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대성동고분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신경철 부산대 명예교수는 10일 김해문화원 '김해역사문화학술대회'에서 이같이 피력했다.
신 교수는 "김해 대성동고분군 없이는 가야사 자체를 논할 수 없다"며 "대성동고분군에서 금관(?)가야가 왕성한 대외 교역·교류를 행하면서 발전해 나갔음을 말해 주는 각종의 귀중한 유물이 출토됐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또 "금관(?)가야의 교역·교류는 천편일률적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출현이 바로 가야의 출발이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신 교수는 "3세기말의 대변혁이라 일컬어지는 대성동고분군의 출현이다"면서 "이는 중국동북지역 특정주민의 김해로의 이주에 기인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대내적으로는 3세기말 김해에서 창안된 도질토기가 영남 전역으로 확산하는 점"이라며 "이는 3세기말에 김해에 이주한 새로운 지배집단에 의해 건설된 사회가 매우 안정적으로 정착하였음과 동시에 그들의 영향력을 영남전역으로 확대하였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금관(?)가야가 영남전역을 아우르는 강력한 단일 정치체로의 출발을 보여주는 가장 가시적인 신호이다"고 하는 신경철 교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일본열도 중심부와 중국 동북지방의 전연(前燕)과의 교역을 본격적으로 행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4세기 전엽 금관(?)가야의 이러한 대내외적인 일들은 금관(?)가야의 자신감의 표현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며 "이때부터 금관(?)가야가 한반도남부(범(凡)영남)에서만이 아니라 동아세아의 중핵으로 부상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금관(?)가야는 후대의 명칭이며 원래의 국명은 ‘가라’였다"고 하면서 "금관(?)가야의 중심세력의 영남각지로의 이주로 가야는 여러 정치체로 분립되는데 이것이 후기가야이다. 측 대성동고분군을 정점으로 하는 가야가 전기가야이다. 전기가야인 금관(?)가야는 강력한 단일정치체인 반면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는 5가야니 6가야니 하는 것은 바로 후기가야를 가리키는 것이다"고 말했다.
신경철 교수는 "김해 대성동고분군에 보이는 교역의 증거들은 때로는 시대를 전환시키거나, 국제사회를 변혁시키거나, 혹은 금관(?)가야가 당시의 동북아세아의 핵(核)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