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분별하기 힘든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실임을 증명해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선함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선함만으로 사회적 정의가 성취될 순 없다. 변혁해야 할 사회적 과제 앞에서 선함은 때로 나약함으로, 비겁함과 무기력함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반면 선함은 정의를 성취하려는 근본적 원인이다. 정의가 이뤄진 세상은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게 선할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이 정의를 갈망하게 한다. 결국 정의를 성취함에 있어 선함은 중요한 원동력이다. 반면 선함은 정의를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적어도 엘파바(신시아 에리보)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녀는 동물을 억압하는 오즈의 마법사에 대항하기 위해 중력을 거슬러 오르며(defying gravity) 스스로를 사악한 자로 표명했다. 그녀가 택한 투쟁의 방법은 철저히 낯선 타자로서 체제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었다. 오즈 안에서 그녀는 소수자였고, 힘이 없었다.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처럼 체제 안에서 선함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그녀가 원하는 사회를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에게 선함은 타협이었고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신화적 힘을 빌려 오지안(오즈 시민들)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 그녀를 사악하게 만드는 신화는 결국 그녀의 존재를 훼손시킨다. 그럼에도 그녀가 사악함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소수자로서 그것만이 유일하게 절대 권력에 맞설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엘파바의 선택과 행동은 과연 합당하다 말할 수 있을까? <악마를 보았다>(2010)에서 수현(이병헌)은 약혼녀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 악마가 되었다. 모든 복수를 완성하고 떠나는 그의 표정에 깃든 감정은 고통이었다. 스스로 악마가 되어 현실을 변화시킨다 하더라도, 심지어 변화한 현실이 그토록 바라던 유토피아일지라도, 악마가 된 자는 절대 그 모든 결과를 누릴 수 없음을 <악마를 보았다>는 증명해 보였다. <위키드: 포 굿>(2025, 이하 <포 굿>)은 수현이 밟은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 엘파바와 글린다를 통해서 악함과 선함의 관계를 재탐색한다. 악함으로 이루는 선함이란 과연 가능할까? 사악함이 추구하는 선함은 이전의 선함과 무엇이 같고 다를까? 우리가 선함이라 여기는 것들은 진정으로 선한 것일까? 만약 아니라면 무엇을 우리는 선함이라 정의할 수 있는가?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선 우선 '위키드'가 부제로 내건 '포 굿'의 의미부터 살펴 봐야 한다.
'포 굿'은 엘파바와 글린다가 뮤지컬의 2막 끝에 부르는 곡 제목이다. 학창시절 친구였던 두 사람은 피예로(조나단 베일리)를 사이에 두고 갈등을 빚다 종국에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며 '포 굿'을 부른다. 서로의 중력이 운명처럼 이끌었고 그 만남으로 인해 서로가 성장할 수 있었음을 노래하며 엘파바와 글린다는 다시 만날 수 없는 각자의 운명을 위로하고 지지한다. 'for good'이 'forever'(영원히), 'for the better'(더 나은 쪽으로),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함축하고 있음을 떠올린다면 엘파바와 글린다는 노래를 통해 서로의 만남으로 인한 변화가 더 나은 쪽으로, 영원히 이뤄진 것임을 인정한다고 볼 수 있다. 1막에선 서로 매 순간 함께 했던 두 사람이 2막에선 각자의 시간성 안에서 세계와 갈등을 맺고 궁극의 변화를 맞이한다. 2막의 변화는 1막에서의 만남과 함께 한 시간들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각자는 끊임없이 돌아본다. '나의 선함이 인정욕구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글린다는 마법 능력이 없는 자신의 한계를 감추기 위해 화려함으로 스스로를 가장했다. 마법의 지팡이를 휘둘러도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던 어린 시절, 그녀의 어머니는 '모두의 사랑을 받는게 마술의 힘을 갖는 것 보다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어머니의 조언은 글린다를 지탱한 힘이었고 그녀는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 '선함'의 가면을 쓴다. '굿 뉴스'만을 전달해야 하는 글린다에게 선함은 자신이 갖지 못한 마술의 힘을 대신하는 무기였다. 선함을 통해서 대중으로부터 인정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녀를 더욱 선함이라는 감옥에 얽어 맨다. 돌이켜 보면 원작 뮤지컬에서도, 전작인 <위키드>에서도, 글린다의 태도는 애매모호했다. 화려함과 대중의 주목을 유지하기 위해서 손쉽게 타인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이기심, 엘파바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고 그녀의 행동을 지지하는 정의로움이 글린다 캐릭터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포 굿>은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글린다에게 새로운 넘버인 'The Girl in the Bubble'을 선사한다. 자신의 선함이 거품 안에 박제된 채 모두의 사랑을 갈구하기 위한 도구였음을 인정하며 이제는 거품을 깨겠다는 글린다의 의지를 <포 굿>은 지지한다.
글린다의 선함이 인정욕구로 인한 가면이라면 엘파바의 사악함은 자신이 받은 상처로부터 기인한다. 엘파바는 사악함이 체제에 위협을 가하고 이로서 체제가 변화될 수 있을거라 희망했다. 희망 속에 담긴 선함은 오즈를 떠나려는 동물들을 설득하는 행동으로, 억압받는 자들을 구원하려는 희생정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선함을 품은 사악함은 끝내 악마화 되고 주변인들까지 고통으로 몰아 넣는다. 피예로가 잡혀가자 그녀는 마법책을 펼치고 'No Good Deed'를 부르며 마법을 건다. 이 곡을 통해서 그녀는 자신의 선행이 재앙이 되었고 최선은 저주가 되었음을 한탄한다. 그리고 모든 선함이 관심을 끌어 보려는 연극은 아니었는지 자문한다. 엘파바의 질문은 사악함이 자신이 겪은 상처들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자각하는 순간이자, 사악함만으로 체제의 악함을 맞설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그녀가 선택한 사악함 속엔 상처를 준 체제로부터 인정(또는 위로와 사과)을 받으려는 마음도 뒤섞여 있다. 상처 받은 자가 상처 준 자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 문제는 그 요구를 악마화 하고 터부시하는 체제 시스템에 있다. 엘파바는 'No Good Deed'를 부르며 이 사실을 깨닫고 절규한다.
결론적으로 선함을 성취하기 위해 사악해지길 선택했던 엘파바는 모든 가능성이 차단당한 채 스스로가 희생되길 선택한다. 또 다른 이들의 희생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반면 글린다는 안전한 자기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했던 선함을 포기하고 엘파바가 취했던 저항과 반항으로 궁극적인 체제 변혁을 이뤄낸다. 엘파바와 글린다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서로의 위치다. 체제 밖에서 투쟁하던 자는 비극을 맞이하고 체제 안에서 투쟁한 자는 생각보다 손쉽게 체제를 전복한다. 대신 엘파바는 사랑하는 자를 얻고 글린다는 제국을 얻는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진심으로 사랑받길 원했던 엘파바와 모두의 사랑을 원했던 글린다는 결국 서로가 원하는 바를 성취한 셈이다. 지극히 관습적인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겠지만 <포 굿>의 목표는 엔딩에 있지 않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이뤄낸 성장이야 말로 <포 굿>이 추구한 목표다.
그들은 운명처럼 만나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영원하면서도 더 나은 쪽으로의 변화를 이뤄냈다. '포 굿'은 이를 선함(good)이라 말한다. '포 굿'이 노래하는 선함은 관계 안에서만 성취할 수 있는 결과물이다. 선한 행동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도, 사악함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오직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받으며 관계 안에서 서로를 성찰 할 때에야 비로소 <포 굿>이 강조하는 선함은 발견될 수 있다. 사악함을 통해 체제 밖에서 변혁을 꾀했던 알파바에게 선함은 절대 잃어서는 안되는 초심에 가깝다. 의도와 상관없이 사악함은 오해를 낳고 사랑하는 자들을 비극으로 몰아 넣어 버렸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쉽게 단죄할 수 없다. 원하는 삶을 성취 하기 위해 알파바는 온 삶을 다 바쳐 투쟁했다. 그 과정에서 절대 잃어서는 안되는 선함을 간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석양이 부서져 내리는 초원에서 따뜻한 피크닉을 즐긴 순간을 알파바가 거듭 되새긴 것은 그 순간에 느낀 선함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글린다는 이 초심을 심어준 자였고, 알파바 내면에 이미 선함이 존재해 있음을 깨닫도록 도왔다. 엘파바가 간절히 성취하려 했던 선함은 글린다 없이는 존재 불가능하다.
글린다에게 선함은 부족함을 위장할 수 있는 도구였다. 피예로가 엘파바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할 때도 글린다는 여러 핑계를 대며 거품 밖으로 나가길 거부했다. 한계를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글린다는 그 용기를 알파바로부터 배운다. 알파바가 중력을 거슬러 올라 사악한 자가 되겠다고 다짐하던 순간에도 글린다는 그녀를 '과대망상'(delusion of grandeur)에 빠져 있다고 붙잡았다. 하지만 알파바가 하늘로 솟구쳐 오를 때 글린다는 용기가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비록 사악함이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신념을 이루기 위해 용기를 거두지 않았던 알파바의 선함은 글린다의 선함을 변화시킨다. 글린다는 마담 모리블이 대중 앞에서 웃기나 하라며 밀친 순간 알파바의 거짓 정보 전단지 더미 위로 쓰러지며 자신이 바라던 현실이 알파바의 악마화 위에서 쌓아 올린 거품임을 깨닫는다. 거품 밖으로 나가겠다는 'The Girl in the Bubble'의 고백은 자신과 달리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알파바가 어떤 위험을 감수했는지 깨달음으로서 가능할 수 있었다. 알파바가 사악함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글린다가 그토록 바라듯이 적당히 오즈의 마법사와 타협하고 자신과 함께 체제 안에서 변화를 이루기로 알파바가 결정했다면, 그들에게 선함은 체제의 이데올로기로 뒤덮인 거품 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한치도 타협하지 않으려 했던 알파바의 사악함이야 말로 글린다의 거품을 터트린 원동력이다.
두 사람이 품었던 선함은 각자의 사정 안에서 완전할 수 없었다. 선함이란 그런 것이다. 선함 그 자체만으로는 그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다. 악함에 쉽게 짖밟히고, 억울함과 분노에 뿌리뽑히고,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 속에서 매번 의심 받아야 하는게 바로 선함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선함은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꿈꾸는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포 굿>은 선함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정과 사랑, 서로에 대한 의심없는 신뢰임을 강조한다. 남자를 사이에 두고 싸울지언정, 한 명은 착함의 대명사로, 한 명은 악함의 대명서로, 절대 만날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존재일지언정, 알파바와 글린다가 나눈 관계를 통해서만 진정한 선함은 성취될 수 있다.
모든 사건이 종결된 순간, <포 굿>은 마치 선물처럼 원작에는 없던 영화적 순간을 선사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즈 밖 광야로 나가는 알파바, 오즈 안에서 정의를 성취한 글린다,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두 사람을 <포 굿>은 편집의 힘으로 연결 시키며 다시 한 번 '포 굿'을 노래하게 한다. 영원히,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된, 앞으로도 변화되어갈 그녀들을 향한 영화적 응원의 메시지가 현실 속에서 선함을 잃은 채 매말라 버린 모두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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