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일 오후 범불교시국회의가 주최한 '한국사회 대개혁을 위한 한국불교 성찰과 전환' 토론회에서 발표한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의 발제문이다. 그동안 직접민주주의의 제도적 도입과 확대를 주장해온 손 교수는 이 글에서 현 정세에선 "직접민주주의 확대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며 유보적 견해를 보인다. 나아가 공론장이 붕괴하고 포퓰리즘 정치가 득세하는 풍토를 경계하며 지금 시급한 과제는 "고장 난 대의민주주의를 발본적으로 혁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정농단과 탄핵,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두 번의 국가적 격랑을 시민의 저력으로 극복했음에도, 정작 현실 정치의 퇴행이 한국 민주주의의 정상적 회복을 가로막고 있다는 원로 진보학자의 우려다. <편집자>
1. '희극적 비극'을 넘어서
"헤겔은 어디에선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은 두 번 반복한다고 썼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어버렸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한다." 칼 마르크스가 쓴 유명한 문장이다(Marx, 1852).
나는 박근혜가 대통령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이를 인용해 "박정희가 비극이라면, 박근혜는 희극"이라고 썼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를 보면서, 나는 마르크스의 글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은 세 번 반복한다. 두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고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손호철, 2024). "박정희의 5.16과 전두환의 12.12 쿠데타가 비극이라면, 윤석열의 실패한 비상계엄은 희극이다.“
'파국적 평형상태'. 안토니오 그람시는 서로 대립하는 사회세력의 힘이 엇비슷해 어느 누구도 다른 세력과 사회 전체에 대해 헤게모니를 행사하지 못하고 둘 간의 평형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파국으로 달려가는 상황을 이렇게 불렀다(Gramsci, <옥중수고>). 그는 이 상황은 군부가 몽둥이를 들고 나오는 '케사리즘'이나 '보나파르트주의' 같은 비극으로 이르게 된다고 분석했다. 윤석열은 자신의 정부와 국회를 장악한 더불어민주당과의 '파국적 평형상태'를 비상계엄이라는 궁정 쿠데타로 돌파하려는 돈키호테적 망상으로 한국사회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윤석열의 궁정 쿠테타는 희극이었지만, 문제는 이후에 나타난 비극적인 '내전 상황'이다. 비상계엄의 촌극과 내전상태는 일부에서 '빛의 혁명'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시민항쟁에 의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번과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중요한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또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에 대해 내 생각을 밝혀 보고자 한다.
2. 몇 가지 전제들
이 글의 출발점은 내가 오래전부터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분리'라고 표현해 온 한국사회의 중요한 특징이다. 우리의 시민사회는 '운동사회'라고 불릴 정도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다양한 민주화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위한 압박을 가해오고 있지만, 정치사회는 시민사회로부터 분리돼 시민사회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낙후한 모습을 보여줘 왔다. 다시 말해, '선진적 시민사회와 후진적 정치사회'의 기이한 공존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윤석열 퇴진에 시민항쟁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최근의 여러 촛불항쟁이 한국정치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의 퇴행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불편한 현실이다.
2017년 박근혜 퇴진 촛불항쟁 중에 이 항쟁을 '촛불혁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에 대해 쓴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에서 나는 그동안의 촛불항쟁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2008년 이명박 정부 초기 광우병 촛불항쟁 당시 쓴 내 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주1)
"그러나 지나친 낙관론은 금물이다. 촛불은 정치적으로 주체화되지 않는다면 일회성 촛불로 끝나고 말 것이다. 촛불은 계속될 수 없다. 사실 촛불은 처음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2002년 효순 미선 촛불시위가 있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분노한 촛불이 있었다. (…) 그러나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 승리했다. 불행히도 나의 글을 맞았다. 광우병 촛불은 오래지 않아 꺼졌다. 얼마 뒤 용산 참사가 일어났지만, 촛불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대선에서 박근혜가 승리했다."
불행하게도, 다시 한 번, 나의 경고는 맞았다. 박근혜 퇴진 촛불항쟁은 문재인 정부의 출범으로 이어졌지만, 촛불항쟁을 배태한 박정희 체제, 1987년(불안전한 민주화)체제, 97년(신자유주의)체제의 극복, 즉 '촛불혁명'으로 나가지 못했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는 탐욕('촛불연정' 거부와 위성정당 등 승자독식주의 강화)와 무능(부동산 폭등 등 양극화 심화), 위선(내로남불) 등으로 촛불정신을 말아먹었고, 그 결과가 87년 민주화 이후 최초로 5년 만에 정권을 내주고 윤석열 정부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인 항쟁들이 정치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정치정체'와 '정치퇴행'으로 귀결되는 '비극의 역사', 아니 '희극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이것이 이 글의 핵심 문제의식이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개념에 대한 문제들도 간단히 짚고 넘어 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윤석열 때문에 다시 주목받고 있는 '국민주권'과 '민주주의'라는 개념이다. 부족한 내 지식이지만 내가 아는 한, 국민주권은 최소한 영어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기이한 개념이다. 국민주권를 영어로 번역하면, national sovereignty인데, 이는 한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갖는 주권을 의미하지, 우리가 생각하듯이 '국민이 주인'이라는 국민주권이 아니다. 국민주권에 해당되는 '국제적인 개념'은 'popular sovereignty' 내지 'sovereignty of the people'이다. 즉 '인민(people)주권'이지 '국민(nation)주권'이 아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링컨의 연설도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이지 '국민(nation)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다. '인민'이라는 용어를 북한이 주로 쓴다는 이유로 '국민'이라는 기이한 용어로 왜곡해 온 '언어의 매카시즘'은 이제 끝내야 한다. 국민주권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왜곡된 번역'을 넘어서 '국가에 의해 구성되고 승인·되는 국민'이라는 국가주의적, 상명하복식 발상에 기초해 있다(일부에서는 이 같은 문제점 때문에 국민주권 대신 '시민주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 같은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이 문제가 이 글의 중심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논쟁의 초점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국민주권'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자 한다.
다음은 민주주의 문제다. 이 문제를 가장 쉽게 논의하는 방법은 박근혜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대선과정에서 내건 '경제민주화'라는 공약을 통해, 박근혜는 어느 정치학자도 하지 못한 민주주의 교육을 우리에게 시켜줬다. 그것은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다가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크게 보아 다섯 가지 민주주의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흔히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사상, 표현, 결사의 자유 등 자유권과 관련된 '정치적 민주주의'다. 둘째,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회권과 관련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다. 셋째, 작게는 '직장 갑질'로부터 자유롭고, 크게는 직장의 주요 문제를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생산자 민주주의', '산업민주주의'다. 넷째, 가족, 남녀관계 등 일상적 삶에서의 민주주의 문제('일상성의 민주주의')다. 끝부분에서 간단히 다룰 '종교민주화'도 여기에 해당된다. 다섯째, 트럼프의 등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으로, 국제관계의 민주화라는 '대외적 민주주의'다.
3. '국민주권'과 민주주의,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국민주권이라고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국민이 '직접통치'를 하지는 않는다. 국민이 자신들의 대표자를 뽑고 이들이 통치하는 '대의민주주의', '간접민주주의'가 현대정치의 기본이다. 이에 대해 장 자크 루소는 "투표할 때만 주인이 되고 선거가 끝나면 다시 노예가 되는 제도"라고 비판했다. 마르크스도 대의제에 대해 "3년이나 6년에 한 번씩 지배계급의 구성원 중 누가 의회를 통해 인민을 호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제도라고 비판했다.
특히 문제는, 윤석열이 보여줬고 트럼프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많은 경우 현대 대의민주주의가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위임민주주의란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선출되지만, 선출되고 나면 모든 권력이 자신에게 '위임'된 것으로 착각하고 '독재'로 향해가는 것을 말한다. 박근혜 탄핵, 윤석열 탄핵은 우리의 대의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반증이다.
이에 따라 주목받고 있는 것이 '국민주권'과 '직접민주주의'다. 여기저기서 국민주권과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궁극적인 예는 이재명 정부다. 이재명 정부는 노무현 정부 이후 사라진 정부명칭을 부활시켜 자신들의 정부 명칭을 '국민주권정부'라고 결정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AI기술에 기반한 직접민주주의'를 천명했다.
나 역시 한국 대의제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생각할 때, 그리고 '일반론적'으로는, 국민주권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해서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2017년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다양한 직접민주주의의 도입과 확대를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중요한 과오를 저지른 공직자에 대한 국민소환제 대상 확대, 시민들이 직접 안건을 발의하고 투표로 결정하는 시민발안제 확대, 브라질 포트 알레그로시의 실험처럼 정부 예산 심의에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주민참여예산제 도입 등을 주장했다.
"진리는 정세의 효과다." 프랑스의 '좌파' 철학자 에티엔 발라바르의 주장이다.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의 효율성은 절대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 맥락과 정세에 의해 규정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 나는 현 정세, 구체적으로 '지구적 포퓰리즘의 시대'에는 직접민주주의가 '득보다 위험이 더 큰,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확대해야 할 대안인가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나치즘과 파시즘,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뿌리가 된 것은 히틀러 유겐트와 '검은 셔츠단'과 같은 '직접민주주의'였다.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박정희가 유신 체제를 정당화한 것은 국민투표라는 직접민주주의 기제를 통해서였다. 다시 말해, 직접민주주의는 득과 위험이 공존하는 양날의 칼이다. 이중 어느 것이 지배적으로 되느냐는 우리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정세에 크게 죄우된다.
최근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대두되고 있는 (극우)포퓰리즘은 대의제에 대한 불신에 기초해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과 직접 행동(직접민주주의)을 특징으로 한다. 그 극적인 예가 2020년 트럼프의 대선패배 후 일어났던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의회 공격과 (실패한) 궁정 쿠데타다.
윤석열 퇴진의 밑거름이 된 것은 '빛의 혁명'이라는 위대한 직접민주주의 투쟁이다. 하지만 태극기부대, 나아가 윤석열 구속영장 발부에 항의한 극우지지층의 '서울서부지방법원 점거폭동'도 직접민주주의다. 이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직접민주주의는 '선'이고, 극우 등 '적대세력'의 직접민주주의는 '악'이다"라는 이중잣대를 적용할 수는 없다.
공론장이 붕괴하고 사회연결망서비스(SNS)와 가짜뉴스, 팬덤정치가 지배하는 시대의 '직접민주주의'는 과거의 직접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오랫동안 한국과 세계정치를 분석해 온 한 기자의 관찰이 핵심을 찌르고 있다. "직접민주주의론이 플랫폼 기반 '팬덤 비즈니스'의 외양을 꾸미는 장치로 세계적으로 번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살은 포퓰리즘이다. SNS로 대중을 직접 선동해 독보적 정치 브랜드를 구축한 도널드 트럼프가 대표주자다."(2025. 10. 3 <프레시안> 임경구)
우리는 직접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와 가치를 공격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democracy)란 'demos(인민)'와 'cratos(지배)'의 합성어로, '다수의 지배', '인민의 지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인민 대 민주주의의 대립(People vs Democracy)'이란 그 자체가 언어모순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나라에서 그것이 현실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다수의 지배'를 의미하지만, SNS와 포퓰리즘에 의해 '다수 인민'이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공격하고 있다(Mounck, 2018).
이 같은 우려 때문에, 나는 현 정세에서 직접민주주의의 확대보다 중요한 것은, '고장 난 대의민주주의'를 발본적으로 혁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국민주권을 강화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인구 절반의 주권이 버려지고 있는 '구조적 사표'를 줄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 정치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다수결주의'와 '승자독식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한국 정치는 선거 때마다 패배한 49% 국민의 주권은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사표 정치'다. 이재명 정부가 '국민주권정부'를 자칭하고 있지만 이 대통령의 득표율이 49.42%인 것을 생각하면 '소수 국민주권정부'에 불과하며 김문수와 이준석을 찍은 49.59%,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은 0.98% 등 과반이 넘는 투표자(50.58%)의 주권은 버려졌다. 이제 이 같은 사표정치를 넘어서 모든 국민의 주권이 존중받는 '합의민주주의'(Lijphart, 2012)로 나아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과 같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전면화하고 위성정당을 금지해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의 주권이 버려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본은 모든 사람이 한 표를 행사하는 보통선거제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모든 주권, 모든 표가 같은 가치를 갖는다는 '주권의 등가성', '표의 등가성'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 이와 관련, 헌법재판소는 농촌을 배려해 작은 인구에도 국회의원 1명을 배출하게 하는 도시와 농촌의 인구격차가 2배 이상 벌어지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한 바 있다.
이 같은 판결에도 불구하고, (진보)소수정당에 투표하는 유권자들의 주권은 사실상 버려지고 있다. 준연동제 도입 이전인 2012년 총선을 기준으로 거대양당은 득표에 비해 1.2배의 의석수를 차지한 반면, 정의당 등 소수정당들은 11.4% 득표에 3.8% 의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이를 계산해 보면, 소수정당 지지자의 주권과 표는 거대정당 지지자에 비해 4분의 1 이하로 평가받았다.
이 같은 문제점을 바로 잡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은 정의당과 보수정당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패스트트랙까지 동원해 의석수를 득표율에 연동하게 만드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반쯤 흉내 낸 '준연동형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보수정당이 (그토록 싫어하는 북한을 흉내 내서) 위성정당을 만들자, 민주당이 이를 따라갔다. 한국 정치가 북한을 닮아가니, 이런 희극이 없다. 그 결과로, 거대정당 지지자의 표와 소수정당 지지자의 표의 가치의 격차는 8배로 더욱 벌어졌다. 소수정당 지지자들은 거대정당 지지자들의 4분의 1의 주권밖에 갖지 못한 '2등 국민'에서 준연동제 덕분에 오히려 8분의 1밖에 주권을 갖지 못한 '3등 국민'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사표를 없애자는 취지로 도입한 준연동제가 거대정당들의 탐욕과 꼼수로 오히려 사표를 강화하고 소수자들의 주권을 더욱 억압하는 희극으로 귀결되고 만 것이다. 주2)
이를 바로잡는 것이 국민주권을 바로잡는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논쟁적이지만, 합의민주주의로 갈 수 있도록 내각제로 나가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내란정당'으로 '해산의 대상'이지 '권력을 나눌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정적으로는, 나도 같은 생각이다. 특히 그들이 헌법재판을 통해 과거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킨 전력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그 지지층이다. 국민의힘을 없앤다고 지지층이 없어지지 않는다. 국민의힘 해산은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겠지만, 오히려 국민의힘을 '순교자'로 만들고 지지층을 결속시킬 것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보수지지층, 극우세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킬링필드로 보낼 것인가?
이 같은 합의민주주의로 나갈 경우, 국민의힘과 극우세력의 발목잡기로 제대로 된 개혁이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자유주의' 세력이 집권해 두 발 앞으로 나가다가, 5년이나 10년 뒤 정권을 내주고 나면 다시 두 발 뒤로 후퇴하는 '갈지(之자) 정치'의 혼란은 이제 끝내야 한다. 극단적인 예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실을 청와대와 용산로 옮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역사교과서도 5년마다 바꿔야 하는가? 이 같은 '지그재그 정치'보다는 더디더라도 합의에 의해 지속적으로 반발씩 나아가는 것이 낫다.
그람시가 잘 지적했듯이 국가란 '기본 집단과 피지배 집단의 이익 간의 불안정한 평형상태를 형성하고 대체하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신좌파 국가론의 대가 플란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가는 '사회세력 간의 힘의 관계의 응집'(Poulantzas, 1972) 이다. 결국 문제는 힘의 관계이고, 국가 정책은 사회적 힘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핵심은 이 힘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정치의 존재 이유, 정치의 핵심적 기능이 '사회적 갈등의 평화적 조정'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승자독식을 한다고, 승자독식에 의해 승리한 정치세력이 권력을 독점한다고, 그 밑에 있는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SNS와 가짜뉴스에 의해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적 적대감이 위험수위에 달해 사실상 '내전 상태가 일상화'된 현실을 조금이라고 완화하기 위해서는 합의민주주의로 가야 한다.
결선투표제에 대해 한마디 하겠다. 결선투표제는 투표자의 과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소수파 대통령'이라는 고질적인 문제, 제3 후보 지지에 대한 사표 우려 문제 등의 해결을 도울 수 있는 '전향적 제도'다. 하지만 대통령제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결선투표에서 패배한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의 주권과 표가 버려지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직접민주주의의 '변형'인 '당원민주주의'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흔히들 당원민주주의는 당의 주요 결정을 일반 당원들이 주도한다는 의미에서 '정당의 직접민주주의'이며 '정당민주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나라 정당이 기본적으로 당원 중심의 '당원 정당'이 아니라 '지지자 정당'이라는 사실이다.
2025년 대선을 기준으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에 투표한 지지자들은 각각 1728만 명과 1439만 명이다. 하지만 주요 정책에 발언권을 가진 권리당원 수는 이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2025년 8월 임시 전국당원대회를 기준으로 더불어민주당의 당원은 111만 명이다. 당원민주주의를 강화한다는 것은 '조용한 다수'인 일반 지지자(1600만 명)들을 당의 주요 결정과정에서 배제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원민주주의는 사실은 다수의 지지자들을 무력화시키고 당원, 특히 소수 극렬 당원들의 권리만 강화하는 '극렬 당원 독재'라는 정당민주주의의 후퇴다. 당이 당비를 내는 권리당원들이 중심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일반 지지자들도 투표를 통해 지지 정당이 국고보조금을 받도록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당비를 내고 있다. 나는 당원들의 발언권만 보장하고 지지자들의 의견은 경시하는 정당은 당비로만 운영하도록 국고보조금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지배하는 제도'다. 하지만 현대 정치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가 지배한다는 것이 많은 정치학자들의 분석이다. 그렇게 되는 중요한 이유는 NRA(미국총기협회)와 같은 강력한 소수 조직이 로비 등을 통해 정책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무임승차자(free rider)'다. 인원이 많은 집단일수록 자신의 참여가 운동의 승패를 좌우할 확률이 낮기 때문에, 대다수는 운동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운동이 성공하면 혜택만 누리는 무임승차를 하려 한다(Olson, 1965). 반면에 총기회사 등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생존이 총기 정책에 걸려 있기 때문에 사생결단으로 로비에 달려든다. 그 결과 소수가 현대정치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태극기부대', '개딸' 등 한국 정치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팬덤 정치도 바로 이 무임승차자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한국의 정당민주주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수 당원, 일반 지지자들, 일반 국민의 의견이 주요 정당과 정치를 좌우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태극기부대', '개딸' 같은 소수 극렬 세력이 정당정치와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들은 당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만, 다수 일반 지지자는 시간, 번거로움 등 그 과정에 적극 참여하는 데에 따르는 비용은 지출하지 않으려는 무임승차자들이다.
특히 SNS의 발달 등으로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당원, 특히 극렬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주목할 것은 민주당 최고위원회 에서 "민주당의 아버지는 이재명 대표"라는 발언이 나올 정도로 정당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점이다. 3김 식 '사당정치'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아니 최소한 3김은 20% 정도의 비주류의 지분을 허용했다면, 민주당의 지난 총선 공천은 100% 친명 공천의 사당화였다.
그뿐 아니라 당원중심주의는 강경 당원들이 정치를 주도함으로써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가져오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당 대표에 강경파가 당선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국민의힘은 '도로내란당'으로 회귀하고 있다. 이제 분열의 정치, '내전의 정치'가 일상화되고 있다. 이제 이념, 지역, 세대, 젠더 갈등의 분열의 정치를 넘어 통합을 위한 합의민주주의로 나가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현 국면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포퓰리즘의 소수 극렬 지지자들의 '팬덤 정치'가 '직접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칭송되는 것이다. 현 국면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다수 일반 지지자들을 무력화시키는 소수 극렬 당원들의 '정당 독재'를 '당원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장려하는 것이다.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해 한 마디만 추가하고자 한다. 민주주의를 측정하는 데 가장 오래된 권위 있는 기관은 보수적이지만 미국의 '프리덤하우스'다. 최근 측정 방법을 변경했지만, 변경 전을 기준으로 보면, (소위 '민주정부'라는) '자유주의정부'였던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1등급이 아니라 1.5 등급이었다. 정치적 자유는 1등급이지만, 시민적 권리가 2등급이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이 문제였다(공산당을 합법화한 대만은 1등급이다). 세계 정치학자들이 합의한 기준으로 보더라도(O’Donnell & Schmitter, 1986), 한국은 "특정한 정당이나 이념을 금지하면 안 된다"는 기준에 미달하기 때문에 아직도 '제한적 정치적 민주주의(limited political democracy)'에 머물러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입법부와 행정부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만큼, 이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민주주의는 결코 단순한 '정치적 민주주의'가 아니다. 정치적 민주주의 이외에도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작업장 민주주의, 일상성의 민주주의, 대외적 민주주의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때, 우리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나머지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간단히 핵심만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1997년 'IMF 경제위기'로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가 전면화하면서 비정규직이 일상화된 우리 사회의 사회적 양극화는 새로운 차원으로 악화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통해 이에 대한 개선을 시도했지만, 이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부동산 정책 실패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며 (소득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자산 불평등은 더욱 심화됐다. 청년남성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극우화 추세'도 이 같은 양극화에 따른 절망감(N포 세대)에 그 뿌리가 있다. 최근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한 '캄보디아의 비극'도 다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공생의 경제체제'와 사회경제 민주화를 실행하지 않는 한, 탈출구를 잃은 청년들은 서울서부지방법원으로, 캄보디아로 몰려갈 것이다.
'국민주권은 공장 문 앞에 가면 멈춘다.' 산업민주주의, 작업장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북구 등 유럽과 달리, 우리의 공장과 기업은 아직도 마르크스가 '공장 전제정(factory despotism)'이라고 비판한 '자본가 주권의 왕국', '주주 주권의 왕국'에 머물러 있다. 끊이지 않는 상식 이하의 자본가 갑질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최소한 김대중, 문재인 정부가 공약했던 '노동자 경영 참여'를 제도화하고 주주의 이익만 최우선시하는 미국식의 '주주자본주의'에서 주주만이 아니라 노동자, 소비자, 하청업자, 커뮤니티 등을 모두 고려하는 '이해당사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로 나가야 한다(Hirota, 2015)
일상성의 민주주의도 중요한 주제지만, 이글에서는 다음 장의 '종교민주화'가 이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논의로 대신하려고 한다. '돈로주의'. 전함외교로 유명한 '몬로주의'에 도널드 트럼프를 합성해 생긴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으로 가뜩이나 불평등한 국제질서가 더욱 강대국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트럼프의 관세 폭풍에 세계 패권을 둘러싼 미·중 패권 전쟁까지 겹쳐, 어느 때보다 국제정치의 풍랑에 흔들리고 있다.
대외적 민주주의라는 면에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박정희의 '수출입국'을 시작으로 계속 강화되어 온 '대외의존적 경제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두 번째는 장기적으로 '한반도 영구중립국화'를 목표로 하면서('자주국방'을 이야기하지만, 통일을 한다면, 중국과 러시아를 국경에 마주하면서 과연 자주국방이 가능하겠는가?), 주한미군 기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한미방위조약을 '대중국전쟁'에까지 확대하여 중국·대만 갈등에 한국군을 끌어들이려는 미국의 시도를 막아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한미군을 이유로 방위비 분담금을 늘리려는 미국의 압박을 저지해야 한다. "주한미군이 북한만이 아니라 대중국기지"라는 미국의 주요지휘관들의 공개발언을 부각시켜 오히려 "기지 사용료를 내라"고 압박해야 한다.
합의민주주의로의 변화 등은 개헌이 필요하다. 이제 87년 헌법 개헌을 통해 불완전한 민주화체제인 87년 헌정체제를 넘어서야 한다(이에 대해서는 이도흠 등 2025 <서울지역 개헌입법운동본부 토론회 자료집> 참조).
개헌과 관련해, 한 마디만 첨가하겠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국민주권, 인민주권, 시민주권을 넘어서는 것이다. 위의 개념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에콰도르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헌법에 자연이 갖는 절대적 권리인 '자연주권'을 명문화했다. 볼리비아도 자연이 존재하고 생존할 권리, 자연이 인간의 변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진화하고 생명순환을 지속할 수 있는 권리, 평형을 유지할 권리 등을 명문화했다. 우리도 심각한 지구 생태 위기와 관련해 그 같은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4. '종교 민주화'에 대하여
흔히 '종교는 사회의 소금'이라고 한다. 정신적 타락, 영혼의 타락으로부터 인류를 지켜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권력과 자본에 대한 견제의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불교를 비롯한 우리의 종교가 그 같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회의가 든다. 종교가 오히려 정치권력과 돈에 눈이 멀고 길든 것이 아닌가 싶다.
긴말이 필요 없이, '정치 승려'의 비판을 받아왔고 '조계종 개혁'을 주장해 온 명진스님을 제명하는 폭거를 저지르다가 스스로 삶을 마감한 자승, 극우적 정치 행보와 보상금을 극대화하기 위한 '알박기'도 서슴지 않았던 전광훈 목사 등을 생각하면 충분할 것이다.
또 하나 짚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우리 사회 민주화에 크게 기여 해 온 종교단체에 소속된 한 성직자가 '윤석열이 탄 대통령 전용기가 추락하기를 기원하며 국민이 이 염원에 함께 하기를' 공개적으로 호소했다. 아무리 윤석열이 잘못한 것이 많고 밉다고 하더라고, 성직자가 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미쳐 돌아가고 있는 '광기의 사회'라는 증거다. 이것은 히틀러에 생명을 걸고 저항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나는 '무신론자'고 종교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 한다. 따라서 종교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다. 다만 정치학자로서, 오늘의 주제인 민주주의와 관련해, '종교민주화', '불교민주화'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몇 가지 방향과 화두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불교민주화는 몇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불교와 사회의 관계다. 즉 불교가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1970년대부터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가톨릭, 기독교 등에 비해 불교는 1985년 민중불교운동연합이 창립되는 등 1980년대 들어 민주화운동에 '뒤늦게' 뛰어들었고 민주화 운동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이 같은 차이는 외국에서 '수입'되어 국제연대가 강해 탄압이 어려웠던 가톨릭, 기독교의 특성 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이라도 불교는 '관음의 정신', '중생이 아프면 부처가 아프다'는 정신에 기초해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다음은 불교 내부의 민주화다. 이는 몇 가지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중앙과 지방, 중앙과 말사 관계의 민주화다. 우선 조계종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총무원장 선출 방법을 직선제로 바꾸어야 한다. 한 불교 언론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계종 종도 10명 중 8명이 총무원장 직선제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아직도 실시되지 않고 있다(<불교닷컴>. 2025년 3월18일).
또 다른 예로, 몇 년 전 쟁점이 된 정청래 의원의 '봉이 김선달' 발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국립공원에 위치한 사찰이 징수해 온 통행료에 대한 정 의원의 문제제기에 불교계가 반발하자 정 의원 발의로 문화재보호법을 개정해 국가가 통행료를 보전해 주도록 입법화했다. 이 같은 조치로 2024년에 506억 원의 관람료감면지원금 등 1526억 원이 지원됐다. 문제는 이 국고 지원이 중앙으로 주어진다면, 과거 통행료를 받던 사찰들은 중앙으로부터 이를 배정받아야 하기 때문에 권력이 중앙으로 더욱 집중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를 바로잡을 정책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사찰·주지와 일반승려 관계의 민주화다. 세 번째는 사찰과 신도 관계의 민주화다. 사찰의 운영에 관련된 주요 결정에 있어서 주지만이 아니라 일반승려, 신도의 목소리가 잘 반영될 수 있도록 결정 과정(사찰운영위원회)을 민주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계종은 1994년 사찰운영위원회법을 제정해 각 사찰은 사찰운영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도록 명문화했으나, 사찰운영위원회가 민주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 같은 제도적 개혁과는 별개로, 조계종의 과거 잘못에 대한 참회와 '과거청산'이 필요하다. 그 한 예가 조계종 개혁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종교인에게 최고형인 제명을 당한 명진스님이다. 2025년 6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명진스님에 대한 조계종의 제명이 무효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을 존중해, 조계종은 명진스님에 대한 복권과 명예회복 등에 적극 나서야 한다. 명진스님은 한 예일 뿐이고, 비슷한 사례들을 조사해 과거청산을 해야 한다.
주1) 이 책의 제목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에 대해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한 연구지는 이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제목만 보고 "손호철이 박근혜 탄핵 촛불항쟁을 '촛불혁명'이라고 과대평가했다"고 비판했다. 나는 그렇게 주장한 적이 없다. 나는 촛불항쟁 중 쓴 이 책을 통해 촛불항쟁을 단순한 박근혜 탄핵을 넘어서 박정희 체제, 87년(불완전한 민주화) 체제, 97년(신자유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촛불혁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박근혜퇴진촛불항쟁이 촛불혁명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를 촛불혁명으로 만들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항쟁은 지도부의 한계 등으로 촛불혁명으로 발전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윤석열 정부를 탄생시켰다.
주 2) 이와 관련, 2024년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가 패배한 것을 심상정 정의당 후보 탓으로 돌리는 민주당 지지자들의 비판을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민주당은 박근혜 탄핵을 정의당 등 진보정당들이 같이 싸워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촛불연정'을 하지 않고 승자독식주의로 나아갔다. 준연동제도 정의당과 손잡고 패스트트랙까지 동원해 공수처법안과 함께 통과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위성정당을 만들어 뒤통수를 쳤다. 2024년 대선도 이재명 후보가 위성정당 등에 대해 사과하고 정식으로 선거연합을 제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선패배를 심 후보 탓으로 모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2025년 대선도 김문수 표와 이준석 표를 합치면 이재명 대통령 표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 대통령은 이준석 때문에 당선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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