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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스펙터클, 리얼리티 쇼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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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스펙터클, 리얼리티 쇼의 출발점

[김시덕의 직업적 책읽기] <그날의 비밀>, <대지의 슬픔>

오늘 소개할 책은 프랑스 작가 에리크 뷔야르의 <그날의 비밀>과 <대지의 슬픔>(이상 이재룡 옮김, 열린책들)이다. <그날의 비밀>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후의 상황, 특히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다루고 있고, <대지의 슬픔>은 19세기 말 인디언 전쟁 이후 서부극이 발생하는 시점을 다루고 있다.

2017년에 원저가 출간되었고 2019년에 한국어판이 출간된 <그날의 비밀>의 원제목 'L'ordre du Jour'는 '의사일정, 아젠다'라는 뜻이다. 이 책의 첫 대목에 등장하는 내용인 1933년 2월 20일 독일 기업가들과 히틀러의 회동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무적이고 루틴한 느낌을 주는 프랑스어 원제목은,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드러내고 싶어 한 '악의 평범성'을 느끼게 해준다. 이와 대비하여, 한국어 제목은 원저의 제목보다 좀 더 신비적인 느낌을 준다.

한편, <그날의 비밀>보다 3년 앞선 2014년에 원저가 출간되었지만 한국어판은 올해 2월에 출간된 <대지의 슬픔>에는 '버팔로 빌 코디의 이야기(Une histoire de Buffalo Bill Cody)'라는 부제목이 덧붙여져 있다. 독자의 읽는 재미를 위해서 자세한 사정은 말씀드리지 않겠지만, 이 부제목을 의식하면 책의 막판에 나오는 윌리엄 벤틀리의 이야기가 좀 이상하게 읽히는 것 같다. 나는 부제목이 없다고 생각하고 읽었다.

이 두 작품 가운데 프랑스의 유명한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받은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그날의 기억>인데, 미국의 서부시대와 서부극에 관심이 있는 나는 <대지의 슬픔>을 먼저 읽었다. 그게 두 책의 원저가 출간된 시간순서에 맞기도 하다.

에리크 뷔야르는 자기 작품을 소설이라고 하지 않고 '이야기'라고 부른다. 책을 읽어보면 정말로 그렇다.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고 역사서도 아닌, 저자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을 정의하는 개념인 '이야기'는 독자에게 슬픔과 웃음과 당혹감을 뒤섞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 Buffalo Bill's Wild West Show and Congress of Rough Riders of the World 1899 ⓒ역사자료 사진

인디언 추장 시팅 불과 스펙터클의 탄생을 다룬 <대지의 슬픔>의 한 구절을 보자. 1876년 6월 25일의 리틀 빅혼 전투에서 미국 군대에 승리를 거둔 인디언 족장 '시팅 불(Sitting Bull)' 타탕카 이요탕카(Tatanka Iyotanka)는, 결국 미군에 투항한 뒤 '버팔로 빌(Buffalo Bill)' 윌리엄 프레더릭 코디(William Frederick Cody)와 계약을 맺고 일종의 실사판 서부영화라고 할 '와일드 웨스트 쇼(Wild West shows)'에 출연한다. 서구 문명에 속한 관객들을 향해 리틀 빅혼 전투를 재현하는 시팅 불, 그리고 재현된 리틀 빅혼 전투에 흥분한 관객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에리크 뷔야르는 이야기꾼의 화술로 독자들에게 리얼하게 전한다. 이 대목에서 작가가 드러내려 한 것은 "스펙터클"이라는 감각의 본질이다.

조롱의 휘파람과 야유가 쏟아져 나온 것도 그때부터였다. 시팅 불은 태연하게 원형 경기장을 한 바퀴 돌았다. 아무도 그가 인디언 전쟁의 한 장면, 그의 삶의 어떤 순간을 연기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역사'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과거는 계단식 좌석에 둘러싸여 있으며 관객은 그 유령을 보고 싶어 했다. 그것이 전부다. 그들은 유령에게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보려고만 했다. 그들은 잠깐 커튼을 들춰서 인디언을 보려고만 했을 뿐이다. (중략) 군중은 악을 쓰고 욕을 한다. 침을 뱉기도 한다. 전대미문의 일이 여기서 벌어지고 있다. '홍인종', 사람들 말에 따르면 농장 주변을 배회하던 이상한 짐승, 그게 바로 여기에 있다니! 관객을 진정시키려는 프랭크 리치먼드에게 무대 뒤에 있던 버펄로 빌이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속수무책. 인디언 추장은 욕설을 받으면서도 자기가 해야 할 행진 한 바퀴를 끝내 해내야만 했다. 엄청난 소란이었다. 사진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이댔다.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그리고 시팅 불은 천천히 원형 극장을 빠져나갔다. (33-34쪽)

1890년 12월 29일에 미군이 수우 족 인디언 300명가량을 일방적으로 살해한 운디드니 학살을 윌리엄 코디가 '운디드니 전투'라는 콘셉트로 와일드 웨스트 쇼의 무대에 올리는 대목에서, 에리크 뷔야르는 윌리엄 코디가 개발한 이 와일드 웨스트 쇼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리얼리티 쇼'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리얼리티 쇼는 사람들이 "흔히 주장하듯 잔인하고 소비적인 대중오락의 최종 진화형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오락의 기원"이라고. "운디드니의 생존자들은 영원토록, 밤낮 구별 없이 마일스 장군의 레인저 부대로부터 공포탄을 맞아야만 할 것이다. 대형 조명 기기의 힘을 입어 와일드 웨스트 쇼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조명을 이용한 스펙터클, 최초의 야간 공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95쪽)

▲ Sitting Bull and Buffalo Bill Cody in Montreal, Quebec during Buffalo Bill's Wild West Show, 1885 ⓒpinterest.com

스펙터클이라는 개념은 <대지의 슬픔>과 <그날의 비밀>을 이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에리크 뷔야르의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38년 3월 15일,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을 찍은 기록영상을 소개하면서, 작가는 "우리가 더 이상 진위를 구별할 수 없는 이 영원한 영상"(124쪽)이 나치의 유명한 프로파간다 연출에 따른 것이며, 그 전후에 있었던 독일 전차부대의 우스꽝스러운 실패와 적잖은 오스트리아 국민의 저항은 제거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물론 이런 설명은 역사학, 또는 프로파간다 연구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에리크 뷔야르의 '이야기'가 지니는 진정한 매력은 인디언 전쟁과 서부극의 탄생, 또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이라는 역사의 큰 줄기와 한없이 미시적인 사건들을 나란히 놓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과 화가 루이 수테르(louis soutter), 사진가 윌리엄 벤틀리(Wilson A. Bentley) 같은 덜 유명한 인물들을 나란히 놓는 데에 있다. 많은 독자에게 낯설지 않은 스토리를 진행하던 중간에 갑자기, 스토리의 맥락과 관계없어 보이는 미시적인 사건·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다소 당돌하게 끌어와서는 유머러스하면서 감상적으로 장황설을 펼친다.

사실 이것은 우리들이 평소에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다. 우리들이 나누는 대화는 주제를 향해 곧장 달려가지 않고, "여담이지만..." "그러고 보니..."가 뒤섞여 좌충우돌한다. 하지만 에리크 뷔야르의 장황설은 맥락 없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술꾼들의 대화가 아니라, 저잣거리에서 자신을 둘러싼 청중의 긴장 끈을 당겼다 놓았다 하며 청중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고 주머니에서 동전을 끄집어내게 하는 이야기꾼의 기술이다. 이 화법은 단순히 기술을 위한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온갖 종류의 먼지 속에 흩어져 있다"(<그날의 비밀> 117쪽)는 자신의 세계관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가 공들여 고안한 것일 터이다. 내가 <그날의 비밀>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다음 인용문이 작가의 글쓰기가 지니는 특성을 잘 보여준다.

3월 11일, 이날은 길고 길었다! 미클라스 집무실의 시곗바늘은 나무를 좀먹는 애벌레처럼 째깍, 째깍 집요하게 계속 돌아갔다. 미클라스, 그는 전광석화 같은 인간이 아니었고 그저 돌푸스가 오스트리아에 그의 미미한 독재 정치를 안착시키는 것을 방치하면서 단 한 마디도 거들지 않고 대통령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다. 헌법을 위반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미클라스는 사석에서나 비판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노련한 수법! 그러나 미클라스, 그는 묘한 인물이었다. 3월 11일 오후 2시 무렵 모든 사람들이 주눅 들기 시작했고 슈슈니크는 만사에 "예"를 남발하는데 미클라스가 "아니요"라고 한 것이다. 그는 노동조합 운동원 세 명, 언론사 사장 두 명, 정중한 사회민주당 의원 무리에게 "아니요"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히틀러에게 "아니요"라고 한 것이다. 미클라스, 그는 이상한 작자이다. 그토록 미미하고 단순한 단역이자 5년 전부터 죽은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그가 반발한 것이다. 지방 유지다운 기름진 얼굴, 지팡이, 정장, 중절모와 회중시계, 이런 모습의 그가 더 이상 "예"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이란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어떤 멍청한 놈이 갑자기 자아의 심오한 구석을 천착하고 거기에서 뒤퉁스러운 저항 의식, 작은 못, 작은 가시 하나를 찾아낸다. 자, 그렇게 해서 겉보기에는 지조도 없는 작자, 자존심도 없는 바보가 불쑥 머리를 치켜들고 저항한다. 아, 물론 오래가지 않지만 어쨌든 자기 고집을 내세운 것이다. 그날 하루가 미클라스에게는 아주 길었을 것이다. <그날의 비밀> 76-77쪽

▲ Hitler speaks at the Hero's Square (Heldenplatz) in Vienna, Austria, March 1938 ⓒ위키미디어

이 문장을 읽으셨으면 느끼실 터이지만, 에리크 뷔야르의 '이야기'는 그 속에 담긴 메시지 이상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스타일 그 자체로 독자에게 읽는 맛을 준다. 위의 문장에서 작가는 자신의 화법을 통해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이라는 사태의 본질은 물론이려니와, 이 사태가 인간 사회의 근원적 특성들과 어떤 식으로 닿아 있는지까지를 설교조가 아니라 연극적으로 드러낸다. 와일드 웨스트 쇼와 나치 독일의 프로파간다 영화가 공유하는 스펙터클이라는 특성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작가의 이야기 기법이다.

이 서평을 쓰면서, <대지의 슬픔>과 <그날의 비밀>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서평에서 내가 독자들께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 책이 여러분께도 읽는 재미를 드리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다른 작품인 <콩키스타도르>(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스페인 정복자들의 이야기), <서쪽의 전투>(제1차 세계대전), <콩고>(노예제도와 아프리카 식민지화), <7월 14일>(프랑스 혁명), <가난한 자들의 전쟁>(종교 개혁 당시의 이야기) 등도 부디 한국어로 번역되기를 바란다는 바람을 마지막으로 적는다.

▲ <그날의 비밀>, <대지의 슬픔>(이상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열린책들

김시덕

문헌학자, 전쟁사 연구자, 서울답사가. 작게는 시군구(市郡區)에서 크게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집단이 갈등하고 충돌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 직업적으로 책·논문·기사를 읽는 중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는 좋은 글을 발견할 때마다 서평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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