야 비로소 건국이 완성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헌법이 말하는 자유와 인간 존엄의 정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지켜야 한다”며, “생각하고 선택할 자유가 인간의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덧붙였다.
■ 인연과 시대가 만든 특별한 대담
이날 행사는 단순한 문학행사를 넘어, 한 시대를 관통한 두 포항 출신 인물의 만남으로 의미를 더했다.
이대환 작가와 허 이사장은 수십 년의 인연을 이어온 오랜 선후배로, 이날 무대에서는 정치와 문학, 현실과 이상을 넘나드는 진솔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허 이사장의 삶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자, 영일만의 파도소리와 함께 그의 육성 나레이션이 흐르며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다. 과거 군인으로서의 결단과 사상가로서의 성찰, 그리고 노년의 고향 사랑이 한데 어우러졌다.
■ “포항, 동해의 중심으로 다시 일어서야”
대담의 후반부에서 허 이사장은 고향 포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포항은 인물 나는 도시가 돼야 합니다. 형산강은 두만강 다음으로 큰 동쪽의 강이자 우리 삶의 젖줄이죠.”
그는 “동해선 철도가 시베리아와 연결되면 포항은 환동해 경제권의 핵심 거점이 될 수 있다”며 “포항·경주·영덕·울진이 함께 미래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 “문학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
이대환 작가는 “허화평 이사장의 인생은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자, 분단과 전쟁을 넘어선 인간의 내면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허 이사장은 이에 “문학이란 결국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고 답했다.
88세의 노정객이자 사상가로서, 허화평 이사장은 이날도 여전히 ‘생각하는 자유’를 설파했다. ‘붉은 고래’가 상징하는 거대한 생명력처럼, 그의 사유 또한 분단의 바다를 건너 자유의 물결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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