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사복민주항쟁에 대한 황인오 사북민주항쟁동지회장의 글을 두 차례에 걸쳐 나눠 기고문 형식으로 연재합니다. 기고문과 기고 칼럼은 본 사의 편집방향과 집필기조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질서의 주체가 될 기회를 박탈당한 노동자들― 사북항쟁과 한국 노동운동의 실패한 전사(前史)1
민중운동은 폭동인가
역사에서 어떤 사건이 ‘폭동’으로 불리는 순간, 원인 탐구는 멈추고 진압은 정당화된다. 1980년 4월 사북에서 벌어진 일을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불러왔다. 사북항쟁은 그 배경과 발생 과정의 정당성에 비해 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린치 사건 하나로 전체가 규정되어 온 대표적인 사례다. 이에 대한 질문은 이렇게 압축할 수 있다. 사북에서는 왜 분노가 질서 있는 투쟁으로 조직되지 못했는가. 폭력을 중화하고 집합행동을 규율할 제도적 장치는 왜 작동하지 않았는가.
박봉남 감독의 다큐멘터리 ‘1980 사북’이 2025년 10월 29일 개봉되면서, 45년 전 사북에서 벌어진 사건이 다시 주목 받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1980년 4월 강원도 탄광 지대 사북에서 발생한 국가폭력 피해 사건 이후, 수십 년에 걸친 피해자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간다.
영화를 관람한 김민석 국무총리는 2025년 11월 21일 사북항쟁 45주년 기념식에 보낸 영상 기념사에서, 사북항쟁 국가폭력 피해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책임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하겠다고 밝혔다.(2025. 11. 23. 강원도민일보 기사 및 2025. 11. 21 대한민국 정부 정책 브리핑 사이트 https://www.korea.kr/briefing/speechView.do?newsId=132038154&utm_source=chatgpt.com 참조) 또 12월 2일에는 국회의원 회관에서 광주 지역 국회의원 8인의 주최 및 주선으로 이 영화를 상영하였다. 오늘날 ‘1980년 사북’은 영화와 기념식으로 다시 소환되고 있지만, 실제 역사로서 1980년 4월의 사북은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봉인되어왔다.
사북항쟁은 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소재 동원탄좌주식회사 사북광업소 노동자들이 사북읍 일대를 점거하고 경찰 등 국가 권력과 대치하다가 협상이 타결되어 점거를 풀고 정상화된 일련의 사태를 말한다. 사태 초기부터 어떤 타협도 없이 일방적으로 최루탄을 쏘며 진압하는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벌인 끝에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쌍방에서 다수가 중경상을 입고 경찰이 물러나며 나흘 동안 소강 상태를 이루면서 대치하였다. 그 과정에서 전두환 반란 집단은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한달 후의 광주에서와 같은 잔인한 진압 작전을 실시하려고 사북 인근 영월읍에 공수부대를 대기시키기도 하였다. 나흘간의 대치 끝에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경찰과 강원도 당국의 약속을 받아들인 노동자들이 4월 24일 마침내 점거를 풀고 정상화에 들어갔다.
사북항쟁은 어떻게 ‘부정적 표상’이 되었는가
끔찍한 국가폭력 전시장이 되었던 사북항쟁 관련자들의 피해회복과 명예회복이 부진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있다. 그 첫째 요인이 사태 발생 다음 날인 4월 22일의 노조 지부장 부인 김 모씨 린치 사건이다. 사태를 유발하고 도주한 노조 지부장을 찾으려 지부장의 집으로 찾아간 일단의 노동자들이 지부장의 집을 뒤졌으나 찾지 못하고 이웃에 있는 동원탄좌 경비반장의 집을 뒤지다가 침대 밑에 숨어 있는 김 모씨를 발견하고 동원탄좌 정문으로 끌고 갔다. 거기서 통제되지 않은 일단의 노동자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한 것이다.
사태 발생 직후부터 전두환 반란 집단이 주도하는 계엄 당국은 보도를 통제하다가 사태 3일만인 4월 23일 저녁 텔레비전 뉴스에 김 모씨가 동원탄좌 정문 기둥에 묶여 있는 사진을 전면에 내보내며 ‘술 취한 광부들의 난동’, ‘무질서한 폭동’ 운운하며 극히 부정적인 프레임으로 사태를 몰고 갔다. 이때부터 김 모 여인이 기둥에 묶여 있는 사진은 사북항쟁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표상이 되었다. 사북항쟁을 떠올리는 이들의 뇌리에는 사태가 이르게 된 저간의 사정은 사라지고 이 표상으로 인한 린치와 난동을 떠올리게 되었다.
제1기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와 김대중 정부 당시 설치된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과보상심의위원회(이하 민보상위)’에서도 다수의 위원들이 이 표상을 들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는데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양 위원회에 사태의 실상을 규명하고자 하는 위원들과 실무 조사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진상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사북항쟁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중대한 국가폭력 피해 사건임을 규정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의 요인은 이른바 지식인이나 종교인 등 외부인이 단 한 사람도 관련되지 않은 순수하게(?) 탄광 노동자와 그 가족이 참여한 순도 100%의 민중 투쟁이었다는데 있다고 본다. 이 점의 중요성은 이어지는 YH 사태 관련 서술에서 드러날 것이다.
첫 번째 요인인 김 모 씨 린치 사건은 과정이 어떠하든 그 자체로 자극적으로 표상되는 것이라 사북항쟁을 바라보는 여론을 우호적으로 움직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국가폭력 피해자인 대다수 노동자들이 빈곤한 삶의 현실에 짓눌려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할 기회를 갖지 못한 반면, 사북항쟁 국가폭력의 직접 원인 제공자이면서 최대 피해자 중 한 사람인 어용노조 지부장의 경우는 좀 차이가 있었다.
이들은 2008년 진화위의 국가사과 권고가 나오자마자 이를 부정하는 행정적 사법적 이의를 제기하고 국가의 사과가 이행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데 힘썼다. 주요 언론사 간부와 대학교수 등 여론을 움직이는 길목에 자리 잡고 폭력 사태의 피해자로서 할 일을 한 측면이 있다. 그렇긴 하나 한 세대가 지나 반세기 가까이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공식 사과와 함께 응당한 조치를 받지 못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원갑, 황인오 등 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하고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정당한 명예회복과 배보상 등을 추진한 이들에 대한 집중적인 소송으로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을 뿐 아니라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기도 하여 사북항쟁의 역사적 복권 운동 자체를 위축시키고자 한 것이고, 관련 공직자들이 이 사안에 개입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등 일정한 효과를 발생시킨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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