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화의 영웅 vs 조선 침략의 원흉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이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일본인이지 않을까 싶다. 고(故)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에게는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요즘 인물이라 제외하고, 흘러간 세월의 흐름과 축적된 세간의 평가가 빚어낸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측면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단연 한일 양국에서 가장 높은 인지도(?)를 가진 일본인이지 않을까 필자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그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역사적 평가는 역사인식문제를 바라보는 양국의 온도 차이 만큼이나 극과 극을 달린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라는 일본의 근대화와 서구화를 이끈 개혁의 영웅이자 초대 총리 등을 역임한 정치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을사늑약이라는 조선의 망국화와 식민지화를 이끈 침략의 원흉이자 초대 통감을 지낸 침략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위인 중에 한 명인 안중근 의사와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기도 해서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 양국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취할 수 없는 그런 인물이지 않을까?
이토 히로부미는 이와 같이 한일 양국에서 '일본 근대화의 영웅' vs '조선 침략의 원흉'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으면서 널리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에 비해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가 열렬한 '고려자기 수집광', '고려자기 컬렉터'였으며, 1906년 이후 '고려청자광'(高麗靑磁狂) 시대, 즉 '고려자기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고려자기를 얼마나 사랑했길래 '고려자기 붐'을 불러일으켰을까? 그는 조선에서 고려자기를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 그리고 한일회담의 문화재 반환 교섭에서 고려자기는 어떻게 논의되었을까? <일본은 왜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는가?> 제2부의 첫 번째 주제는 이토 히로부미와 고려자기에 얽힌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올해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과 마찬가지로 을사년이다. 당시 일본 추밀원 의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으로 건너와 군대를 동원하여 이에 반대한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하며 11월 17일에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했다. 여기에는 친일매국노인 을사오적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도 조력했다. 을사늑약으로 인해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통감부가 설치되는 등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
이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11월 20일), 민영환의 자결(11월 30일), 을사의병, 이상설·이위종·이준의 헤이그 특사(1907년 6월) 등 을사늑약으로 인한 여러 일들이 벌어진 것은 우리가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바와 같다. 독자분들께서는 이토 히로부미와 고려자기의 이야기를 통해 한일 양국의 굴곡진 역사,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근대사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시기 바란다.
'고려자기 붐'의 선구자(?), 이토 히로부미
1906년 이후 조선에서는 '고려청자광', 즉 고려청자 '광풍'이라고 부를 만한 '고려자기 붐'이 일어났다. 1900년대 전후 시기에 일본인들은 고려자기에 대해 크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가 1906년에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이를 계기로 '고려청자광'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고려자기 붐'을 이끌었던 선구자였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고려의 옛 도자기가 세간의 주의를 끌게 된 것은, 1906년 이토 히로부미 공이, 초대 통감으로 조선에 부임했을 즈음부터라고 들었다. 그 후 고려자기 수집열(蒐集熱)은 해를 거듭할수록 높아져, 1911년, 1912년 즈음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고려자기를 얼마나 많이 사들였길래 '고려자기 붐'이 일어났을까? 이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일화를 확인해 보자.
이토 공도 사람들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고려자기를: 필자 주) 열렬히 모은 사람 중 한 명이며, 한때는 그 수가 수천 점 이상 달했을 것이다. 그때 닛타(新田)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토 공을 연석에서 가까이 모실 때마다 노래하거나 춤을 추며 흥을 돋우던 남자였는데, 나중에 여관을 개업했다.
이토 공은 여유가 있으면 여기에 가서, 닛타에게 얼마든지 고려자기를 가져와라, 있는 대로 사 주겠다는 식으로 말하고 (닛타는 고려자기를: 필자 주) 계속 사들여, 30점, 50점을 한꺼번에 사람들에게 선물해 버렸다. 어떤 때에는 곤도(近藤)의 가게에 있는 고려자기를 그대로 그냥 사 버리는 일도 있었다. 이에 자극을 받았는지, 고려청자광 시대가 출현했고, 한때 이에 기대어 생활하는 자도 몇 천 명이나 되었으며, 따라서 도굴당한 개성, 강화도, 해주 방면의 크고 작은 고분의 수는 놀라울 정도였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얼마나 많은 고려자기를 사들였길래 고려청자광 시대가 출현했다고 했을까? 필자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면 아마 위와 같은 방식으로 고려자기를 가끔 구입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골동품 가게에 미리 구매 예약을 해 놓고 고려자기가 어느 정도 모였을 때 대량으로 여러 차례 구매했을지도 모른다. 이토 히로부미의 명을 받은 닛타가 골동품 가게에 가서 '고려자기 좋은 게 들어오면 다른 이들에게 팔지 말고 좀 쌓아두고 수십 개가 모이면 연락 주시게나. 통감 어른께서 원하고 계시네'라고 말하면 골동품 가게 주인인 곤도(近藤)는 고려자기 판매로 돈을 벌 생각에 바로 '하이!'(はい!)라고 답하면서 기뻐하지 않았을까?
당시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 중에 수십 점의 고려자기를, 또는 골동품 가게에 있었던 모든 고려자기를 한꺼번에 사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이토 히로부미밖에 할 수 없었던 스케일이 큰 호탕한(?) 구매였을 수도 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들과 같은 유명인들이 다녀간 식당이나 입었던 옷 등이 입소문을 타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처럼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 대량 구입은 당시 고려자기에 관심 있는 일본인들의 입소문을 통해 당연히 여기저기 퍼져나갔을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만큼 고려자기를 구매하지는 못하겠지만 고려자기가 다 팔려버릴 수도 있으니 서둘러 구매해야겠다고 생각한 일본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골동품 가게나 중개업자, 도굴꾼들도 이토 히로부미라는 최대의 수요자와 그 외 구매력을 갖춘 고려자기 수요자들에게 고려자기를 팔기 위해 강화도와 해주까지 손을 뻗어 닥치는 대로 고려자기를 구해왔을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오미야게', 고려자기
이토 히로부미는 이와 같이 수십 점 또는 그 이상의 고려자기를 한꺼번에 사들여서 메이지 덴노(明治天皇)에게 진상하거나 고위 관료 등에게 '오미야게'(おみやげ, 선물)로 줬다고 한다. 이에 관한 일화를 또 하나 살펴보자.
한번은 이등(伊藤)이 전례대로 고려청자를 한 짐 싣고 도쿄역에 도착했다고 한다. '플래트'에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이등이 내려오면서 “자네들에게 주려고 고려청자를 선물로 가져왔으니 기차에 올라가 꺼내 가지라'고 했다 한다. 그러자 모두들 앞을 다투어 기차에 뛰어올라 깨진 청자병이며 사발 등을 서로 먼저 가지려 법석을 떨었다고 했다.
고려자기 최대의 수요자, '고려자기 붐'의 장본인인 만큼 스케일이 큰(?) 또 하나의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일화에서 당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고려자기에 대한 일본인들의 사랑(?)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전례대로'라는 표현을 한 번 살펴보자.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에서 일본으로 돌아갈 때 '항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주, 아니 적어도 수차례에 걸쳐 고려자기를 '한 짐' 싣고 일본에 갔을 것이다. '한 짐'에 고려자기가 몇 개나 들어 있는지 알 길은 없지만, 닛타를 통해 고려자기를 마구 사들였다는 일화를 생각해 본다면 30점에서 50점, 또는 그 이상을 사들여서 일본으로 가져가지 않았을까?
그렇게 가져간 고려자기 중에는 한일회담의 문화재 반환 협정을 통해 돌려받은 '청자귀형주자'(보물 452호)를 비롯하여 '청자음각모란문과형주전자', '청자상감국모란문장경각병' 등 97점의 고려자기도 있었다. 이 고려자기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덴노에게 진상한 후 궁내부(宮内省)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1907년 10월 7일에 도쿄제실박물관으로 이관된 경위가 있다.
다음으로 일본인들에게 고려자기는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깨진 청자병이며 사발 등'도 먼저 가지고 가려고 기차에 뛰어올랐다고 하는데, 깨져서 가치가 떨어지는 고려자기조차도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고려자기가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도자기가 마치 물이 낮은 대로 흐르듯이 많은 물건이 일본에 건너오게 되었고 또 이것을 매우 깊이 사랑하고 아끼고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게 된 것은 메이지 시대 말기 이후입니다.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대정(大正) 연간의 초기에 걸쳐서 한국에서 출토된 고려청자를 한국에 온 여행자들이나 또 한국에서 근무한 일본인들이 가지고 들어와 그 수집열이 일본에서 날로 성행했습니다.
일본에서 고려자기를 수집하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고려자기 붐'은 당시 '고려자기 한류'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인기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이토 히로부미가 가져온 어딘가 깨지고 상처 난 고려자기는 완벽한 것보다 그 가치가 분명 떨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난리법석을 떨어가면서까지 앞다투어 이를 서로 가지려고 했을 만큼 고려자기는 인기가 많았다. 상품 또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낮았겠지만, 고려자기의 일부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시 일본인들에게 '있어 보이는 힙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고려자기 장물아비, 이토 히로부미
지금까지 이토 히로부미와 고려자기에 관한 일화를 통해 이토 히로부미와 당시 일본인들의 고려자기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살펴봤다. 이토 히로부미의 여러 일화 중에 그가 고려자기의 예술적 가치를 잘 알고 그 미적 화려함에 심취하여 고려자기를 수집하고 귀중하게 다뤘다는 일화를 필자는 아직까지 확인한 적이 없다. 혹여 있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확인한 일화들을 토대로 생각해 본다면, 이토 히로부미는 수많은 고려자기를 사들여 그 대부분을 선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 사랑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고려청자광', 즉 '고려자기 붐'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이구열은 <한국문화재 수난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고려자기 최대의 장물아비'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반도의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는 데 성공한 일제 침략의 괴수이자, 개성 일원에서의 고려 고분 파괴와 고려자기 도굴을 크게 조장시킨 원흉이었다. 또한 그는, 과거 임진왜란 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졸개들을 시켜 이 땅에서 저질렀던 대대적인 문화재 약탈과 유적 파괴의 범죄 행위를 또다시 반복한 불법침입자의 두목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 구매로 '고려자기 붐'이 일어나자 일본인들에 의해 수많은 고려 분묘가 파헤쳐지면서 당시도 그 수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고려자기가 일본인들의 손에 들어갔다. 그중 상당수가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고 지금도 어디에 무엇이 얼마만큼 남아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이토 히로부미가 가져간 고려자기도 영원히 그 수를 알 수 없을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고려자기의 수만큼 헤아릴 수 없는 비운의 상처가 우리 역사의 살갗에 아로새겨져 있다.
■ 참고문헌
박병래, 『도자여적』, 중앙일보사, 1974.
이구열, 『한국문화재 수난사』, 돌베개, 1996,
小山富士夫, 「高麗磁器序説」, 『世界磁器全集 第13 朝鮮上代・高麗編』, 座右寶刊行会, 1955.
三宅長策, 「そのころの思ひ出-高麗古墳発掘時代」, 『陶磁』 6卷6號, 1934.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