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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LA흑인 폭동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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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LA흑인 폭동의 뿌리'

<뉴욕 독자기고> 한인-흑인 갈등의 역사와 해법

미주 이민 1백년 역사상 한국계 이민자들에게 가장 뼈아픈 상처를 입힌 지난 92년 4.29 LA폭동은 이제 과거지사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게 현지 이민자들의 전언이다. 지난 7월말에는 다시 LA에서 수갑을 찬 10대 흑인 소년을 마구 때린 혐의로 기소된 백인 경찰에 대해 유죄 판결이 내려지지 않아 '제2의 로드니 킹' 사건으로 불리며 또다시 흑인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치안경계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미국내 한국인들은 그러나 이같은 사태의 재연을 막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미국내 한국계 1.5~2세가 주축이 된 한미연합회(KAC)는 지난 1일 4.29 폭동당시 불에 타거나 파괴된 각종 피해물품과 총기, 사진 등 각종 홍보자료를 모은 기념관을 세우기로 하고 내년 4월까지 기증품을 접수하는 등 LA폭동을 기억하는 사업을 꾸준히 벌이고 있다.

KAC에 따르면 92년 당시 흑인 폭동으로 한인업소 2천2백여개가 약탈. 방화피해를 입었으며 모두 3억5천만달러의 재산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집계됐다.

뉴욕시립대 라구아디아 칼리지에서 경제인류학을 가르치는 서영민 교수가 흑인 폭동으로 왜 한인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지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서 교수는 흑인 폭동은 LA만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뉴욕 등 미 전역에서 "늘상 있는 위협"이라면서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대책을 제시했다.

필자의 원고에는 여러 가지 인용한 참고 문헌 색인을 단락마다 첨부했으나 글의 흐름상 대부분 생략했다.편집자 주

***LA폭동을 돌아본다**

3백여년 전 미국에 강제로 끌려와 철저한 모멸과 학대, 수모를 받아온 사람들이 미국 흑인들이다. 최근에 역사학계에서 발굴된 자료에 따르면 통념과는 달리 대다수의 흑인 노예들은 인간 사냥꾼에 잡혀온 것이 아니었다.

당시 아프리카에 큰 왕조들이 존재했었는데 이들 지도층이 경쟁관계에 있는 딴 나라사람들을 잡아다가 유럽 노예 상인들에 팔았다. 인신매매로 돈을 벌려는 지도층들은 점차 자국민도 팔기 시작했다. 결국 2백년도 채 안되어 이들 왕조들은 멸망을 했다 (에릭 볼프 <유럽과 역사를 잃은 사람들> 1982).

이 때문에 이들 흑인들에게는 가슴이 찡한 고향이 없다. 미 남부에서 도시로 이주한 흑인 노인들에게 어릴 때 기억이라고는 지긋지긋한 가난과 인종 차별뿐이다. 또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흑인 젊은이들에게도 고향이란 공허한 말장난일 뿐이다.

***흑인들의 뿌리깊은 한(恨)의 유래**

고향을 그리는 한인들과 고향이 없는 흑인들 간에는 엄청난 심리적 괴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흔히 우리들만 있을 때 한국어로 나누는 대화가 있다. ꡒ왜 이토록 풍요롭고 기회가 넘치는 미국 사회에 흑인들은 밑바닥을 기고 있는가?ꡓ로 대화는 시작된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ꡒ흑인은 게으르다ꡓ ꡒ흑인은 사람은 좋은데 야물지 못하다ꡓ 등의 비교적 점잖은 설명부터 ꡒ흑인은 선천적으로 지능이 모자란다ꡓ ꡒ흑인 문화자체가 미국이든 아프리카이든 미개하다ꡓ라는 등의 원색적인 비판까지 많은 말이 오간다.

인류학적으로 고찰하기 앞서 흑인들과는 다른 한인들의 이민 역사를 우선 살펴보자면 1965년 이민 개정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002년은 한인 이민 1백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미 연방정부에서도 공식적으로 한국이민 1백주년을 선포했다. 그런데 1965년이 왜 중요하냐고 반문하실 분들이 많을 것으로 안다. 이민의 역사가 1902년 하와이 농장이민으로 시작됐지만 대다수의 현재 이민자들이 미국 땅을 밟은 지난 30년이란 세월은 우리 한국이민사에서 큰 획을 그었다.

65년 이전까지 미국에 공식적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유럽인들뿐이었다. 이런 유럽 편향적인 이민 정책이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그릇된 정책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나온 이들은 소위 Freedom Fighter, 흔히 우리가 인권운동가라 칭하는 흑인 지도자들이었다.

1963년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흑인지도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대화하는 자리에서 킹 목사가 불평등한 미국의 관문을 지적하자 케네디 대통령도 이에 동감하고 과감한 이민법 개정을 명하였다.

한인 이민 초창기의 인구 분포를 보면 주로 의사, 간호사, 교수 등의 인텔리 계층의 이주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실제 한인 교포 사회가 형성된 시기는 가족 초청이민이 본격화된 1970년대 초반일 것이다.

초기 이민 연구에 나타나듯 1965년 2천1백39명이 미국에 이민을 온 것으로 시작으로 1969년까지 약 1만2천명의 공식 이민이 미국에 들어온 것으로 되어있다. 이민 숫자는 1971년을 기점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76년 3만8백3명으로 늘었다.

언어.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생경한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초창기 한국 이민들은 소규모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청과상을 이탈리아 사람에게 구입하고 세탁소를 유태인에게 사거나 커피숍을 그리스인으로부터 인수했다는 분들이 많다.

실제로 필자가 아는 많은 소규모 사업 경영인들이 한국 대학 졸업자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국 유수 대학의 석, 박사 학위 소지자들이다. 세탁소를 하는 초기 이민 사업인과 나눈 대화를 그대로 기술해보겠다.
   
ꡒ나도 78년 처음 이민 와서 미국 직장에 어렵게 취직했었지. 아 그런데 2주 후 첫 봉급을 받아보고 나니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지 뭐야. 세금이다, 소셜시큐리티다 해서 이것저것 제하고 나니 렌트비 내기도 빠듯하더군. 여기저기 수소문해 브루클린에다 쓸어져 가는 세탁소를 하나 구입했지. 2년만에 집사고 5년만에 지긋지긋한 브루클린을 떠나 뉴저지에 자리를 잡지 않았겠나. 그때 브루클린 가게를 사겠다고 찾아온 사람도 한국 사람이었는데 대학교수라고 하더군. 미국 온지 12년 됐다나. 그런데 저축한 돈이 전혀 없어 권리금 전액을 오너스 파이낸스(Owners' Finance)로 해달라고 조르는 통에 어찌나 난처했는지 몰라ꡓ

***한인 1세대가 게토에 자리잡게 된 이유**

이 사례에서 언급된 권리금 문제에 대해 필자가 대화를 나눈 많은 한인 경영인들은 권리금제도가 한국 문화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개탄한다. 그러나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이 권리금제도는 1800년대에도 뉴욕에 존재했었다. 유태인, 이태리인, 흑인을 막론하고 뉴욕에서 가계를 사고 팔 때는 'Business Expenses'라는 명목 하에 목돈이 오고 갔다. 단 한인 교포 업종에서 과당 경쟁으로 인해 권리금 액수가 천정부지로 올랐다는 점은 필자도 인정한다.
   
소사업에 도전하는 한인들에게 일견 전혀 상관이 없어 뵈는 권리금과 고객과의 갈등은 사실 궤를 같이한다. 한국에서 갓 도착한 이민들의 경우 언어 장해도 문제거니와 소위 신용사회인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일은 하늘에서 별을 따기와도 같다.

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남들 하는 대로 은행 문을 두드릴 수 없다. 크레딧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에서 어렵게 마련해온 비상금과 친인척의 주선으로 가입한 계를 통해 마련한 돈으로 권리금과 시작 비용을 조달해야한다. 결과적으로 ꡒ싼 가게ꡓ ꡒ싼 업종ꡓ을 두드리게 되어있다.

그런데 권리금이 싼 지역은 우범지대이기 일쑤이다. 인종을 막론하고 누구든 어느 정도 재산을 축적하고 나면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못사는 계층이 몰려있는 곳 소위 게토 (ghetto)에는 빈민만 존재하며 상인들은 빠른 속도로 물갈이를 한다.

할렘, 베드포드 스타이브슨, 이스트 뉴욕 등이 대표적인 게토이며 또한 우범지역이다. 바로 이들 지역에서 지난 30여 년 간 뿌리를 내린 이들이 우리 한국이민들이다. 이들 지역의 주민들의 대다수는 흑인이거나 히스패닉 (스페니시)들이다. 그것도 보통 유색인종 집단이 아니다. 미국의 학계에서는 이들을 Underclass라 부른다 (Wilson, 1979). 계층에조차 끼지 못하는 밑바닥 인생이라는 의미이다.

***한인들과 미국 빈민층과의 갈등**

아메리칸 드림이란 원대한 꿈을 안고 시작한 미국 이민생활은 결국 미국 사회의 가장 밑바닥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 사업에서 시작한다. 10년 전 브루클린 처치 애비뉴 청과상 사건은 한인과 언더 클래스와의 갈등을 잘 말해주는 사례다.

사건의 발단은 레몬 값 실랑이에서 시작되었다. 기껏해야 10 센트도 안 되는 과일 값 때문에 무려 7개월 동안 주민들과 싸워야 했고 결국 가게가 문을 닫고 말았다 (NY Committee on General Welfare 1990).

당시 뉴욕 언론에도 크게 보도되었던 이 사건은 어찌 보면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주인은 흑인 할머니가 이 사건 이전부터 도둑질을 일삼았다고 했다. 특히 그날은 대 여섯 살 짜리 손자까지 대려와 이것저것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 노인은 실은 미국계 흑인이 아니고 아이티에서 이민 와서 영어를 잘 못하는 70대 노파였다. 이 할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주머니에 레몬을 집어넣은 것은 사실이나 훔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고 천방지축 날뛰는 손자를 두 팔로 안으려다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 주인이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떠밀어서 넘어지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눈덩이처럼 사건이 불어나서 마치 전체 한국인과 흑인간의 싸움처럼 번졌고 결국 가게도 문을 닫고 말았다.

미국 이민법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려면 고학력과 어느 정도의 재력이 필수이다. 즉 한국사회에서 이미 중산층인 사람들이 미국 이민자 대열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민 생활에 첫발을 내딛은 곳이 유색인종이 가득한 게토, 우범 지역이다. 단지 피부색깔이 다른 인종문제 뿐만 아니라 한인들은 경제 계층의 차이에서 오는 극심한 정체성 이탈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이 계층적 상이점이 인종 갈등을 촉발시키는 시작일 수 있다.

한국에서 빈민 계층을 연구하시는 학자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한국의 중산층은 한국의 소외계층을 전혀 이해하지도 이해하려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극심한 난리를- 일제 시대, 6 25, 군사정권, 경제개발 등- 겪으면서 남보다는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는 생존본능이 지나치게 발달했다는 내용이다. 즉 한국에서도 거의 접촉이 없던 소외계층과 미국 이민자들은 날마다 씨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미국의 소외계층의 입장을 살펴보자. 같이 자라난 막역지우도 사회적으로 조금만 성공하면 대학가고 직장 잡으면 미련 없이 게토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한집안에서 자라난 형제자매 역시 마찬가지다.

남아있는 이들은 억하심정이 끓어오른다. 그런데 자신들이 매일 이용하는 동네 가게 주인들을 보면 할아버지 대에서는 유태인, 아버지 대에서는 이탈리아 사람, 자신들 대에서는 한국인으로 계속 인종이 바뀌어 왔다.

전 주인들도 한번 떠나면 시쳇말로 코빼기도 내밀지 않는다. 억하심정이 두 배로 끓어오른다. 걸핏하면 트집을 잡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배운 수법이 있다. 이들 가게 주인들을 가장 쉽게 화나게 하는 바는 어눌한 영어를 조롱하는 것이다. 가끔 ꡒ네 나라로 돌아가 버려ꡓ라는 양념까지 섞어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엉터리 같은 수법은 곧 바닥을 들어내게 마련이다. 이들 이민 차세대는 첫 세대의 고생을 발판으로 미국 주류사회에 뿌리를 내릴 것이고 자신들과 자신들의 아이들은 이 지긋지긋한 게토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는 미국 사회 자체의 문제이다.

미국 국민의 12.7%에 이르는 흑인 중 35%, 미국민 중 13.5%를 차지하는 히스패닉의 34%에 이르는 이들이 빈곤계층이며 이 빈곤이 다음 세대로 재생산된다. 소위 웰페어 문제, 미혼모 문제, 저질의 공립교육 문제, 그리고 무주택자 문제는 어찌보면 인종 문제이기 이전에 빈곤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의 불안정이라는 문제와도 직결이 된다.

최근 나온 사회학 자료를 인용해 보겠다. 17세에서 22세 사이에 있는 흑인 남성들의 경우 2000년을 시점으로 교도소 가는 숫자가 대학에 입학하는 수보다 많아졌다고 한다 (Gladwell 2002). 또 한편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정부의 공식 연구 자료에 의하면 대도시의 강력 범죄율이 크게 낮아졌다고 했다.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은 늘어난 반면 강력범죄는 줄었다는 어찌보면 상반된 발표내용은 누가 범죄 대상인가를 살펴보면 간단히 답을 얻을 수 있다. 흑인 젊은이들끼리 치고 받고 저지르는 범죄가 가장 많다는 것이다.

참고로 할렘에서 태어난 흑인 남자아이의 평균 생존연령이 36.7세로 전세계 극빈국 에티오피아의 39세보다도 낮다. 두 번째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가게들이 범죄 피해를 겪게된다. 즉 우리 한국 이민 사업체가 당하는 것이다. 강도, 날치기, 협박이 전보다 늘었다. 후환이 두려워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한국인 주인들의 습성을 악용하는 것이다. 강력 범죄를 한번 겪어 본 이는 이 악몽을 다시는 잊지 못한다. 특히 총기가 난무하는 미국, 뉴욕시의 경우 피해자들은 평생 치를 떨게 마련이다.

이민 초기 1977년에 발생한 ꡒ뉴욕시티 블랙 아웃 (Curvin and Porter 1979)ꡓ 당시 맨해튼에서 리쿼 스토어를 경영한 한인 이민자의 말이다.

"1977년 7월 13일이었을 게야. 가게를 닫으려 준비하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가더군. 처음에는 우리 가게만 불이 나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시 전체가 불이 나갔다고 하더군. 경찰차, 소방차, 응급차 등 사이렌이란 사이렌은 모두 불어대더구만. 집에 가기가 겁이나 가게에 남아있었던 것이 실수였어. 앞문 전면 유리를 통째 부수고 몇 놈들이 침입을 하더군. 눈앞에 손전등과 총을 들이대며 돈을 내놓라 하더군. 정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눈에 보이는 건 시커먼 총구 밖에 없더군. 그날 번 돈 모두 털어 줬지.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고 동네 건달이란 건달은 죄다 몰려들더니 술병을 훔쳐가기 시작하는 거야. 깜깜한 와중에도 이들 도둑질하는 이들을 쉽게 알 수 있더구먼. 매일 가게를 이용하는 고객들이더라고. 필사적으로 집사람, 큰애와 몸만 빠져 나왔지. 다음날 아침 돌아와 본 가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지. 몇 년 동안 그 시커먼 총구멍이 꿈에 나타나 악몽에 시달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지."

***LA폭동은 흑인들의 분풀이에 한인들이 이용당한 셈**

개인적으로 범죄의 피해를 겪는 것도 모자라 때로는 한국인 전체가 이들 빈곤계층의 폭동 피해자가 된다. 1992년 52명의 무고한 양민의 희생을 불러일으킨 로스앤젤레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많은 교포들이 몸서리쳐지는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건의 발단은 한국 상인과 고객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이 도심 고속도로를 만취한 채 1백20 마일로 질주를 하다가 경찰에 잡힌 것이 발단이었다. 굳이 한국인과 관련 사항을 찾아내자면 이 사람의 차가 현대 엑셀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해 볼까? 로드니 킹은 당시 일정한 직업도 없었으며 교통위반, 부인폭행 등 사소한 잡범으로 경찰 기록 꼬리표가 매우 긴 사람이었다. 그날도 만취한 상태에서 경찰의 정지 명령에 불응하고 도망을 쳤다. 문제는 체포가 된 이후였다. 대 여섯 명의 경찰이 (모두 백인이었다) 이 사람을 집단 구타를 하는 장면이 지나가던 운전자의 비디오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다음날 주요 방송국에서 이 비디오를 방영하였고 전국적으로 경찰과 피의자의 인권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이슈가 슬그머니 흑백 갈등으로 비화되고 당시 로스앤젤레스의 빈민가, 사우스 센트럴 지역에서 자리를 잡은 한국인 가게들이 표적이 되었다. 졸지에 한국인이 백인으로 둔갑(?)을 한 것이다. 인근 흑인 갱들이 총기란 총기는 다 들고 나와 한국인 상점에 난사를 하고 이 와중 한국인 주인들도 응사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더욱 기가 막혔던 사실은 주민을 보호해야하는 경찰이 뒷짐만 진 채 수수방관만 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13명의 억울한 한국인들이 희생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게 되었다.

당시 많은 뉴욕의 교포 상인들도 불안에 떨었으며 몇몇 업소들은 아예 문을 닫았었다 (Min 1998, KC. Kim 1999).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무법천지가 법치의 나라 미국에서 백주 대낮에 벌어진단 말인가? 이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면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가장 큰 사건이었으나 실은 뉴욕에서 인종 폭동의 피해는 늘 있었다.

1984년 한인 교포 업종을 겨냥한 흑인들의 불매운동은 매우 조직적이었으며 규모나 심각성 면에서 실제 상점의 존폐까지도 위협을 했었다. 또 앞에서 언급한데로 1989년 처치 애비뉴 사건 등 크고 작은 불화, 불매운동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우리가 한국인이어서인가? 대답은 '아니다' 이다.

1968년 뉴저지 뉴워크에서 벌어졌던 흑인 폭동은 이탈리아 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을 겨냥했던 사건이었다. 1991년에는 브루클린 크라운 하잇츠 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했는데 피해자는 근본주의 유태인이었다. 1978년 로이사이다라 불리는 남부 맨해튼 지역의 폭동은 가해자가 히스패닉이었는데 피해 상인들도 히스패닉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경찰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특정 인종을 겨냥한 빈민계층의, 특히 흑인 등이 주동이 된 폭동은 미국 사회의 고질병이다.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유태인 상인들을 겨냥한 흑인 폭동이 백년 전에도 발생을 했었다. 특정 연구발표에 따르면 흑인 폭동은 흑인들의 한풀이라고 한다. 몇 10년간 쌓인 분노를 고름을 터뜨리듯 분출하고 자신들의 생업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Wilson 1979). 이런 사실을 주지하고 있는 미국 정부는 폭동이 발생하면 관여하지 않고 스스로 사그러 들 때까지 수수방관을 한다. 한인 교포처럼 상점을 운영하는 소상인들만 억울하게 당할 뿐이다.

***한인들, 미 빈민층과 관계개선 노력 결실 맺고 있어**

여기서 필자는 어떤 특정 집단을, 흑인 빈곤층, 경찰, 정부 등을 비난할 의도는 없다. 단 필자가 경험했던 1996년 뉴욕 할렘사건의 예로 폭동의 문제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할렘 주민들이 상인들과 문제로 거리에 나서는 바는 특별히 놀랄 일이 아니다. 특히 조직화된 세력이 특정 상인을 겨냥해 불매운동 및 퇴거운동을 벌리는 사실도 더 이상 특이하지 않다.

그런데 1996년에 발생한 불매운동은 한국인 상점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할렘 주민회 (흑인과 히스패닉을 모두 포함한)가 겨냥한 상점은 대형 슈퍼마켓 체인인 패스막크였고 그 외에 백인들이 소유한 대규모 사업체였다. 당시 불매운동 데모대가 125가를 지날 때 일부 과격 흑인 단체의 요원들이 한인 상점 앞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주민들이 한인 상인 업소에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데모대를 유도했으며 모든 사람들이 지나갈 때까지 한인 업소들을 지켜주었다.

10년 전 1984년에 한인을 겨냥한 대규모 불매운동이 벌어져 많은 교포 업소가 큰 피해를 입었던 사실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된 연유였는가? 이는 지난 20년 간 할렘 한인상인 번영회와 회원 개개인들의 피눈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단순히 물질적인 도움을 앞세운 주민들과 관계개선만이 아니고 실제 마음을 열고 이들 빈민층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했던 것으로 안다. 뿐만 아니라 촌지를 모아 흑인 지도자들을 한국에 보내 한국문화 전파에 노력을 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고향이 없는 사람들은 한이 많다. 쉽게 노하지만 분이 삭으면 빨리 체념한다. 우리 한인 교포들은 한이 많은 사람들이다. 일제 36년이라는 치욕부터 6. 25를 겪고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미국 땅에 자리를 잡았다. 흑인들도 한이 맺힌 사람들이다. 한국인과 흑인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통 분모가 있는 셈이다. 단 한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비록 고향을 떠난 교포의 고달픈 삶이지만 우리에게는 마음에 그리는 고향이 있다. 뿌리가 살아있는 것이다. 반면 흑인들은 뿌리가 뽑힌 사람들이다.
   
한인 이민 1세대들은 억척스럽게 지난 30년간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려왔다. 한 세대가 지난 셈이다. 첫 세대는 내 몸 부서지는 것 아랑곳하지 않고 자식들 크는 것 보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한인 교포 사회도 두 번째 세대로 접어들었다. 살아남는 것이 삶의 전부였다면 이제부터는 백년 대계를 준비해야할 시기로 접어든 것이다. 한민족이 미국 사회, 문화, 역사가 채 풀지 못했던 숙제인 인종갈등을 극복해낸 위대한 민족으로 역사에 기리 남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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