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 보령댐 건설과 함께 누군가의 고향은 지도에서 영영 사라졌다. 이웃들과 정을 나누던 앞마당도, 발을 담그던 시냇가도 이제는 차가운 물속에 잠겨 닿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그 수면 아래 묻어두었던 아릿한 기억을 붓끝으로 건져 올린 이가 있다.
충남 보령문화의전당 기획전시관에서는 지난 19일부터 이동희 아마추어 작가의 개인전 ‘기억의 수면 위에서(Above the Surface of Memory)’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보령댐 조성으로 수몰된 고향, 미산면 용수리에 대한 작가의 절절한 그리움과 그 시간을 견뎌온 생의 흔적 등을 담아낸 자리다.
이동희 작가에게 그림은 단순한 예술 행위를 넘어선 ‘기록’이자 ‘치유’다. 아홉 살 소년 시절, 부러진 나뭇가지를 붓 삼아 흙바닥에 구름을 그리던 아이는 이제 예순을 훌쩍 넘긴 노년의 작가가 되어 다시 캔버스 앞에 섰다.
작가는 "보령댐이 생기면서 많은 분이 수돗물을 편하게 먹고 있지만, 그 밑에 고향을 묻은 이들에게는 가물가물한 기억 자체가 아픔이자 삶이다"라며 "고향의 시냇물, 하늘, 그 속에 있던 돌 같은 형상물들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정을 추상화로 표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전시된 작품들은 선명한 구상화보다는 모호하고 몽환적인 추상의 형태를 띤다. 이는 시간이 흘러 희미해진 고향의 풍경을 반영함과 동시에, 관객들이 각자의 잃어버린 기억을 투영할 수 있도록 의도된 설정이다.
작가의 고백처럼 그의 작업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추상화라는 장르를 통해 보이지 않는 기억의 실체를 구현하는 것은 '애를 먹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으나, 임립 선생을 만나 예술의 본질을 깨달으며 비로소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전시 기획 관계자는 "이 작가의 작품은 세련된 기교보다는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난 진정성이 돋보인다"며 "수몰 지역민들의 상실감을 예술적 승화로 연결했다는 점에서 지역 사회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고 평했다.
이동희 작가는 작가노트를 통해 "예술이란 혼자 쌓는 모래성이나 아니라 가르침과 깨달음의 길임을 알게 됐다"며 "그림을 그리며 사는 지금의 삶이 곧 나의 행복이자 예술이다"라고 전했다.
고향을 잃은 슬픔을 기억의 수면 위로 끌어올려 따뜻한 위로로 변모시킨 이번 전시는 오는 12월23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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