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2일 청와대 최고위원회 만찬장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원탁의 중앙에 있고 왼쪽에 권노갑 고문, 오른쪽에 서영훈 대표, 한화갑, 이인제, 김중권, 박상천, 정동영, 정대철, 김근태, 장태환, 장을병 최고위원이 쭉 둘러앉아 있었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정동영 최고위원이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에 독하게 마음먹고 내뱉었다.
"대통령님 옆에 계신 권 고문께서 물러나셔야 합니다. 그게 당을 살리는 길입니다. 정부가 사는 길입니다."
순간 김대중 대통령의 얼굴은 석상처럼 굳었다. 권노갑 고문의 얼굴은 경악과 슬픔과 배신감으로 일그러졌다.
"배은망덕한 하룻강아지다!", "정동영의 난이냐?", "시대의 쇄신이냐?"
이런 논란이 이어졌지만 권 고문은 거인이었다.
"내가 퇴진함으로서 대통령과 당이 편안해질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길이다. 나는 운명에 따를 것이다."
권 고문은 '순명'이라는 두 글자를 남기고 떠났다.
순명과 함께 민주당은 정당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고 국민경선제의 창출과 그 수혜는 노무현 돌풍으로 이어졌다.
세월이 흐른 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영어의 몸이 되었을 때 정동영 의원이 찾아가서 고개를 숙이자 권 고문은 이렇게 말했다.
"정 의원, 나는 이제 자네의 진정을 다 알고 있네. 이미 나는 자네를 용서했네. 이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더 큰 정치를 하시게."
정동영 의원은 거기서 거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 후 권 고문은 정동영 의원의 정치 인생 속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을 막아준 울타리 역할을 해주었다.
권 고문은 정동영 의원이 17대 대선후보가 됐을 때 전국을 다니시면서 '정동영이가 DJ의 적통을 잇는 후보다'라고 유세를 해주었다. 정 의원이 넘어질 때마다 땅을 짚고 일어나라고 격려하고 일으켜주는 버팀목 역할도 해주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 6일 국회 의정박물관에서 열린 '권노갑 100인 평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권노갑 김대중재단 이사장의 출판을 축하하는 축사를 통해 뒤늦게 알려졌다.
정동영 장관은 당일 페이스북에 올린 축사를 통해 "권노갑 고문의 백년 인생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궤적 그 자체이다"며 "당신의 삶은 권력의 중심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그 권력을 내려놓고 후배들의 길을 닦아준 순명의 순간에 가장 빛났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저는 당신을 향해 비정한 칼날을 던졌고 당신은 그 칼을 맞고도 저를 끌어안고서 정치의 품격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주셨다"며 "정치는 칼로 베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품어 안는 것이다. 정치는 과거를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화해하는 예술이라는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1930년생으로 96세인 권노갑 김대중재단 이사장은 13·14·1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과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 민주화추진협의회 이사장 등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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