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다이허가 중국 휴가 정치의 중심이 된 것은 1949년 신중국이 건립 된 후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한 중국의 지도자들이 무더운 베이징의 여름을 피하기 위한 피서지로 베이다이허를 선택하면서부터다. 피서지에서 모인 중국 지도자들이 공식, 비공식 회의를 갖게 되면서, 또 시기적으로 매년 10월에 열리는 당 대회의 핵심 사안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진행되면서 이곳은 중국 정치의 또 다른 핵으로 자리 잡게 됐다.
현대 중국 정치에 있어서 베이다이허 회의가 주목받게 된 것은 장쩌민(江澤民)이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권력이 공고함을 알린 1998년이다. 장쩌민은 이 비공식 회의에서 자신의 최대 라이벌이라 알려진 챠오스(喬石)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이 허수아비가 아닌 권력의 중심임을 분명히 했었다.
현대 중국의 정치는 수의 정치다. 무엇보다도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내부에서 다수를 얻는 자가 주도권을 갖는 구조다. 이러한 구조는 절대 권력을 행사했던 마오쩌둥 시대에 이미 그 맹아가 존재했고, 사실상 집단지도 체제에 가까운 장쩌민 시대 이후 공고화됐다.
올 베이다이허 회의의 핵심 쟁점 역시 정치국 상무위원의 수와 점유 비율이 될 것이다. 차기 총서기와 총리가 사실상 결정된 상황에서 총서기 계열과 총리 계열 중 어느 계열이 다수를 차지하는가가 관심의 핵심이다.
중국의 모든 핵심 사안은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정치국 상무위는 보통 7~9명으로 구성된다. 물론 후보위원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참관인 자격으로 표결권이 없으니 언외로 하겠다. 정치국 상무위는 합의제를 지향하지만 정치적으로 치열한 대립이 있는 사안은 표결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장쩌민 시대 7명이었던 정치국 상무위원은 후진타오(胡錦濤) 시대로 넘어 오면서 9명으로 확대 됐다. 이 배경에는 장쩌민 시대 말기 치열한 권력 투쟁이 자리 잡고 있다. 덩샤오핑(鄧小平) 시대 이후의 중국 정치는 극단적인 행위를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피비린내 나는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취득한 교훈일 것이다. 덩샤오핑의 안배, 장쩌민의 퇴직 후 구상, 떠오르는 별 후진타오의 야망 등이 복잡하게 얽혔던 2002년의 권력 승계 과정은 보다 큰 '파이'를 원했고, 그 결과는 합의에 의한 정치국 상무위원의 증가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정치국 상무위원의 증가로 인한 정치적 비효율성과 역할 분장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정치국 상무위원의 수를 7명으로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들리는 말에는 오히려 수를 더 늘린다는 얘기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보다 효율적인 숫자를 찾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치국 상무위원의 수가 7명으로 정해지면 어느 계열이 4명으로 다수를 차지하느냐가 핵심 문제가 된다. 정치국 상무위원의 구성은 이 수의 비율만 갖추어지면 대내외적으로 공인된 평가에 따라 별 이변 없이 이루어지게 된다.
올 해의 경우 베이다이허 회의에 앞서 새로운 정치국 상무위원회 구성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변수가 있었다. 잘 알려진 보시라이(薄熙來) 사건이다. 현재 중국 정치의 구조와 치부를 동시에 보여 준 이 사건은 외부에 알려 진 것 보다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서방이나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태자당과 탄파이(공산당 청년단파) 간의 대결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배후로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갈등을 부각시키고 있는 듯하다. 중국 정치를 중국의 눈이 아닌 서방의 눈에 의존하는데서 오는 착시현상으로 보인다.
흔히들 얘기하는 상하이방-태자당-탄파이의 중국 권력 파벌 구조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상하이방을 제외한 나머지 집단은 단순히 한 파벌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특히 태자당 내에는 중국 현대사의 음영에 맞먹는 다양한 이해들이 대립하고 있다.
장쩌민 이후의 중국 정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특히 보시라이 사건과 그 결과로서의 향후 중국 권력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복잡한 파벌 구조를 통한 접근 보다는 정치적 흐름을 통한 접근이 더 유효할 수 있다.
장쩌민이 상하이에서 총서기로 발탁돼 베이징(北京)으로 입성할 때 그가 오래갈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장쩌민은 초기 5년간의 권력 투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중국 법률이 정하는 국가주석 겸 총서기의 최대 연한을 무사히 마쳤을 뿐 아니라 후진타오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 장쩌민이 권력 초기 자신과 가까운 상하이 인맥들을 발탁하면서 형성 된 것이 상하이방이다. 하지만 당시의 장쩌민이 그랬듯이 상하이방이라 일컬어지는 구성원들의 권력기반이 그리 탄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하이방은 장쩌민에 의해서 권력을 부여 받고 그의 권력 성장과 일치하는 궤적을 그리고 있다고 보면 된다.
장쩌민 권력의 실체는 상하아방 보다는 태자당과의 결합에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의 핵심 '키맨'이 쩡칭훙(曾慶紅)이다. 쩡칭훙은 장쩌민이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입성 할 때 유일하게 데려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이 태자당인 쩡칭훙은 장쩌민과 당 원로 및 군 원로들을 소개시키고 이들의 커넥션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이러한 커넥션은 장쩌민이 베이징 시장이었던 천시통(陳希同)을 쳐내고 챠오스를 무력화 시키는 일련의 과정에서 빛을 발한다. 특히 쩡칭훙은 이 과정에서 리펑(李鵬)과 장쩌민의 연대를 성공시키고 1998년 권력 교체의 캐스팅 보드를 쥐고 있던 리뤼환(李瑞環)을 장쩌민의 지지세로 만드는 등 물밑 책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안배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권력을 후진타오에게 물려주는 상황에서도 쩡칭충을 국가부주석의 자리에 앉히면서 퇴임 후의 든든한 안전판을 만든다. 쩡칭홍은 국가부주석의 자리에 있으면서 장쩌민의 대리인으로서 상하이방-태자당을 연결하는 고리의 역할에서 한발 더 나아가 차기 대권을 만들고 그 권력의 기반을 다지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원래 후진타오의 차기는 리커창(李克强)이 유력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권력의 의지였고 또 탄파이라 불리는 중국 신세대 테크노크라트들의 대세이기도 했다. 쩡칭훙은 이러한 대세를 탄파이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중국공산당 학교에서 시진핑의 연설을 통해 뒤집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은 태자당과 지방 관료 세력의 연합을 통한 장쩌민의 또 다른 정치적 성공이자 쩡칭훙이 태자당의 숨은 실세임을 증명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었다.
후진타오로서는 쩡칭훙의 꼼수에 뜻하지 않은 일격을 맞은 셈이 됐다. 차기 총서기와 총리의 윤곽이 잡히자 중국 지도부는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수 싸움에 돌입했다. 이 과정은 아직 자세한 내막이 알려 지지는 않았지만 보시라이 사건을 통해 그 결과는 서서히 들어나고 있다.
▲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 ⓒ로이터=뉴시스 |
보라이시는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을 노렸고, 이와 관련 태자당 내의 주요 흐름을 만들려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이런 시도는 태자당의 주요 흐름을 장악해 온 쩡칭훙과의 충돌을 가져왔고, 이 와중에 쩡칭훙은 누구도 예상 못했던 후진타오 계열과 연수를 통해 보시라이를 한칼에 쳐 내는데 성공한다. 물론 후진타오 계열로서도 보시라이의 몰락이 고소원불감청(固所願不敢請)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보시라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장쩌민을 내세운 쩡칭훙의 태자당-지방 관료 연합은 차기 정치국 상무위 구성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 한 것으로 파악된다. 후진타오 계열인 탄파이-신규 관료 연합은 주도권은 빼앗겼지만 부패한 태자당의 대안 세력이라는 명분을 획득했다. 올 베이다이허회는 이러한 결과를 인준하고 이에 따라 차기 인선의 윤곽을 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 후 차기 정치국 상무위에서 우위를 점 할 시진핑(習近平) 계열과 명분을 얻은 리커창 계열의 수 싸움이 흥미를 돋구는 7월, 중국은 정치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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