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그간 대단하게 우러러보아 마지않던 동티모르의 독립영웅 미스터 '사나나' 구스마오가 며칠 전 CNRT 의장직과 국회 의장직을 사퇴하고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도 불출마 선언을 했습니다. 이미 CNN등의 외신에서는 꽤 비중 있게 다루어졌기 때문에 아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사퇴와 불출마 선언의 배경에는 CNRT의 내부 암투에 대한 싫증과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구가 깔려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죠.
반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회의적인 시각으로 "그러다 다시 돌아올 거야"라는 시각, 또 하나는 현지 언론들의 시각으로 "당신 외에는 대안이 없다, 국가를 위해 다시 돌아오라"는 칭송에 가까운 시각. 둘 중 어디에서도 심층적인 분석은 찾을 수 없고, 상황 보고나 첩보 요약 보고에도 그저 "혼란스럽다, 우려된다"는 말 말고는 다른 이야기를 볼 수가 없더군요.
중요한 것은 사나나를 지지하는 저로서도 그의 퇴임과 불출마 선언이 그저 정치적 수사이길 바란다는 겁니다. 동티모르에는 현재 그만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없거든요. 노벨상 수상자인 라모스 호르타 외무장관도 지금 사나나의 후임으로 거론되자마자 당장 국회에서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경선에 올라야만 할 지경입니다. 그렇다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 속한다고 해서 주교님들에게 정치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선거가 다가올수록 정당들은 난립하고, 의사결정은 더뎌지고, 국민들을 상대로 권위를 가질 만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중입니다. 서로 자신들이 독립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우기고, 정치적 소수집단인 경우 심지어 인도네시아와 뒷거래한다는 소문마저 흉흉히 떠돌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사나나는 거의 유일한 대안입니다. 물론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고 지금의 불출마 선언 역시 그런 맥락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확대하려는 포석일 가능성이 높을 테지요.
하지만, 반평생을 독립투쟁과 감옥에서의 생활로 보낸 독립영웅마저 이렇게 애를 써가며 자신의 입지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 어쩌면 동티모르의 가장 큰 불행일지 모릅니다. 선거 예정일은 다가오고, 동티모르는 여전히 평화유지군에 국가의 방위를 거의 내맡기고 있는 상황이고, 독립 예정일에 맞춰 평화유지군 규모와 동티모르 전체 작전 자체가 대규모로 감축될 예정입니다.
너무나도 취약하고 언제 한순간에 무너질지 모르는 나라이다 보니 단지 선거일정과 독립일정을 늦추려는 일념으로 구스마오가 카드를 던진 건지도 모르겠어요. 혼란을 조장해 정치상황의 불안을 가져와 유엔의 과도기를 늘려간다는...
베닐랄레라는 곳에서는 전 독립운동가의 집에 수류탄이 투척되고 몇 발의 사격이 가해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용된 수류탄이 바로 대한민국 육군의 K-75 수류탄. 남한이 인도네시아 정부에 팔아왔던 수류탄이죠. 상록수부대가 서부 접경지역에서 민병대와 대치하고 있었다면 아마 서로 같은 공장에서 만든 같은 무기를 들고 싸워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그러니, 유엔 활동이란 것이 참 우스운 겁니다.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가 무력으로 침공할 때 쌍수 들고 반기던 호주가 지금 인도네시아와의 마찰을 무릅써가며 동티모르를 지켜준답시고 들어와 있고, 인도네시아 정부에 수류탄 팔아주던 남한의 군인들이 동티모르 내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평화유지군입니다. 병 주고 약 주고. 다른 말로 어찌 더 잘 표현하겠어요. 그나마 이제 약을 준다는 데서 위안을 찾아야 할까요?
***4월 5일**
딜리의 거리에서 종종 생기는 차량들의 러시아워와 대형 슈퍼마켓, 각종 외국 음식점들과 호텔, 항상 해변을 채워주는 수영복 입은 사람들로 동티모르를 판단하고, 이들이 발전하는 중이라 믿었던 제 생각이 짧았다는 걸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간 이 나라에 두 달이나 있으면서 도대체 이들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이 있나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고 있어요.
이제 곧 8월이면 선거가 있을 테고 내년이 시작되면 동티모르 과도행정기구는 그 역할을 독립 동티모르 정부에게 넘겨주기 시작할 것입니다. 동티모르가 독립과정에 들어서면 지금까지 동티모르 국내총생산의 20%에 이르는 금액을 써버리던 유엔 직원들이 슬슬 집으로 돌아가게 될 텐데 그때가 되면 지금 딜리의 수많은 상점들과 관광시설들을 소유하고 있는 호주인들이 마찬가지로 보따리를 싸겠죠.
그러고 나면 동티모르의 중심가를 메우던 그 상점들에서 누가 물건을 사겠어요? 지금도 동티모르에서 일자리를 달라고, 봉급을 올려 달라고 시위하는 사람들의 수가 만만치 않은데 가뜩이나 유엔 직원들의 씀씀이 큰 소비로 인해 물가는 잔뜩 올라있고, 동티모르인들의 평균 월급으로는 도저히 유엔 직원들 마냥 구매력을 가질 수가 없고, 결국 한순간에 지금의 활기가 싹 사라지는 겁니다. 정말로 거품이 가라앉는 모습이 보이는 듯해요.
그간 우리가 제대로 교육받고 이해하지 못했으나 정말 중요했던 것은 동티모르에서 유엔이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동티모르에게는 원조 외에는 딱히 의지할 곳이 없다는 점이죠. 쌀과 옥수수로 식량자급은 가능할 수 있다지만, 그 뿐입니다.
도로를 놓고, 건물을 짓고, 병원과 학교를 세울 돈이 나올 곳이라고는 커피 농장과 관광 산업뿐인데, 과연 커피와 관광이 유엔이 물러간 뒤 이 나라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요? 티모르 해협의 석유와 천연가스는 이 곳 지도자들의 냉철한 인식 그대로 "호주에서 수익의 90%를 우리에게 지불한다 하더라도 석유와 천연가스는 돈을 만들뿐이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곳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갖게 마련이라, 제가 서울을 사랑하고 군산을 고향처럼 여기고 멕시코와 스페인을 예찬하는 것의 연장으로 이 곳 역시 어찌 될지 늘 궁금하고 걱정되고 합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무너지기 쉬운 약한 국가 중 하나라는 이 곳이 빨리 싱가포르나 안도라 같은 안정적인 국가가 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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