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은 신성불가침의 성역이 아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NSS)과 국가방위전략(NDS)을 읽고도 지난해 한미정상회담 팩트시트와 한미안보협의회의(SCM) 공동성명을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계약서 내용을 알고 도장을 찍으려 하는가, 아니면 '동맹'이라는 말로 국민을 속이고 있는가.
'굳건한 동맹'이라는 주문만 외우며 우리가 호갱처럼 돈을 내고 위험까지 뒤집어쓰는 구조를 '현실'이라고 포장하는 순간, 그건 외교가 아니라 굴종이다.
미국이 내민 '동맹의 현대화' 청구서는 분명하다. 상호방위의 약속이 아니라,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비용과 위험의 하청 계약서다. 바이든 시절 화려한 수사는 트럼프의 노골적 '미국 우선주의' 앞에서 휴지 조각이 됐다. 그런데도 우리는 "동맹이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으로 스스로를 길들인다.
동맹이 문제냐 아니냐가 아니다. 책임과 권한, 비용과 위험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면, 동맹은 방패가 아니라 덫이 된다.
NDS 발표 직후 방한한 엘브리지 콜비 정책담당 차관의 일정 자체가 메시지였다. 미국의 최우선은 본토 방어와 대중 전략이니 한국이 한반도 억제의 1차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미국은 '결정적 순간'에 보증자로 개입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겠다는 뜻이다.
이 변화는 주한미군의 성격을 바꾼다. 과거 주한미군이 한반도 붙박이 방어군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인도태평양 어디로든 운용될 수 있는 전략 자산으로 읽힌다. "미국이 여전히 다 해준다"는 기대는 접되, "미국이 손을 뗀다"는 의심도 하지 말라는 주문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된다. "미국이 저렇게 가다가는 우리는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여기엔 치명적인 모순이 있다. 임무는 바뀌고 위험은 커지는데, 돈은 왜 우리가 더 내야 하는가의 문제다. 지난해 팩트시트에 담긴 '주한미군 포괄지원 330억 달러'가 뼈아픈 이유다. 정부는 토지 제공, 세금 면제 등 기존 직·간접 지원을 10년 치로 환산한 것일 뿐 새 부담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미국의 현금인출기(ATM)가 아니다. 주둔의 임무와 위험이 바뀌는데 비용 논리만 '관행'으로 유지되는 건 상식이 아니다. 대북 억지를 위한 방어군이라면 비용 분담을 논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 전략의 전방 자산이라면 한국은 단순 수혜자가 아니라 주둔을 허용하는 호스트 국가다. 그때의 상식은 오히려 반대다. 우리가 임대료를 받아야 할 판에 우리 땅을 전진기지로 내어주면서 돈까지 바치는 꼴이면 그건 동맹이 아니라 조공이다.
혹자는 "그래도 안보 공짜는 없지 않나"라고 반문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공짜 안보'가 아니다. 임무가 바뀌면 비용 구조도 바뀌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상식이다. '반미 구호'가 아니라 '동맹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마땅한 요구다. 동맹이 계속되려면 더 강한 쪽의 요구가 아니라, 덜 강한 쪽의 납득 가능한 조건 위에서 굴러가야 한다.
더 중요한 건, 돈보다 위험이다. 미국은 확장억제를 강화한다고 생색내지만, 문서가 내비치는 방향은 한국을 더 앞세우는 '위험 분담'이다. 위험을 더 지라고 요구한다면 권한도 함께 넘겨야 한다. 책임이 커지면 권한도 커져야 한다는 건 만고의 진리이건만 현실은 정반대다.
전시작전통제권은 여전히 미군 손에 있고, 연합훈련의 설계와 통제도 '한국의 1차 책임'과 정합적으로 재조정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책임은 우리가 지고 버튼은 미국이 누르는 기형적 구조는 위기 때 우리를 원치 않는 확전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다. '동맹'이라는 말로 감정은 달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구조는 위기를 관리하지 못한다.
이 비정상의 정점에 유엔사령부(UNC)가 있다. 최근 유엔사 관계자들은 "주권은 한국에 있지만 DMZ 관할권은 유엔군사령관에게 있다"는 취지로 공개 발언까지 했다. 정전협정과 후속합의를 근거로 DMZ 출입과 활동의 사실상 최종 허가권을 주장하면서, 한국의 제도화 시도는 '정전협정 위반'이라는 공포로 되돌려친다.
안전과 정전 준수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말이 '허가권'과 '거부권'의 다른 이름으로 작동하는 순간, 우리는 평화를 설계할 권리부터 빼앗긴다. 평화를 말하려면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하는 나라가 정상인가. 정전관리는 평화를 위한 임시 장치이지, 평화를 가로막는 영구 장치가 아니다.
여기서도 "미국에 맞서면 안보가 무너진다"와 같은 늘 협박이 나온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혹시나' 하는 두려움에 갇혀 종속을 영구화하는 것이다. 무조건적 순응은 안전이 아니라 약점이다.
상대가 "어차피 한국은 따라온다"고 판단하는 순간 협상은 끝난다. 국내에서 '안 된다'는 목소리가 분명할수록 정부는 비로소 "국내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방패를 갖는다. 외교는 호의가 아니라 제약을 읽고 움직인다. 우리가 조용히 감내하면, 더 크게 요구하는 것이 외교의 습성이다.
이제 점잖은 수사는 집어치우고, 명확하게 요구해야 한다.
첫째,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주한미군을 대중 전략의 전초기지로 돌려세우면서, '포괄지원'이란 명목으로 방위비 분담을 슬그머니 상향 고정하려는 꼼수를 전면 백지화하라. 임무가 바뀌면 비용 구조도 다시 써야 한다.
둘째, 권한 없는 책임은 거부되어야 한다. 전작권 환수의 실질 로드맵과 연합훈련의 설계·통제에서 한국의 주체성이 확보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위험 분담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분명히 천명하라. 책임을 요구한다면 결정권을 내놓아야 한다.
셋째, 유엔사의 월권과 DMZ 관할 논리를 바로잡아 평화결정권을 되찾아오라. 정전관리의 이름으로 우리의 정책을 '허가' 대상으로 만드는 구조가 지속되는 한, 평화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끝으로 분명히 해두자. 이는 맹목적인 반미가 아니라 숭미 사대주의와 굴종에 대한 거부다. "No"라고 말할 수 없는 동맹은 동맹이 아니다. 동맹이 우리에게 '평화의 길'을 막는 그림자가 된다면, 우리는 그 그림자에 고분고분 순응할 이유가 없다. 당신들이 외치는 민주주의 수호와 평화 구축은 국민 주권 위에서만 꽃피울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굴한 침묵이 아니라, 국익과 주권을 지키기 위한 시끄러운 촛불의 저항이다. 이제 우리는 미국에게 당당히 청구서를 내밀어야 한다. 당신들이 우리 땅에서 누리는 평화의 값을 지불하고 그게 싫으면 나가라고 말할 배짱이 있어야 진짜 국민주권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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