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나 문자의 경우 그것을 보고 읽는 사람에게 일정 정도의 준비를 요구한다. 그림을 보는 방법이나 문자를 읽고 해독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진의 경우는 거의 즉물적이다. 사진은 감각에 곧바로 호소하고 행동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론상 무한한 복제가 가능해 분류나 비교에 있어서의 능력도 탁월하다.
사진 발명 직후부터 사진을 예술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생겨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진예술 혹은 예술사진이라는 말이 아주 익숙한 용어가 되어 있다. 사진학 하면 예술사진을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진은 근대의 가장 편만한 역사 서술 자료로서 기능해 왔고 또 사진을 빼고는 근대 이후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이런 역사 기술의 자료로서의 사진이 아카이브 사진이다. 이 아카이브 사진에 대한 관심은 서양의 경우 1970년대 이후 급격하게 증가한다. 미셀 푸코에 의해 감옥, 병원 등의 형성 과정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고, 그에 따라 사진이 분류되고 재해석된 것이다. 이 후, 사진사는 어떤 대가나 특정 장르에 따라 사진을 분류하는 것에서 사회 전체의 구조에 따라 분류하는 방식으로 그 영역을 확장한다.
사진을 예술의 좁은 영역에서 해방하여 일상과 역사의 영역으로 되돌려준 것이다. 아니 어쩌면 사진은 원래 그런 넓은 영역에서 존재해 온 것이었는데, 그런 사실이 새롭게 발견되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사진사 서술의 태도를 두고 말한다면, 사진을 예술로 보는 갈래와 사진을 역사 자료로 보는 갈래의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되어 있다.
공간적 이국정취-시간적 이국정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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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제국주의 식민화에 유용하게 쓰였다. 사진 발명 직후부터 서양은 그들의 식민 사업에 사진을 적극 이용했다. 처음에는 전반적인 개요를 작성하는 자료로 썼고 나중에는 여러 가지 자원의 분류와 저장에 사진을 이용했다. 여기에는 인물 사진뿐 아니라 동식물과 주거, 심지어는 풍경 사진도 포함된다. 여러 사진가들이 식민지를 여행하여 사진을 남겼는데 공식적으로 정부 지원을 받아 그런 분류 사진을 찍었던 사람들도 많다. 지금은 저명한 예술 사진가로 자리 매김한 서양 사진가들의 사진들 중에는 실제로 식민지 사업의 실용적인 목적에 의해 촬영된 사진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유럽의 경우,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찍어둔 이런 사진들이 지금은 예술사진으로 팔린다.
사진사는 이제 겨우 160년을 넘기고 있다. 아주 단출한 역사다. 그래서 사진사는 그 내용에 있어 그리 복잡하지 않다. 다만 그 기술의 관점이 무엇인가만이 문제가 된다. 길이로만 따진다면, 한국의 사진사 역시 서양에 뒤질 것이 없는 역사다. 거의 근대만의 역사이고 거의 동시대의 역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웃 일본이 그들의 관점에서 잘 정리된 그들 자신의 사진사를 갖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런가. 처음 사진을 받아들일 때의 입장이 식민자와 피식민자로서 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이경민이 정리해 내놓은 근대 사진 관련 신문 기사 색인집 <구보씨, 사진 구경 가다>(아카이브북스 펴냄)를 보면 이런 사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경민은 우리 사진의 아카이브적 의미 부여와 그 발굴과 정리에 자신의 역량을 여러 해 동안 집중해 왔거니와, 이번에 발간된 색인집은 제대로 된 우리 사진사 기술의 밑감이 될 자료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번 자료집은 1883년부터 1945년까지 발행된 우리 일간지에서 사진과 관련된 주요 키워드들을 검색하여 묶은 작업이다. 엮은이는 자료만이 말하게 하는, 말 그대로의 색인집으로서의 본령에 충실한 책이다. 따라서 독자들의 상업적 흥미를 유발케 하려는 의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촘촘히 박혀 있는 2400여 개의 신문 기사 제목과 희미한 옛 신문의 활자들을 가만히 읽어나가노라면,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기의 우리의 모습, 그 지난 60여 년의 굴욕의 세월이, 우리 어두운 근대사의 여러 단면들과 함께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문자로 된 역사 기술이 전하지 못하는 사진 이미지의 직접성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제하의 사진들은 많이 있다. 흥미를 끄는 제목들도 여럿 눈에 띈다. 사진기 도난 사건, 자살자의 품에서 발견된 애인 사진, 사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결혼 이야기, 경찰의 사진기자 구타 사건, 신문 정기 구독자에 대한 사진 촬영 할인 혜택, 마르크스 사진 소지자에 대한 단속, 조선의 주요 시설을 촬영하다 단속된 서양인들, 사진 강습회 및 사진 전람회 광고 기사, 사진 잘 찍는 방법에 대한 안내 기사 등이 대종을 이룬다.
그 가운데는 일제 하에서 사진과 관련된 정치 사건으로 유명한 '박열 사건'도 비교적 큰 비중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기사들에 대한 흥미는, 앞서 언급한 제국주의 입장에서의 서양인들이 당대의 미개인들의 독특한 습속에 대해 느끼는 흥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뉴기니 원주민들을 찍은 어빙 펜의 사진에 보이는 서양인들의 흥미가 공간적 이국정취라면, 우리의 흥미는 시간적 이국정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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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가. 우리 자신의 지난 모습을 찍은 사진들인데 왜 그런 이국정취인가. 여기에 모여 있는 사진은 일정한 금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사진, 식민자가 그어놓은 금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사진들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우리 대다수의, 어쩔 수 없이 묶여 있던 제한된 모습만을 반영하고 있는 사진들이기 때문이다.
사진 행위를 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역사를 제대로 쓰지 않은 사진사의 음지가 세계 도처에 있다. 이른바 피식민자의 사진사다. 전체 사진사 기술에 있어서 그런 음지의 역사에 대한 고려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피식민자의 사진사는 자신의 것을 사상(捨象)한다.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역사 쓰기의 방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기력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시절의 식민자의 관점이 오늘도 우리의 지침이 되어 그들의 기교를 배우는 데 시간과 정력을 소진하기 때문이다. 그것 외의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역사에 대한 연구와 기술을 외면하는 전도된 의식으로 학위를 하고 학생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설사 고의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사진계의 이런 집단적 경향은 학문적 우선순위 설정에서의 도착된 모습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식민자들은 그들이 찍은 피식민자의 사진에 자를 들이대어 치수를 쟀다. 그리고 치수에 의해 분류된 사진들을 식민 행위에 재투입했다. 그들은 이른바 대상화로서의 사진 행위를 했다. 그 대상에는 사람뿐 아니라 동식물과 주거, 심지어는 풍경까지도 포함된다. 이른바 풍경의 식민화가 사진을 통해 이루어졌다.
피식민자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반영성으로서의 사진 행위, 자의식을 반조하는 사진 행위뿐이었다. 그것은 스튜디오에서의 초상 사진으로 나타난다. 타자에 의해 그어진 금 안에서의 순연한 자체 내적 효용으로서의 사진 행위였고, 거기에는 구조적인 의미를 생각하는 자발적인 분류의 자가 필요 없었다. 이런 피식민지에서의 초상사진 유형은 식민 시대를 겪었던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통된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말리에서 수십 년간 초상 사진을 찍었던 세이두 케이타나 우리나라의 정해창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사진, 역사 그 자체
우리 사진의 역사를 재정립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그런 작업은 어느 몇몇 대가 사진가들의 연보로서 존재하는 사진사가 아니다. 역사 구성의 밑감으로 쓰일 수 있는 사진, 이름 없는 사진가들에 의한 사진, 그 익명의 사진들이 다시 모여지고 재정리되어야 한다. 서양 사진사에서도 이런 익명의 사진가들의 사진에 대한 재기술의 중요성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거니와, 식민지 시대를 겪은 우리의 경우, 장르 중심이나 저명 사진가 중심의 기존 사진사 기술 방식으로서는 제대로 된 사진사 기술은 어렵다.
어느 봄날 오후 나른한 공기 아래 찍힌 기생의 아리따운 뒤 자태뿐 아니라, 님 웨일즈가 마치 반듯한 조각상 같았다고 찬탄해마지 않던 실패한 조선 혁명가 김산의 초상과 같은 그 잊힌 사진들, 이른바 식민자가 그어놓은 금 밖의 사진들이 이윽고 한데 모여 우리 사진의 역사가 씌어 진다면, 분명 균형 잡히고 풍부한 제삼세계 사진사의 한 전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찍은 사람의 이름이 남고 그것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찍힌 사람 혹은 찍힌 삶 자체가 중심이 되어 기술되는 그런 역사를 말한다. 이경민의 이번 색인집은 그런 사진사 쓰기의 한 단초가 되는 작업이다. 구조주의 사진사가 존 탁은 "사진은 역사를 기술하는 자료가 아니라 역사 그 자체다"라고 말했다. 이 색인집을 통해 존 탁의 그 말을 재음미하게 된다.
필자 김우룡은 서울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뉴욕 국제사진센터(ICP)를 수료했다. 현재는 사진가, 가정의학전문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꿈꾸는 낙타>, <사진과 텍스트>, 역서로는<의미의 경쟁>, <사진의 문법>, <포토아이콘Ⅰ, Ⅱ>, <글로 쓴 사진>, <나는 다다다>, <열화당 사진문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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