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의 4분의 1이 죽어가면서도 독립을 달성하고 만 훌륭하고 대단한 나라, 앞바다에 석유와 천연가스가 잔뜩 묻힌 자원이 많은 나라, 좋은 수식어에 취해 가끔은 동티모르를 놓치는 것도 같습니다.
분명히 훌륭한 사람들도 많고, 끈질기고 강인한 민족임에도 틀림없어 보이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동티모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 중 절반 이상이 입에 불평을 달고 삽니다. 말끝마다 "티모르 사람들은 이해가 가질 않아", "티모르인들은 너무 이상해" 등등의 불만만 뱉어내죠.
또 절반에 못 미치는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정말 대단해." "이 나라 사람들은 존경할 만해." 그리고 그 가운데 지점에 존재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정말 동티모르가 좋고, 정말 동티모르에 애정이 있다면 가운데 쪽으로 많이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외국인들 중 "대한민국은 대통령도 감옥에 보내는 민주국가야",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놀라운 나라야"와 "대한민국은 부패공화국이래", "대한민국에선 어린 소년들이 책가방에 눌려 기형적으로 키가 자란대"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사람 없이 한 가지만 늘 이야기한다면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 선입견에 사로잡힌 셈이겠죠.
여기서는 이방인이기에 알 것 같은 몇 가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9월 28일자까지)
***2월 27일**
오늘은 유엔 고위관리들이 방문하는 날이어서 그 방문에 맞춰 진행되는 것 같은 바우카우 시민들의 거리행진이 있었습니다. 그다지 정치적으로도 안 보였고 꽤 질서 정연한데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으니까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던 것 같지만, 당연히 그런 행진을 보는 입장에서는 약간은 긴장을 하게 됩니다.
최근 동티모르 사회 불안 요소 1순위는 민병대의 위협도 아니고, 인도네시아가 재침공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가장 불안하고 위협적인 건 직장이 없는 젊은이들이 저지르는 폭력범죄나 집단 시위입니다. 시장에서는 소매치기와 단순폭력이 빈발하고, 유엔 과도행정부(UNTAET) 건물 앞에서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달라고 시위를 벌이고...
하지만, 솔직히 이런 종류의 위협에는 두렵다기보다는 안심이 됩니다. 그만큼 동티모르도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라는 반증이기도 하고, 이제 중요한 건 정치적 독립이 아니라 정말 나라 같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니까요.
이 곳 사람들은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총칼을 든 민병대가 공공연히 마을을 돌아다니며 방화와 살인을 공언하는 앞에서 90% 투표에 80% 지지로 독립을 결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UNHCR(유엔난민고등판무관) 바우카우 지부에서 지금은 그저 테툼어와 영어 통역 노릇이나 하면서 신발도 없이 맨발로 걸어 다니고, 유엔 직원들 기사 노릇이나 해주는 주앙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물어봤죠.
"동티모르 방위군이 창설되면 의무병제가 될 것 같아요?"
"아니. 직업군인과 예비군으로 구성될 거야."
"전 의무병제가 되면 누가 군대에 가려나 싶어서요. 저도 지금 군인이긴 하지만, 입대하기 전에는 정말 입대하기 싫었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방위군이 구성되면 장교로 임관하기 위해 사관학교에 갈까 생각중인데."
"아니? 당신같이 영어도 잘하고 대학도 나온 엘리트가 왜 군대에서 아까운 재능을 썩히려고요?"
"생각해봐, 너희 같은 외국인들이 철수하고 나면 다시 인도네시아가 쳐들어올지도 모르고 또 민병대가 기승을 부릴지도 모르는 것 아냐. 그 때 나 같은 사람들이 군대에 가지 않는다면 누가 군대에 가려 하겠어?"
몹시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의 군인은 당신처럼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자는 멋진 의도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총구를 겨누는 대상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들이고, 우리가 총을 들어야 하는 이유도 우리의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왜곡된 역사 탓이다... 설명을 해봐야 제 가슴만 헛헛해지더군요.
한편으로는 그렇게 당당하게 군에 가겠다고 얘기하는 이 사람이 부러우면서 한편으로는 "그래서 난 한국 땅에서 총 들고 있는 것보다 여기에서 총을 드는 게 더 낫다"고 애써 변명하는 제 자신이 우스워 보였습니다. 비록 맨발에 운전기사 노릇이지만, 그의 모습은 번듯한 군복에 번쩍이는 군화를 신은 저보다 더 커 보였겠죠.
***3월 12일**
비케케라고 여기서 약 두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도시에서 오늘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군요. 원인은 정확히 규명되진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 사건 때문에 마을 젊은이들이 패가 갈려 서로 싸움을 벌이다가 직접적으로 관련도 없는 민간인들의 집에 방화를 저질러 약 스무 가구가 불탔답니다.
주로 여인들과 아이들인, 졸지에 집을 잃은 주민들이 지금 평화유지군 주둔지 안으로 들어와 피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인도네시아가 물러가고 이제 이들 자신의 나라를 만들어가야 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연일 잇따르는 각종 뒤숭숭한 소식은 이 신생국가의 앞날을 자꾸 불안하게만 만듭니다.
결국 비케케에서의 살인 사건으로 인해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적이던 동부지역 내부에서 위험 수준이 중간단계로 상승한 곳이 두 군데나 되어 버렸습니다. 한 곳은 여기 바우카우이고, 다른 한 곳은 비케케이죠. 더 이상 이런 상황이 확산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곳 사람들 회의를 보니 제 바람이 그다지 실현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회의 내내 이 사람들이 했던 일이라고는 서로에게 책임 떠넘기기뿐입니다. 지난번 긴급대응반 사건에 대해 경찰 측으로선 당연히 "체포는 적법한 절차였고, 그 외 요르단 긴급대응반의 잘못은 현지 주민들과 유엔 조사단이 합동으로 조사에 착수하자"는 정도의 결론밖에 내릴 수가 없는 겁니다.
제 생각으로는 주민 대표들의 역할이 조사단의 구성에 대해 각론을 잡고, 동일사태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있어야 했는데, 주민들은 그보다 CPD-RDTL에게 무슨 의도가 있었다, 지역 행정관이 사태처리에 미흡했다, 경찰이나 유엔 과도행정부(UNTAET)가 법률교육을 제대로 안했다, 체포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이런 얘기 해서 뭐합니까, 조사하는 게 먼저이지...) 등등의 이야기만 늘어놓더군요.
당연히 근 다섯 시간에 걸친 회의 끝에 합의라고는 다시 회의하기로 한 것과, 유엔 과도행정부(UNTAET)와 경찰이 합동으로 법률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겠다는 약속뿐입니다. 사건 해결과 재발 방지라는 목적을 두고 보자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셈이죠. 한심하다고 말해 버리고 손 떼어 버릴 수도 없는 것이, 이렇게 자신들끼리 싸워가는 모양새가 굳이 이 곳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물러간 후 우리도 크게는 좌우로, 작게는 좌와 우 내부에서도 수많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서로 깡패조직까지 동원해가면서 정치력을 넓히고자 내분을 일으켰고, 당연히 그 결과 분단과 한국전쟁까지 이르렀는데, 그 상황에서 단결하자, 민족국가부터 수립하자, 외쳐봐야 무슨 소용이 있었겠어요.
김구 선생이 다시 살아 돌아와 동티모르에 환생한다 해도 그리 큰 변화가 있으리란 생각은 할 수가 없습니다. 안타까울 뿐이고, 폭력을 피하고 정치적 갈등도 대화와 선거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거듭 이 사람들과 이야기할 뿐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방인이고, 이 나라는 그들의 나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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