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테이블 앞쪽에는 서로 친구로 보이는 삼십대 중반의 두 쌍의 한국인 부부가 미리 와서 앉아 있다. 그들은 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 아이 둘과 레이스가 달린 빨간 옷을 입은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식사를 하고 있다. 이제 막 음식이 나왔는지 종업원이 분주히 음식을 나른다. 손가락 넓이만한 납작한 쌀국수를 닭고기와 함께 볶고 브로콜리를 넣어서 센 불에 확 볶아 낸 차우뻔이 먼저 나왔다. 참깨를 듬뿍 뿌려 모양을 낸 돼지고기 볶음, 그리고 배춧잎을 바닥에 깔고 쪄낸 만두도 놓여진다.
이 중국식당은 우리 부부가 요즘 자주 들린다. 아내가 "오늘 저녁은 뭘 해먹지?" 하며 식사시간이 다 되가는데도 저녁 준비를 하지 않는 날이거나, 주부들에게는 왜 주말이 없냐며 투덜대는 금요일 오후면 의무적으로 들리는 곳이 되어 버렸다.
식당 안은 사방 귀퉁이는 10년 전 개업할 때 선물로 받은 행운목이 천장까지 자라 버렸다.
천장과 지붕이 닿는 곳은 인조 넝쿨 잎새를 쭉 둘러서 마치 숲속 같이 보이게 하려고 억지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주인장의 데커레이션 감각이 어떠한가를 보여 줄 뿐이다. 가장 넓은 벽면에는 산타가 썰매를 타고 가는 모습의 장식물이 있다. 꼬마 전등이 먼지에 절어 몇 년째 같은 자리에 있고 테이블과 의자는 낡아서 버리기 직전이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뭘 흘리거나 묻혀도 별로 미안하지가 않다.
푸짐한 덩치의 주인 여자는 친절하며 우리 가족이 3인분만 시켜도 먹고 남아 항상 남은 음식을 싸오게 된다. 가격은 터무니없이 싸서 햄버거 두 개 먹은 가격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주문과 동시에 음식이 나오기 때문에 의자에 오래 못 붙어 앉아 있는 사내아이들을 데리고 오기엔 너무 좋은 곳이다. 식당은 항상 빈자리가 없고 주말엔 밖에서 기다려야 될 때도 있다.
오늘은 윤수씨 부부를 데리고 함께 왔다. 윤수씨는 늦게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지 못해 애를 먹었다. 뒤늦게 컴퓨터를 배워 임시직으로 취직은 했다. 하지만 세탁소 매니저로 일하는 아내 월급에 반도 못 미치는 소득 때문에 평소에도 기운 없는 사람이 말이 더 없어져 버렸다.
결혼 초에는 세상에 자기 남편만한 사람 없다며 비쩍 마른 남편 팔에 매달려 이리저리 애교를 피우는 게 참 보기가 좋았었다. 하지만 5년 넘게 남편 공부시킨다고 식당에서 고생한 보람을 못 느끼는 것 같다. 변변한 직업도 못 얻고 만사에 의기 소침한 남편을 보는 것에 지쳐버린 것이다. 요즘은 말 한마디도 자리 가릴 것도 없이 사납게 해대서 작은 윤수씨가 더욱 더 작아 보인다.
몇 달째 방을 따로 쓴다는 말도 들리고 해서 부담 주지 않으면서 기분이나 달래 줄려고 함께 데리고 나온 것이다.
주인여자처럼 넉넉한 여 종업원이 주문을 받는다.
음식을 주문하는 건 아내 몫이다. 언제부터 내가 먹을 것을 아내가 결정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아내는 앞 테이블에 있는 음식처럼 차우뻔과 탕수육 그리고 새우 볶음밥을 시켰다. 아내는 외식을 하면 꼭 밥 한가지는 시켜야 된다고 생각한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시작 할 무렵에 앞 테이블에 있던 그 부부들의 아이들이 벌써 다 먹었는지 일어서서 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식당 테이블 사이를 뛰어 다니며 장난을 하며 소리를 지르고 여자아이마저 따라 나서자 식당 안은 놀이터가 되어 버렸다. 주위에 손님들은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지만 아이들의 부모들은 항상 그래 왔다는 듯 아이들 노는 일엔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고 있다. 왼쪽 테이블에 앉은 중년 부부도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기분이 상했는지 한숨을 한번 내 쉰다. 아이들 부모를 쳐 다 보았지만 아이 부모들은 반응이 없다.
이상스럽게도 식당 안의 모든 손님들은 모두 인상을 쓰는데 정작 아이들 부모와 식당 주인은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것이다.
"여보 내가 저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한 마디 해야겠지?"
나 역시도 공연히 나서서 시빗거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내가 말리면 그만 둘 심산으로 공연히 의견을 물었다. 아내는 고개만 으쓱이며 당신이 나서는 것은 싫지만 저 아이들이 저렇게 뛰어 다니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는다. 괜스레 물어 봤나 보다 하며 저 부부들이 남의 자식 일에 무슨 참견이냐며 무식하게 떼로 대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애들이 저렇게 수선스러워도 그냥 놔두는 사람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나 같은 생각인지 인상만 찌 뿌릴 뿐 누구 하나 막상 나서는 사람이 없다.
아마 아이들 부모가 애들이 저리 소란스러운데 설마 그냥 저렇게 계속 놔두진 않겠지 하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뛰어 다니던 아이들이 내 의자 뒤를 돌다가 팔꿈치를 건드려 입으로 들어가던 음식이 떨어지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막 일어서려는 참이었다.
"너 이 놈들 식당에서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걸 배우지 못했니?"
윤수씨가 아이 한 녀석을 어깨를 붙잡아 놓고 아이들 부모가 들으라는 듯 호통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한번도 이런 일로 혼나 본적이 없는 듯한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면서 제 부모들에게 달려 들어갔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아이들 부모들은 뭔가 말을 하려고 윤수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뒤쪽에서 식사를 하던 흑인 가족들 중에 한 사람이 아이들 뛰어다닌 것이 한국 문화인가 보다 하고 꾹꾹 참았다가 한국 사람들도 그런 것을 싫어 한다는 걸 알았나 보다. 흑인들이 턱을 내밀며 내는 특유의 "이~예~~" 소리와 함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그 동안 기분이 상했던 사람들이 웃음소리로 윤수씨의 행동을 옹호하자 아이들 부모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머쓱해 하며 부랴부랴 나가 버렸다.
"사람들이 말이야. 그 정도 에티켓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 아냐! 주인 양반도 저런 아이 데리고 오는 사람은 앞으로 들여보내지 마소. 그럼 아마 손님이 더 많아질 거요"
의기양양해진 윤수씨는 아이들 부모들과 식당 주인을 싸잡아 혼내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주위의 손님들은 다들 곤란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윤수씨에게 감사의 표정들을 보낸다. 구석 끝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잘 했다는 칭찬을 보낸다.
식당주인은 미안했는지 "아이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그래도 손님이라서..." 하며 말끝을 흐리면서 연신 주전자를 들고 테이블 사이를 다니며 빈 물 컵에 물을 담아 주고 있다.
은희씨는 남편 윤수씨가 한 행동이 너무 자랑스러워 남편 어깨를 토닥토닥 하고 있다.
영웅이 되 버릴 기회를 간발의 차이로 놓쳐버린 나는 아내를 돌아보며 "난 저 사람들 뒤통수를 한번 때려 볼까 했는데..." 하고 빈 허풍을 떨어 보지만 이미 윤수씨의 주가는 올라 갈 때로 올라간 후였다.
모두가 영웅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 옆에서 박수를 쳐야 되니까...
"여보 내 어깨에서 손 떼! 난 옛날부터 당신이 내 어깨 만지는 거 싫었어."
자기 남편이 목소리를 깔고 말하자 은희씨는 놀라서 후닥닥 손을 치워 버렸다. 오늘따라 음식이 더 맛있고 푸짐해 보인다.
"선배님, 이제 나갑시다. 돈은 당신이네."
잠시 사이에 사람이 바뀐 윤수씨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며 말한다. 은희씨는 부랴부랴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오늘 식당 안에서 영웅이 한명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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