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뿐만이 아니다. 이미 1980년대 초부터 초중고등학생들이 입시지옥 때문에 수백 명씩 자살했다. 당시에도 우리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고, 학생들의 자살 행렬을 막기 위해 입시위주의 무한경쟁 교육과 감옥 같은 학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제자들의 목숨을 살리고 참교육을 하겠다고 자기희생을 무릅쓴 교사들의 교육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전교조가 탄생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 교육당국은 학생자살의 원인이 비민주적인 학교제도와 입시위주의 경쟁교육 때문이 아니라 학생들이 심약한 데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책임을 학생 개인과 부모에게 전가했다. 그리고 학생자살에 대한 예방책으로 호된 극기 훈련을 실시했다. 결국 경쟁위주의 감옥 같은 학교체제는 전혀 변화되지 않았고, 이와 같은 반교육적 정책은 학생자살을 더욱 증가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폐지되었다. 이후 학생들의 자살문제는 너무도 일상처럼 취급되어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국민들 역시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학생 절반이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우리 교육
그런데 KAIST 대학생 자살 문제가 언론에 연일 보도되면서 우리사회가 다시금 학생 자살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KAIST 대학생 자살문제 해결이 '서남표식 교육개혁'의 포기냐 아니냐, 또는 학생들이 심약한 것이 문제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결론 나서는 안 된다. 이들의 자살은 KAIST만의 문제가 아니라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잘못된 우리나라 학교교육제도에 대한 고발이기 때문이다.
한편 잘못된 학교교육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은 학생들만이 아니다. 막대한 교육비 부담 때문에 가정이 파탄되고, 학부모들이 자살하는 수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심지어 이런 살인적 교육 환경에서 어렵게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을 했는데도 취업이 되지 않아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하는 청년들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것이 중학생의 98%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 졸업생 85%가 대학 진학하는, 전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고 교육열이 가장 높은 우리나라 교육의 진면목이다.
정부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현재 드러난 학생 자살의 수는 빙산의 일각이고,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학생들이 전체 학생의 절반 가량이나 된다. 그러므로 이제 학생 자살은 '너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심각하게 인식하고 죽음의 무한경쟁을 하는 이 잘못된 학교교육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에 또 다시 학생자살 문제를 과거처럼 언론보도가 잠잠해짐과 동시에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슬쩍 넘어가면 이 문제는 분명히 더 큰 사회적 재앙이 될 것이다.
▲ 비싼 등록금 때문에 자살한 대학생들을 추모하며 묵념하고 있는 학생들. ⓒ뉴시스 |
오늘의 세계는 이미 산업사회에서 지식정보사회로 급변하고 있기 때문에 산업사회에 맞게 만들어진 지금까지의 학교는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창의적 지식과 정보 생산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과거 산업사회 제도의 학교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마치 경쟁이 개혁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경쟁만을 강화하면 학생과 부모들의 자살이 증가할 뿐 아니라 국가 사회 발전에도 큰 병폐가 될 것이다. 그런데 학생자살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잘못된 교육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지금까지 과거의 학교가 강화된 것은 무엇보다도 과거 학교가 가지고 있던 좋은 신화의 미혹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거짓이 돼버린 학교의 다섯 가지 신화
전통적으로 학교는 다섯 가지 신화를 가지고 있다.
첫째, 학교는 학생의 인성과 사회성을 함양시킨다.
둘째, 학교는 진리를 탐구하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전문지식과 능력을 길러준다.
셋째, 학교는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고, 노력에 따라 신분상승의 통로가 된다.
넷째, 학교는 국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다섯째, 학교는 인류 문화유산 전승과 인류사회 발전에 기여한다.
그러나 오늘, 특히 우리나라에서 학교의 이 다섯 가지 신화는 모두 거짓이 되었다.
첫째, 현재 학교는 학생의 인성과 사회성을 함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에 인격적인 만남과 소통을 단절시키고 치열한 성적경쟁만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이기심과 적개심을 더 고취시키고 있다. 학교에 가야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옛말이고, 학교는 오로지 성적경쟁으로 학생을 비인간화 시키고, 반사회적 존재가 되게 한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더불어 사는 능력은 세계에서 꼴찌로 평가되었다.
이렇게 학교는 사람됨과 공동사회 가치추구가 아니라 이기적인 이익집단으로 전락했고, 진리의 전당이 아니라 사람을 상품화시키고 상품화된 교육을 사고파는 시장이 되었다. 그리고 겉으로는 공교육 운운 하지만 실제로는 학원과 참고서가 학교교육을 지배하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인간성을 함양하고 자기실현의 희망을 가지고 더불어 행복하게 생명의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경쟁에서 이겨야한다는 맹목적 성적경쟁만을 하며 교육시장의 희생자가 되어 죽어가고 있다.
2억 6천만 원짜리 바보증명서
둘째, 교육이 상품이 된 타락한 학교, 가치가 존재할 수 없는 학교에서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학교는 학생들에게 비판적 의식과 창의적 사고보다 학습기계 또는 학습로봇처럼 되기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 탐구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산업사회에서는 지식과 정보가 학교에서 생산되었지만, 지식정보사회에서는 학교 밖에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더 많이 생산되고 유통되고 있다. 학생들은 인터넷 등의 네트워크 시스템을 통해 학교라는 시간과 공간의 3차원적 제약을 넘어 언제 어디서나 쉽고 편리하게 유비쿼터스(ubiquitous)적으로 인류의 훌륭한 지적 문화유산과 현실에 필요한 세계적 수준의 전문지식 및 정보를 습득하고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지식과 정보습득에 사용되는 비용은 무료이거나 아주 저렴하다. 그러나 학교는 비싼 교육비를 받으면서도, 급변하는 세계 현실을 외면하고 과거의 교과서 지식만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학교가 학생들의 사회적 전문지식과 능력을 키워준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도리어 학교는 학생들이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창의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빼앗고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선생들이나 학부모들이 이런 학교의 비인간적, 비교육적, 비효율적 현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평균 2억 6천만 원씩이나 내고 학생들에게 살인적 경쟁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서로 속고 속이면서 비싼 학비를 내고 죽음의 경쟁을 계속하는 것은 정말 실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졸업장, 학위증명서 하나 때문이다. 졸업장, 학위증명서는 과거에 학교라는 제도적 가치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오늘의 지식정보사회에서 이것은 도리어 바보 증명서에 불과하다. 지식정보사회에서 학교에 오래 다녔다고 하는 것은, 그 만큼 오랜 기간 동안 비인간화 되고 반사회적 존재가 되고 교과서만의 과거 지식에 사로잡혀 급변하는 현실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학생들은 대학 졸업장이 별로 효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졸업장외에 각종 스펙을 쌓기 위해 또 다른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학생들은 스펙 중에 제일 무가치한 것이 석사학위증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미 학교가 진리를 탐구하고, 전문지식과 능력을 길러준다는 신화는 거짓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 학생 자살을 소재로 삼은 영화 <여고괴담5-동반자살> 포스터 |
셋째, 학교는 모든 학생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근본적으로 서민과 빈민의 자녀가 정상적으로 다닐 수 없는 제도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전일제 학교 수업제도는 가사노동과 가정경제를 도와야 할 빈민과 서민의 자녀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제도이다. 또한 이 학생들은 방과 후에도 공부만 할 수 없고, 가정환경도 열악해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한다.
또한 '표면적인 교과과정'(manifested curriculum)은 평등한 것 같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 내용과 방법의 이면에 숨겨진 문화, 가치, 이데올로기, 곧 '숨겨진 교과과정'(latent curriculum)은 중산층 이상의 문화와 가치 그리고 생활양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서민과 빈민의 자녀는 그런 내용과 방법을 이해하고 습득하기가 더 어렵다. 이 결과 이들은 필연적으로 경쟁에 뒤쳐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학교보다 학원과 개인교습에 의해 좌우되는 입시위주의 교육제도에서 빈민과 서민의 자녀들은 기회의 불평등 문제 정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기회를 가질 수조차 없다. 그리고 학교를 얼마나 오래 다녔느냐 하는 것은 실제로 실력과 상관없이 가정의 경제력이 결정하기 때문에 빈민과 서민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일찍 탈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학교는 모든 학생들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주고 있다는 것은 거짓이다.
현재 우리나라 학교는 1등 한 사람을 위해 나머지 학생들을 상대적으로 열등한 바보로 만드는 피라미드 등급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불평등한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해 학생들의 실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절대평가를 하지 않고 다른 학생과 비교해서 차별적으로 등급을 매기는 상대평가를 한다. 학교가 학습구조를 원통형이 아니라 피라미드형으로 하고 상대평가를 하는 것은 또 다른 숨겨진 의도가 있다. 그것은 성적의 명분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동시에 불평등한 사회체제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학교의 성적 또한 학생의 학업능력과 노력보다 가정의 경제력이 좌우한다.
따라서 학교는 모든 학생들에게 사회적으로 신분상승할 수 있는 기회의 사다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는 처음부터 빈민과 서민의 자녀들이 기회의 사다리를 쳐다보지도 못하게 한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은 옛말이고, 학교가 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가르치는 것은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체념적 인생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사회구조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불행한 운명과 무능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학생, 선생, 학교는 서열화 경쟁을 하지 않는다
넷째, 지금까지 학교는 국가 사회발전에 원동력이 된다고 믿어 왔다. 일반적으로 자본도, 자원도 없는 우리나라가 이 만큼 경제 성장하게 된 것은 학교교육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 측면에서는 사실이나 다른 면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무엇보다 학교가 피라미드 경쟁체제로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빈곤을 양산하는 주범이 되고 있기 때문에 국가 사회발전에 기여하기보다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야기하고 비인간적 사회를 만드는 역기능을 하고 있다.
또한 이미 앞에서 분석한 대로 학교는 지식정보사회에서 지식과 정보를 습득, 생산, 활용하는데 기여하기보다 방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고등학교 졸업자 85%가 대학을 가야하는 과잉학교교육(over education)은 과도한 입시경쟁, 막대한 교육비, 고학력 실업의 악순환으로 국가와 사회에 큰 병폐가 되고 있다. 실제로 학교교육에 80조나 투입하지만 대학졸업자의 절반 이상이 졸업과 동시에 실업자가 되고 있다. 현재 고학력 실업자가 300만 명을 넘고 있다. 그럼에도 학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인구에 비례해서 대학생 수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본래 대학의 목적은 취업이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자율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대학은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대학의 자율성을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대학은 취업학원처럼 되어버렸다. 특히 명문 대학생들과 그 졸업생들은 국가와 인류 사회에 기여하는 책임의식을 갖기보다 입신출세만을 위한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대학교육 발전이란 명분으로 이들 명문대학에 국민세금으로 엄청난 교육비를 지원하고 있다. 정부의 대학지원비도 부익부 빈익빈이다. 이것은 부도덕하고 불의한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대학과 대학생들에게 교육비를 지원하려면 엄격하게 국가 사회에 기여한 업적에 대한 평가를 해야 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너무도 많은 대학들이 난립하고 있다. 4년제 대학만 200개가 넘고, 전문대까지 포함하면 300개가 훨씬 넘는다. 2016년부터는 대학입학정원이 남아돌게 된다. 따라서 대학개혁과 함께 정부의 교육재정 정책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불필요한 대학 수를 줄이고 국가 교육재정을 대학보다 초중등교육에 더 많이 투여해야 한다. 그래야 '바보 평준화'가 아니라 '모두가 우수한 평준화' (Excellence for All)의 학교가 될 수 있다.
현재 학교교육에 소요되는 총비용은 연간 80조인데, 이중 정부예산이 40조이고 나머지 40조는 학부모가 부담한다. 학부모 부담 분 중 공교육비가 20조이고 사교육비가 20조이다. 사교육비 20조는 거의 입시를 위한 학원 및 개인교습 비용이다. 과거에도 개인교습을 하거나 학원에 다닌 학생들이 있었지만 그 수는 소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학생이 입시 때문에 학원에 다니거나 개인교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교육현실이 되었다. 따라서 입시정책만 바로 잡으면 학부모들이 최소한 사교육비 20조는 더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
▲ 등록금 인상에 항의해 학생들이 명동에서 펼친 플래시몹에서 등장한 팻말. ⓒ뉴시스 |
한편, 우리나라 학교는 절대적으로 미국과 유럽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교육이 문화적 식민주의를 심화시키고 있다. 학교교육은 우리 문화와 역사 그리고 학문의 전통을 무시하고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마저도 상실하게 한다. 그리고 문화적 식민의식 때문에 비싼 학비를 내고 살인적 경쟁까지 하면서 취득한 국내 학위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또 다른 해외유학 경쟁을 해야 한다. 현재 미국과 영국 등 해외 유명 초중등학교와 대학에는 한국 유학생들이 제일 많다. 그래서 미국의 하버드 대학을 비롯한 해외 유명대학의 총장과 입학관계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적극적으로 학생 모집을 하고 있다. 이것은 80조나 투입한 우리나라 교육이 해외 다른 나라 학교들의 교육발전과 재정,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나라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모순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학들이 세계적으로 대학경쟁력을 높인다고 국제적 평가경쟁을 하는데, 대학 존재의 근본목적에 대한 평가와 경쟁은 외면하고 양적인 외형과 입신출세의 결과에만 몰입하는 반인간적, 반사회적 경쟁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미국과 영국은 일부 사립학교 중심으로 소위 명문대학 경쟁을 하지만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대학들은 서열경쟁을 하지 않는다. 유럽의 대학들은 각기 특색 있는 명문대학이다. 유럽대학의 교수들은 미국 대학처럼 SCI급 국제학술지 또는 이에 준하는 학술지에 논문을 몇 편 게재했는가 하는 것으로 대학교수를 평가하는 것은 교수를 바보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어떻게 일 년에 몇 편씩 논문을 쓸 수 있으며 그런 교수가 세계적으로 저명한 교수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교수 평가는 논문 편수, 곧 양적인 평가가 아닌, 학생들과 학계에서 질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이들은 미국과 영국이 학생과 교수 및 대학을 서열화 하는 것은 사회적 특권귀족 제도를 유지하려는 숨은 의도라고 비판한다.
교육의 목적인 사람과 가치를 외면하고 다른 사람과 우열의 경쟁만을 하는 것이 목적이 되면 선생과 학생, 학생과 학생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왜곡되고 경쟁의 결과는 타락과 부패일 수밖에 없다. 교육에서 진정한 경쟁은 타자와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와의 경쟁이다. 다른 학생, 다른 학교, 다른 대학과의 무한경쟁만이 개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쟁 만능주의 교육은 학생, 선생, 국가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고 부패하고 죽어 가게 하는 것이다.
서구식 교육내용의 맹목적 수용은 위험하다
다섯째, 학교가 인류문화 유산을 전승하고 발전시킨다는 신화는 거짓이다. 서구식 학교는 서구문화와 문명만을 인류유산으로 생각하고 비서구의 문화와 문명은 미개한 것으로 파괴했다. 서구의 물질문명은 정신문명을 고갈시키고 파멸시켜 인류를 타락시켰다. 학교는 다른 사람과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이 인간다운 것이고, 보다 많이 정복하고 지배한자를 위대한 영웅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 결과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지배, 피지배계급 체제가 정당한 질서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제국주의, 식민주의 시대가 끝난 것 같지만 학교교육은 이것을 문화적, 내면적으로 온존시키고 있다. 학교를 통한 문화적 식민주의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서구문화를 흠모하게 만들기 때문에 제국주의에 저항하기보다 스스로 자기들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고 자기들의 문화와 역사를 야만시하고 천대하게 한다.
이렇게 학교는 인류사회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서구를 발전시키고 비서구를 서구에 예속시켰다. 그럼에도 비서구의 나라들은 학교교육만이 살 길인 것처럼, 서구식학교를 뒤쫓아 가기 위해 국가경제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막대한 교육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학교는 국내적으로도 빈곤양산의 주범이지만 지구의 절반에 이르는 굶주림도 학교가 양산하고 있다. 특히 학교의 '숨겨진 교과과정'은 남성, 백인, 지배층 중심의 문화와 이데올로기로 되어있기 때문에 성적이란 이름으로 성차별, 인종차별, 계층 차별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또한 자연정복을 인간의 위대함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자연이 파괴되고 죽어가고 있다. 자연의 파괴와 죽음은 인류의 파멸과 직결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류사회 발전과 미래를 위해서 학교의 거짓 신화는 조속히 깨져야 한다. 전쟁의 진정한 용사는 무명용사이듯이 국가사회와 세계인류 발전에 진정으로 기여한 사람들은 국내, 국제적으로 명문학교, 명문대학 출신들이 아니라 무학자거나 저학력자들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겨 보아야 한다.
학교, 어떻게 바꿀 것인가: 7가지 제안
학교 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산업사회의 필요에 따라 기계적 인간을 대량생산하는 체제로 만들어진 학교를 지식정보사회 특성에 맞게 창의적이고 네트워크적인 교육체제로 바꾸는 것이다.
▲ 체험학습에서 도룡뇽 서식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학생들. ⓒ뉴시스 |
1. 조기 입학과 학제 연한 축소
첫째는 조기 입학과 학제 연한 축소이다. 오늘의 시대는 우리나라에 공교육 학교제도가 도입된 100년 전과는 달리 어린이들의 지적, 신체적 발달이 빠르기 때문에 과거보다 조기에 학교에 입학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지식과 정보가 학교 밖에서 더 많이 생산되고 유통되고 있기 때문에 학제를 길게 연장하는 것은 교육적 차원만이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낭비이며 도리어 역기능으로 작용한다. 지식정보사회에 합당한 학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0-2세 가정보육/ 3-4세 공보육, 교육/ 5-9세 초등교육(5년)/ 10-14세 진로, 직업교육을 포함한 중등교육(5년)/ 15-17세 대학교육(3년)/ 18-20세 석박사 과정을 통합한 대학원교육(3년)
이 학제에서 3세부터 14세 중등교육까지 12년은 무상의무교육으로 실시하고, 모든 각급 학교 교육과정에서 방학을 축소하고 3학기제로 운영한다. 이것은 유럽의 학제와 거의 같다. 유럽의 대다수 대학들은 석사과정이 별도로 없고 박사과정과 통합 운영한다. 그리고 영국은 일찍부터 대학과정이 3년이다.
우리나라는 대학입학을 위해 재수, 삼수하는 학생들이 평균 30%가 넘고, 남학생 경우 군대에 의무복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면 거의 30세가 된다. 서구는 20세 이전에 대학을 마친다. 과거에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지식정보사회에서 10년이란 하늘과 땅 차이만큼 격차가 난다. 국경이 없는 세계화된 시대에 우리나라의 학생들이 지금과 같은 학제에서 10년이나 뒤지면서 서구학생들과 세계적 경쟁을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학제를 줄이고 무상교육을 확대하면 교육재정에 대한 국가, 가정경제의 부담도 줄고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교육재정을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학생들이 보다 일찍 사회에 진출하면 개인과 국가 경제발전에 더 많은 역할을 하게 되고, 특히 고령화 사회에 경제사회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아울러 청소년 문제도 예방하게 된다. 청소년 문제의 주요 원인은 신체적, 지적발달 면에서 이미 성인된 청소년을 미성년자의 범주에 오래 가두어 놓는 데 있기 때문이다.
2. 사람과 가치관의 회복
둘째는 사람과 가치관의 회복이다. 오늘 학교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사람과 가치관이 실종된 것이다. 경제적 이익추구와 경쟁만이 지배하는 학교에서 인간을 회복시켜야 한다. 학교는 인권, 자유, 정의, 민주주의, 공동체, 평화, 환경-생명의 가치교육을 교과서지식 주입보다 모든 교육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또한 잃어버린 정신문명을 회복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각 연령별, 각 학교 단계별 발달을 고려하면서 철학, 문화예술, 종교를 기본교양으로 가르쳐야 한다.
3. 기초교육 강화
셋째는 기초교육 강화이다. 학교에서 제일 중요한 기초교육은 읽고, 쓰고, 셈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학교에서 가르치는 읽고, 쓰고, 셈하고는 기능만 익힐 뿐 원리를 깨우치는 교육은 하지 않는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와 세계를 읽고 쓰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학생들 대다수는 주입식교육으로 대학을 졸업해도 자신과 사회와 세계를 읽고 쓰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리고 셈하는 것도 숫자 계산하는 기능만 익히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이런 계산 기능은 전자계산기와 컴퓨터가 다 해결해 준다. 본래 셈하는 수학이 기초교육에 포함된 것은 인간과 자연의 원리 파악과 논리적 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셈하는 교육은 바로 철학과 직결되어 있다. 과거에는 수학과 철학이 하나였다.
또한 학교는 기초교육으로 대화와 의사소통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대화와 토론이 없는 교육, 그리고 선생과의 대화가 부재한 학교생활을 했기 때문에 대화와 의사소통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리고 세계화시대에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세계와 소통하고 협력하고 경쟁하며 살려면 영어 이외에도 필요한 외국어를 배우도록 해야 한다. 유럽의 학생들은 초등학교부터 모국어와 함께 최소한 2-3개 외국어를 배운다. 이것이 유럽통합 EU 탄생의 기반이 되었다.
현재 EU에 속한 나라의 대학생들은 다른 나라 대학에 가서 1학기 이상씩 배우는 '에라스무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안 되려면 불필요한 과거지식 교과목은 과감하게 줄이고 외국의 문화와 함께 배우는 생활 외국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문화예술과 과학도 기초교육에 포함시켜야 한다. 오늘의 시대는 문화의 시대로 문화가 모든 힘의 근원이다. 과거에는 경제가 문화를 이끌었지만 오늘의 시대는 문화가 경제를 이끈다. 역사도 정치경제사적인 인식을 넘어 문화로 인식해야 한다. 또한 오늘의 시대는 과학기술이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발달하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기본지식과 미래를 대비하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하다. 과학에 관심과 재능이 있는 학생은 예능분야처럼 과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과학기술이 우리나라 미래를 좌우하기 때문에 과학기술자들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
4. 국정, 검인정 교과서 폐지와 교과목 축소
넷째는 국정, 검인정 교과서 폐지와 교과목 축소이다. 현재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같은 국정, 검인정 교과서제도를 가진 나라는 없다. 국정, 검인정 교과서 제도는 국가주의 산물이다. 국가에 의한 시각과 내용으로 고정된 국정, 검인정교과서로는 다양한 세계 인식과 급변하는 지식정보사회에 창의적으로 대처할 능력을 키워줄 수 없다.
현재 학교는 쓸모없는 교과과목을 너무 많이 가르치고 있다. 현행 선택교과는 학생의 학습권을 존중하고 수업 부담을 줄이려고 한 정책인데 도리어 입시와 연관되어 교과목이 더 많아지고 있다. 20여개 교과과목의 교과서를 배우는 학생은 전 세계에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많은 교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학생을 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교사, 학원, 참고서 업계의 이익이 앞선 것이다. 교사들은 학생을 뒷전에 두고, 자기과목을 입시과목이 되게 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인간발달과정에서 10대까지가 가장 지적 발달이 빠르고 자기다움을 확립하는 중요하고 아름다운 시기인데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일찍부터 교과교육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다. 과거에는 전문성이란 이름으로 모든 지식의 내용을 세분화시켰지만 이제는 모든 지식과 정보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전체를 모르면 부분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많은 교과목의 단편적 지식전달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와 세계를 바로 알고 지식을 창의적으로 생산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원리와 방법을 배우는 통합교육을 해야 한다.
5. 유비쿼터스 시스템과 네트워크 공동학습 방법 도입
다섯째는 교육제도와 방법을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ubiquitous)시스템과 네트워크 공동학습 방법(SNS-social network service)으로 바꾸어야 한다. 과거 산업사회 학교는 기계적 대량생산 활동에 필요한 노동력을 위해 동일한 장소와 시간에 집단적으로 모여 획일적으로 지식을 대량 습득하는 교육방법이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지식정보사회에서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갇힌 획일적인 대량생산 방식의 교육방법은 도리어 창의적인 지식과 정보 습득 및 활용에 장애가 된다. 지식정보사회의 학교는 유비쿼터스 원리체계와 시스템으로 개혁되어야 하고 그 기반에서 함께 토론하는 공동학습과 흩어져 자유롭게 탐구하는 개별학습, 교실학습과 현장학습, 실험학습과 직업체험학습 등 선생의 일방적 주입과 전달이 아니라 선생과 학생이 함께 토론하고 탐구하는 SNS 교육시스템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6. 새로운 교사 양성 시스템
여섯째, 지식정보사회와 미래를 위한 교사, 교수를 양성해야 한다. 현재의 교사양성 과정은 과거 산업사회 학교제도에 맞춘 것이기 때문에 지식정보사회에 맞게 새로운 교사양성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교사양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가 먼저 지식정보사회와 급변하는 현실과 미래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사는 학생과 인격적인 만남과 대화를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지금까지 초중등교사 양성과정은 교과지식 습득과 교사자격 취득 목적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사로서의 인격함양, 사람읽기와 세상읽기, 의사소통과 대화하는 방법은 결여되었다. 오늘의 선생은 교과지식보다 인생의 선생이 되어야 한다. 선생은 교과서 이전에 학생을 먼저 보고, 이해하고, 만나고, 대화해야 한다. 또한 세상을 읽고, 세상과 대화하고, 세상사는 법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의 본래적 가치를 회복하고, 창의적 탐구와 토론 방법, 유비쿼터스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원리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배워야 한다. 특히 체벌이 없으면 교육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은 교사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교사는 짐승을 훈련시키는 사육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생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학생을 절망시켜서도 안 된다.
이제는 대학교수도 달라져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사학위가 마치 대학교수 자격증처럼 인식되고 있는데, 사실 박사학위는 학문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는 의미 정도이다. 그런데 박사만 하면 대학교수가 되려고 하고, 대학교수를 이렇게 임용되다 보니 학생들은 교수 개인의 관심에 따른 세분화된 특정분야의 단편적 지식만 전달받는 병폐가 만연해져서 대학의 본래 목적은 사라지고, 연구와 교수의 질적 저하도 가속화되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학점이수와 성적 그리고 졸업장 때문에 이런 교수들에게 절대적으로 예속당해 있다. 특히 대학교육의 1/5 이상이 시간강사들의 강의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대학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토론과 공동연구를 통해 창의적으로 지식과 정보를 생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해외 대학교수들이 우리나라 학생들에 대해 말하는 공통적인 평가는 머리가 우수하고 주어진 과제는 잘하는데 스스로 하지 못하고, 창의적이지 않고, 공동연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머리가 우수하고, 지적 모험심도 가장 많은 우리나라 학생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교수들의 책임이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 우리나라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거의 모든 지식은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무료 또는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습득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 사회적으로 학력차별을 근절시키면 상당수의 대학은 존재하기 어렵게 된다. 이것은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런 대학의 위기적 현실을 직시하고 교수의 자질과 능력 그리고 교수임용 방법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미국도 그렇지만 유럽대학의 교수들은 사회적으로 존엄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교수들도 학문적, 인격적, 사회책임적 존재 차원에서 유럽대학의 교수들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7. 대학도 평준화해야
일곱째, 초중등학교만이 아니라 대학도 평준화해야 한다. 유럽의 경우, 사립학교를 제외하고 초중등학교만이 아니라 대학도 모두 평준화되어 있다. 대학의 경우 학생들은 대학 이름보다 훌륭한 교수를 찾아 대학을 선택한다. 그리고 학생은 입학한 대학만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교수가 있으면 그 교수가 있는 대학에 가서 공부할 수 있다. 유럽은 대학까지 국가가 거의 무상으로 책임지기 때문에 다른 대학에 가서도 공부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평준화된 중등교육도 서열경쟁을 하고 대학도 국립, 사립을 막론하고 전국적으로 서열화 시키고 있다. 이것은 학교 경쟁력을 높이는 것도, 학생의 수준을 높이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처럼 수능시험을 통해 1등에서 수십만 명까지 등수를 매기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국가가 시험성적으로 국민을 차별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절대적인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도 학생의 학교성적 공개는 차별이라고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취업 때 학교성적표 제출 요구는 불법이 된다.
특히 수능점수가 곧 대학수학 능력과 직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대학입시를 로또에 비유해서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능 1-2점 차이로 소위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해 재수를 하는 수능 고득점자들은 재수기간 동안 새로운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하지 않는 연습만 되풀이 한다. 이것은 결코 교육이 아니다.
따라서 대학을 서열이 아니라 유럽처럼 특색 있게 수준을 높이고 평준화해야 한다. 대학을 평준화하려면 무엇보다도 학력차별을 철폐해야 한다. 지식정보사회에서 학력은 정말 무가치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지식정보사회에서 학력은 바보증명서에 불과하다. 따라서 다른 차별금지법과 같이 학력차별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학력차별이 금지되면 대학에는 대학교육을 원하는 학생들만 진학하기 때문에 대학 진학률도 유럽과 미국의 대학 진학률과 같은 30% 수준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학의 질 높은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단계적으로 대학교육도 무상으로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지식정보사회는 하늘이 우리민족에게 준 최대의 선물이다. 우리민족은 기계화된 산업사회에는 잘 맞지 않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우리민족은 5000년의 지적, 문화적 유산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고, 세계적으로 머리가 좋고 지적 모험심도 가장 앞선 민족이다. 따라서 산업사회 학교체제에 학생들을 가두어두지 말고 마음대로 학습할 수 있는 자유를 주어야 한다.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 문화정책으로 세계에 한류열풍을 불게 하였듯이, 과거 학교에 대한 신화와 환상을 깨고 학생들에게 교육의 자유를 주면 창의적인 지적 열풍으로 세계를 훨훨 날아 다닐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