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025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계기로 또다시 북미대화 가능성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재등장,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중, 최선희 북한 외무상의 러시아와 벨라루스 방문 소식이 맞물리면서 혹시 다시 한 번 북미 정상이 극적인 회동을 연출하지 않겠느냐는 기대 섞인 관측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2019년 오사카 G20 직후 판문점에서 벌어진 '번개 회동'을 지금의 경주 APEC에 대입하는 것은 국제질서의 변화를 무시한 단선적 상상에 가깝다.
2019년과 2025년은 전혀 다른 세계다. 북한에게 2019년 미국은 생존을 위한 협상의 필요충분조건이었다. 미중 경쟁의 틀 안에서도 외교적 협상형 국제질서가 작동하던 시기였다. 트럼프의 판문점 방문은 "북한 땅을 밟은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라는 극적 장면을 만들어내며 외교와 이벤트가 교차하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2025년의 세계는 미중러 3개의 강대국이 혼재한 '무극의 진영화'이자 강대국 중심의 카르텔 구조가 고착된 시기다. 협상의 공간은 사라지고 외교는 각자도생의 무대에서 연출되는 정치 퍼포먼스로 전락했다.
최근 북한이 '자주·전승·혈맹' 담론을 강조하며 러시아와 중국, 베트남까지 포함한 새로운 연대의 장면을 연출한 것은 결코 단순한 외교 수사가 아니다. 평양의 무대에서 김정은은 더 이상 트럼프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이미 전승국의 지도자, 핵보유국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
하노이의 실패가 남긴 교훈은 단 하나였다. 김정은에게 미국과의 대화는 더 이상 체제 보장이나 제재 완화를 위한 협상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흔드는 위험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의 김정은에게 트럼프와의 재회는 영광이 아니라 굴욕이며, 혈맹 담론을 희생시키는 정치적 모순이다.
트럼프에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는 이제 미국 내에서조차 신뢰를 잃은 정치적 유령이다. 의회와 사법, 언론의 견제 속에서 그가 의지할 것은 정책이 아니라 무대다. 트럼프에게 외교는 협상이 아니라 장면이고, 국제정치는 쇼 비즈니스다. 그가 다시 북한 카드를 꺼낸다면 그것은 회담이 아니라 연출, 대화가 아니라 독백일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 김정은의 이름을 언급하고, "나만이 그를 다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다시 세계의 중심에 선 듯한 착각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트럼프식 '유령외교(Phantom Diplomacy)'의 본질이다.
북한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김정은은 트럼프의 언급을 공식 회담의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것을 미국 내 분열과 외교적 혼란을 보여주는 증거로 활용할 것이다. 북은 트럼프를 대화의 상대로서가 아니라, 자기선전에 유용한 정치적 재료로 소비할 가능성이 높다. 북미 간의 실질적 교류는 부재하지만, 상징적 언급과 상호 활용만이 남는 '유령적 관계'가 이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경주 APEC을 계기로 한 북미정상회담은 공간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북한은 이미 남북관계를 헌법적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김정은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 구역으로 오는 것은 체제 논리상 불가능하며, 트럼프가 북측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 역시 모순이다. 제3국 회동도 일정상 불가능하다. 즉, 물리적 조건만으로도 경주 APEC을 계기로 '북미대화 재연'은 불가능하다.
결국 남는 것은 회담이 아니라 이벤트, 협상이 아니라 연출이다. 트럼프는 쉽게 무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외교를 실질적 협상이 아니라 '장면의 정치'로 이해한다. 이번 APEC 기간 중 DMZ나 판문점 인근에서 단독 행보를 보인다면,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연출이며, 외교가 아니라 쇼 비즈니스다. 문제는 그 '쇼'가 단순한 허상으로만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트럼프에게 외교는 형식이 내용이 되는 영역이다. 쇼 비즈니스에서 '연출'은 곧 '내용'이다.
그가 만약 DMZ를 배경으로 "나는 평화를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메시지를 던진다면 북미회담 없이도 강력한 정치 행위가 된다. 그는 한국을 우회해 한반도 안보문제를 '나와 김정은'의 1:1 구도로 프레임화할 것이다. 결국 한국의 외교채널을 무력화하고, APEC이라는 다자무대를 개인 정치의 도구로 바꾸는 행위다. 실패하더라도 손해는 없다. 그는 "나는 대화의 문을 열었지만 상대가 응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평화의 이미지는 가져가고 책임은 상대에게 전가할 수 있다.
이처럼 트럼프의 '유령외교'는 내용이 없는 외교가 아니다. 오히려 외교의 제도와 질서를 파괴하는 '반(反)외교적 외교'로서 실질적 파괴력을 갖는다. 그것은 정상 외교의 시스템을 비틀고 외교를 이벤트로 치환하여 동맹의 신뢰를 약화시키는 매우 불편하지만 현실적인 힘을 가진다. 외교에 '유령'은 실체가 없지만 그 영향은 실재한다.
그렇다고 북한은 단순히 트럼프의 유령극을 소비하는 수동적 존재로만 남지 않을 것이다. 김정은은 트럼프의 독백을 인정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쇼의 흥행을 좌우할 수 있는 연출자의 위치에 설 수 있다. 북한이 완전한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트럼프의 퍼포먼스는 국제적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반대로 김여정 명의의 조롱 담화 하나로 트럼프의 독백을 '정상외교'가 아닌 '촌극'으로 격하시킬 수도 있다. 북한은 트럼프 유령외교의 관객이 아니라 '연출 감독'으로서 판을 조정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 무대는 트럼프(주연 배우)와 김정은(연출 감독)의 '그들만의 리그'가 될 수 있다. 미국의 내부정치와 북한의 체제정치가 서로의 연극을 필요로 한다. 북미 모두 외교를 정치의 연극으로 만들고 있지만, 그 연극의 무대가 한반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이 무대에 '페이스 메이커'나 '중재자'로 끼어들려 하면 오히려 들러리로 전락할 위험이 커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략은 그들의 무대를 중재하거나 페이스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대를 넘어서는 것이 되어야 한다. 트럼프의 쇼와 북한의 맞대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APEC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며 중국·일본 등 실질적 파트너와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것이 현실적 대응이다. 과감히 '유령외교'의 무대를 거부하고 새롭게 무대를 장악해야 한다.
유령에 맞서기 위해 우리도 유령이 될 수는 없다. 실력은 실체에서 나온다. 진짜 문제는 북미회담이 열리느냐가 아니라 외교의 실체가 사라진 자리에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장면이 아니라 구조이며, 쇼가 아니라 제도이다. 트럼프의 쇼가 아니라, 우리의 전략이 이 무대를 설계해야 한다.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외교의 실체를 복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 한 번 타인의 연극 속에서 관객이나 조연으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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