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4일, 외교부와 한국국제정치학회의 주관으로 '국익 중심 실용외교와 글로벌 책임강국간 정책적 조화'를 주제로 한 정책세미나가 열렸다. 불과 일주일 전 팔레스타인 정부의 요청으로 평화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을 조사했던 필자에게는 암담한 소식이었다. 글로벌 책임을 논한다면서도 가자지구 전쟁은 의제에서 빠져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침부터 세미나에 참석했다. 4시간 동안 12명의 패널이 발표했지만, 그 누구도 팔레스타인을 언급하지 않았다. 더욱 충격적이게도, 세션의 시작부터 트럼프의 관세전쟁과 미·중 갈등이 주요 화두로 자리했고 마지막 세션에 이르러서는 작금의 외교 현실이 "죽느냐 사느냐의 위기 상황"이라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과연 국익과 글로벌 책임의 조화를 논하는 자리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외교부 보도자료에 따르면 "참석자들은 … 글로벌 도전과제 해결에 적극 기여함으로써 글로벌 책임강국으로서의 역할을 확대해 나가기 위한 다양한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 명의 패널이 보건·기후 사업의 효과적 실행 방안을 제시한 게 전부였다. 나머지 발표에서는 어떠한 실질적 방안도 소개되지 않았고, 방향성에 대한 언급조차 드물었다. (관심 있는 독자는 유튜브 영상에서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laDvtTX_gUI)
국익보다 글로벌 책임을 고민하고자 참석한 필자에게 이번 세미나는 탁상공론처럼 느껴졌다. 대체 대한민국이 무슨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단 말인가? 어떤 나라가 이런 주장에 공감하겠는가? 이익을 앞세우고 책임을 외면하려는 변명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국익 중심 외교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모든 나라의 외교 정책은 궁극적으로 국익을 추구한다. 그러나 현 정부는 "글로벌 책임강국"을 외교 목표로 제시했고, 이번 세미나는 그 조화를 논하는 자리였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가 이런 담론을 숙고해 본 적이 없다 보니 양자의 관계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패널들은 '국익과 글로벌 책임이 서로 합치한다', '조화가 가능한 영역도 있다', '양자가 많이 상충된다'는 등 다양한 관점을 내놓았다. 아마 독자들도 정답이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글로벌 책임은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지켜야 할 도덕적·법적 의무다. 반면 국익은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비도덕적 가치다. 따라서 양자는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관계는 아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국익 중심의 외교가 반도덕적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부도덕한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큰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우리 정부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금관을 선물해 환심을 산 것은 관세 협상에서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으나, 동시에 글로벌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국익과 글로벌 책임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국익의 범위를 안보·경제와 같은 전통적 요소에 한정하지 않고 도덕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경우 국제사회에서 반식민주의, 민주주의, 인권 보호 등에 앞장서는 도덕적 외교는 그 자체로 국익을 달성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다른 하나는 도덕을 외교적 자산으로 인식하는 방식이다. 도덕적 행보를 보이는 국가일수록 국제적 위신과 영향력이 강화된다. 즉 도덕은 국익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현 정부가 "글로벌 책임강국"을 외교 목표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도덕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평가가 중요해진다. 가령, 관세 협상 당시 미국의 수백만 민주주의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권위주의에 맞서 "노 킹스(No Kings)"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의 이기적인 태도에 충격을 받았고, 이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어쩌면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 보복적 조치를 옹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구태여 금관을 선물한 까닭은 이 같은 도덕적 리스크를 검토하지 않았거나 중요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외교에서 도덕적 영향력을 경시하면 국익과 책임의 조화가 가능한 영역은 협소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이번 세미나에서 핵심 분야로 논의한 것은 AI, 기후, 보건, 경제안보였는데 누구도 도덕적 잠재력을 분석하지 않았다. 자연히 기술·산업 역량을 개발도상국에 공유하자는 통상적인 개발원조 방침을 재확인하는 것 이상의 시도는 없었다. 심지어 한국의 과소한 원조 규모(39억 달러, GNI 대비 0.21%)를 유엔 목표치(0.7%)나 OECD 평균(0.33%) 수준으로 끌어올려야만 한다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런 추가적인 공헌이 국익에 부합할 거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 Source: OECD 2024년 통계
서구 국가들이 선점하고 주도하는 분야에서 우리가 제한된 자원으로도 큰 성과를 내고 '글로벌 책임강국'으로 인정받게 될지는 회의적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들 분야가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에 핵심적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을 던져야 한다. 국제사회는 정치적 갈등과 인권 문제에 대한 도덕적 결단을 내리는 국가를 우선적으로 존중한다. 우리는 그런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가? 필자는 마지막 세션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글로벌 책임강국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의제를 다루어야 하며, 이는 바로 가자지구 전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심지어 이런 세미나에서조차도 침묵합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1947년 이후 78년 동안 유엔에서 매년 논의되어 온 핵심 의제다. 최근 2년 동안 7만 명 이상이 사망한 가자지구 전쟁은 그 중요성을 더욱 높였다. 같은 시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고, 수단과 미얀마 등지에서도 내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나, 국제사회가 가장 주목한 곳은 팔레스타인이다. 이는 인도주의적 참상 때문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문제가 애초에 국제 체제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이래 유럽 국가들은 기독교도 거주민의 보호라는 명목으로 무슬림 국가들에 내정 간섭을 시작했고, 점차 보호령, 식민 지배로 발전시켰다. 영국은 개신교도의 보호를 명분으로 삼다가, 19세기부터는 팔레스타인에서 영향력을 키우려고 유대인의 보호자도 자처했다. 이후 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자 유럽 유대인들의 이주를 장려해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고향을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국제연맹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팔레스타인을 강제 통치했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유대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사시에 이라크의 산유지대로 군대를 파견할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2차대전(1939-1945) 중에 독일은 약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미국과 영국은 무전을 감청해 이를 일찌감치 파악했으나, 유대인을 구출하자는 목소리가 나와 전쟁 수행에 방해될 것을 우려해 정보를 은폐했다. 뒤늦게 진실이 알려지자 유대인에 대한 동정이 커지고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학살을 저지른 것도, 이를 방관한 것도 서구 국가들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이들이 유대인에 대한 집단 보상 개념으로 내놓은 방안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만들고 유대인 난민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2차대전을 전후로 독립한 아랍 국가들을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 땅의 56%를 분할해 유대 국가를 만들기로 결의했다. 시온주의자(Zionist)라고 불리는 유대 민족주의자들은 유대인만의 민족 국가를 만들고자 인종청소에 나섰다. 이듬해 5월에 이스라엘이 건국되기까지 200여 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이 파괴되고 25-30만 명의 토착민이 피란길에 올랐으나, 서구 국가들과 유엔은 방관했다. 보다 못한 아랍 국가들이 구원군을 파견해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해 서안과 가자지구를 제외한 78%의 영토를 점령하고, 인종청소를 계속해 400~500개의 마을을 파괴하고, 75만 명을 영구히 난민으로 내몰았다.
이처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국제연맹과 유엔이라는 글로벌 체제를 활용한 서구 국가들의 정치적 개입에서 크게 비롯되었다.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문제는 언제나 글로벌 책임의 화두에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해결하지 못한 까닭은 이스라엘이 서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중동에서 서구의 식민 지배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제공하는 군사적 견제 장치가 사라지면, 중동 국가들은 서구의 패권에 저항할 정치적 블록을 형성할지 모른다.
인권을 외교적 무기로 사용해온 서구 국가들에게 팔레스타인 문제는 그야말로 아킬레스건이었고, 이를 덮기 위한 역사 왜곡이 자행되었다. 가령 팔레스타인은 사람이 살지 않던 땅으로, 아랍인들이 경작하던 비옥한 땅은 유대인들이 사막을 개척한 것으로 선전되었다. 유럽에서 태어나 자라 이곳에서 계속해서 살아가길 원했던 유대인들은 갑자기 2천 년간 유대 국가를 갈망했다고 묘사되었다.
이 같은 역사 왜곡도 이스라엘의 만행이 커지면서 이제는 효력을 상실하고 있다. 1967년에 이스라엘은 서안과 가자지구마저 점령했다. 이후 토지와 물 등의 각종 자원을 수탈하고 고문을 일삼았다. 1998년에 국제앰네스티는 "이스라엘은 지구상에서 고문과 학대가 법으로 허용된 유일한 나라"라고 비판했다.
2012년에 유엔에서 팔레스타인이 국가 지위를 인정받은 이후로도 서안지구의 60% 이상은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고 있다. 이곳에서 400여 개의 식민촌이 건설되었고, 유대인 거주민들이 인근의 팔레스타인 마을을 습격해 폭행하고, 농작물을 불태우고, 약탈하고, 때로는 살인까지 저지른다. 그런데도 팔레스타인 정부는 이들을 처벌할 사법권조차 없다. 2022년에 마이클 린크(Michael Lynk) 유엔 특별보고관은 이스라엘의 정책을 "식민주의"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했다.
진실을 알게 된 국제사회는 서구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이는 도덕적 책무감 때문만은 아니다. 팔레스타인의 독립과 국가 지위를 인정하고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주로 식민 지배를 경험한 약소 국가들로부터 나온다. 미국 등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보복을 당할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식민주의가 없는 정의로운 국제사회를 만드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국익과 글로벌 책임을 조화시킨 외교 정책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 역사만을 문제 삼을 뿐, 팔레스타인의 고통은 외면해왔다. 우리의 이중적인 태도 역시 단순히 도덕성 문제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안보와 경제 중심의 협소한 국익 개념이 만들어낸 사각지대에 가깝다. 미국-이스라엘 동맹에 편승하는 게 국가 안보에 도움이 되리라는 정책적 판단은 오랜 세월 동안 불변의 진리처럼 굳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팔레스타인의 독립 운동은 '이슬람 테러리즘'이라는 원색적 비난으로 덧씌워졌고, 도덕적 판단의 영역에서 배제되었다.
이는 우리가 북한으로부터 생존을 위협받던 시기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 6대 강국으로까지 성장했다. 생존을 운운하며 도덕적 의무를 외면하는 것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으며, 국제사회의 정치적 비난을 피할 수도 없다. 즉, 도덕적 의무를 직시해야만 국익을 지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자지구 전쟁을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스라엘의 동의 없는 팔레스타인의 독립은 평화를 해친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의 국가 지위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설득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채 그저 수십 년을 방관했다. 즉, 서안과 가자지구의 점령 상태 유지와 전쟁의 구조적 원인에 기여한 셈이다. 우리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연평균 수백만 달러의 원조로 도움을 준다고 선전하지만, 뒤에서는 이스라엘에 꾸준히 무기를 판매했고, 심지어 제노사이드 의혹이 제기된 이후에도 거래를 멈추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국석유공사가 100% 지분을 보유한 '다나 페트롤리엄(Dana Petroleum)'이 팔레스타인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있는 가자지구 해역에서 가스전 탐사권을 '이스라엘'로부터 구매했다. 이는 당사자인 팔레스타인 정부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불법 거래다. 만약 이 구역에서 상업적 매장량이 발견될 경우, 한국의 공기업이 가자지구 자원을 약탈하는 식민 체제에 직접적으로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나라가 과연 '글로벌 책임강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한류의 성공에 가려져 있지만, 유엔과 외교가에서 한국은 국제 인권 문제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번 가자지구 전쟁에서 사실상 이스라엘 편에 선 우리 정부의 태도는 대외적 신뢰를 더욱 떨어뜨렸다. 기후 위기나 글로벌 보건 등에서 아무리 기여하더라도, 약소국의 억압과 착취에 동참하는 한 한국을 도덕적으로 존중할 국가는 없다. 현 정부가 진정으로 '글로벌 책임강국'을 지향한다면, 공허한 수사(修辭)는 거두고 국제사회의 현실과 눈높이에 맞는 도덕적 기준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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