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세운 선조들이 정치적 힘의 세습을 거부했듯이 우리는 오늘 경제적 힘의 세습을 거부한다." 1935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누진 유산세의 개정과 관련해 의회에서 행한 연설의 한 구절이다.
'경영권 신수설'과 '천부 경영권론'
한 사람이 권력과 재력을 갖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우연이 개인적인 행운으로 끝나지 않고 그 권력을 행사하는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유일무이한 근거로 작용한다면, 그 사회는 민주사회가 아니라 권력과 신분이 세습됐던 중세와 같은 사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한국의 재벌들은 이런 구시대의 낡은 논리를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버젓이 재연하고 있다. 재벌그룹을 경영할 수 있는 자격은 한 사람의 능력과 노력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핏줄에 따라 결정되고 그 자격은 결코 타인에게 양도될 수 없다는 '경영권 신수설(經營權 神授說)'과 '천부 경영권론(天賦 經營權論)'이 바로 그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이런 논리를 전파하는 것은 재계의 '돌격부대'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몫이다. 지난주 말 전경련은 '과도한 상속세 부담이 기업경영 의욕을 저하시킨다'며 상속·증여 세제를 개편하자고 주장했다. 그러자 일부 언론들이 이를 '받아쓰기'해 관련 기사와 칼럼들을 쏟아내고 있는 형편이다.
상속세 높다고 투자 기피하면 '배임죄'에 해당
재계가 전파하는 주장의 핵심은 경영권을 상속하는 데 따른 세율이 너무 높아 기업인들의 경영의욕이 감소하고, 나아가 변칙증여의 유인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재계의 주장은 근거가 대단히 빈약하다. 어느 교수가 지적했던 것처럼 "모름지기 사람이란 장차 자기가 죽은 뒤 자식이 낼 세금보다는 당장 자기가 낼 세금을 더 염려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 할지라도 자신의 인생과 자식의 인생을 동일시해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의미다. 따라서 증여세를 걱정해 투자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재계의 주장처럼 유망한 사업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속세를 걱정해 투자를 소홀히 하는 최고경영자(CEO)가 있다면 그는 자신에게 경영권한을 위탁한 주주들에 대한 충실의무를 위반하는 배임죄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높은 상속세로 인해 기업의 투자의욕이 감퇴되고 기업규모를 확대하기 위한 노력이 부진해진다는 것은 상속세를 인하해야 한다는 논거로는 전혀 맞지 않는다. 사실 이런 논리는 상속세가 아니라 소득세를 인하해야 하다는 주장에 쓰여 온 고전적인 논거다. 그러나 높은 소득세와 기업 투자율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소득세 낮춰달라'고 국민에게 사정할 배포는 없나?
그렇다고 재벌 2·3세들에 대한 상속세를 폐지하려고 했던 부시 행정부에 맞섰던 미국 부호들의 연대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을 우리 재벌들에게 요구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미국의 부호들은 상속세의 폐지가 사회적 형평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부모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폐해도 불러 온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경련을 방패로 삼아 여론의 동향을 살필 것이 아니라 직접 국민을 상대로 '시장에서 내 능력으로 경영권 행사에 필요한 지분을 매입하고 싶은데 소득세가 너무 높아 그럴 수 없으니 소득세의 최고 세율이라도 좀 내려달라'고 설득하는 '배포' 쯤은 재벌들에게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힘으로 지분을 살 능력도, 국민들을 설득할 정치력도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자신들만이 기업의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변칙증여의 유혹 받을 만큼 많은 세금 내본 재벌은 없다
재계가 상속·증여 세제를 개편해야 할 명분으로 꼽고 있는 변칙증여의 유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재벌들이 도대체 언제 변칙증여의 유혹이라도 느껴볼 만큼 부담스러운 거액의 상속·증여세를 내봤단 말인가. 세금을 거의 내지 않고도 부를 대물림한 '고전적' 사례라 할 수 있는 삼성 이재용 씨를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지난 4월 참여연대가 발표한 '38개 재벌총수 일가의 주식거래 보고서'에는 재벌의 주력 계열사들이 총수 자녀들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들에 '몰아주기 거래'를 해줌으로써 그 기업의 가치를 키운 갖가지 사례들이 나와 있다. 현행 상속세법의 허점을 이용해 총수의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사례들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재벌들은 상속세율이 높다고 불만을 토로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얼마나 법을 지켰는지를 반성하고 국민들에게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재산권'과 '경영권'을 구별하지 못하는 전경련의 후진성
사실 재벌들도 재벌의 경영권 승계 행태에 대한 비판 여론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계가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은 삼성그룹, 현대차 등 국내 최대 재벌그룹들을 대상으로 한 경영권 승계 관련 소송에서 다소나마 정상참작을 받기 위한 논리를 마련해보려는 궁여지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경련의 주장은 상속세제를 개편해 경영권을 안정시키고 경영권의 상속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바로 이런 주장은 '재산권'과 '경영권'을 구별하지 못하는 전경련의 후진적 시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권은 법에 정해진 세금을 내면 당연히 후손에게 상속할 수 있는 권리다. 반면 경영권은 주주와 이해당사자 등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므로 결코 '상속'의 대상이 아니다. 즉 재벌의 경영권 승계는 상속의 문제가 아니라 주주의 위임 또는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지배구조의 문제인 것이다.
경영능력은 대물림되지 않는다
또한 경영능력은 특별한 제약 없이 양도할 수 있는 지분과 달리 후손에게 대물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만약 전경련의 주장이 재벌 총수의 자식들이 어떤 경우에라도 그 기업집단의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다(혹은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이들은 재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공정경쟁을 통해 효율성을 증진하도록 한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질식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회의 비판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황제경영'을 옹호하는 전경련을 보면서 이들이 진정으로 수호하고자 하는 가치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인지, 아니면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는 따로 있다'는 전근대적 가치인지 헷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한국경제 못 맡겨
지난 30년 동안 재벌들이 맹신해 온 두 개의 이론이 있다. 하나는 '대마는 쉽게 죽지 않는다'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요, 다른 하나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믿음이다. 대마불사의 신화는 IMF 외환위기라는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난 후 사라졌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관념은 살아남아 여전히 우리 사회를 맴돌고 있다.
시장경제와 공정경쟁을 거부하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경영능력에 대한 검증도 없이 국가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기업집단의 경영권을 맡기는 것은 그 기업(집단)과 국민경제에는 물론 재벌 2, 3세 개인에게도 IMF 경제환란 이상의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재벌체제의 개혁이 필요한 이유다.
(이 글은 참여연대 인터넷 게시판에도 동시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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