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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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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20>

신선하다, 구스마오의 말

***4월 9일**

지난달에 집 40채가 불타 버렸던 비케케라는 곳에 대해 말씀 드렸던 것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그 곳에 불을 지른 사람들이 비케케 남쪽으로 약 1시간 정도 더 가면 있는 마카디키라는 마을 사람들입니다. 비케케의 갱(으로 추정되는) 조직 누군가(라는 추측)가 마카디키의 청년을 살해해서 마카디키 사람들이 비케케로 몰려가 복수하겠다고 싸우며 방화를 했고, 그래서 비케케의 가옥 수십 채(물론 그 중에는 갱과 상관없는 무고한 사람들과 여자들, 아이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가 불타 버렸습니다. 여기까지가 이전의 상황이었고, 평화유지군과 유엔 과도행정부(UNTAET)은 이 문제를 지역 주민들간의 내부 갈등으로 보고 화해 노력에 전력을 기울이던 중이었어요.

오늘은 이 곳 동부지역사 사령관이 직접 마카디키를 방문해서 마카디키와 비케케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태국군 평화유지군 중대를 격려하고자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디 가면 우르르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걸 좋아해서 이 태국군 담당 지역과는 별 상관도 없는 한국군 연락반의 A소령님과 필리핀 연락반의 오마르 중령님을 동행시킨 겁니다.

마카디키까지 가려면 비케케까지 2시간 반, 비케케에서 마카디키까지 1시간 반, 도합 네 시간에 왕복 여덟 시간이 걸리는 강행군인데도요. 차라도 준비해서 모셔가면 모르겠는데 오늘 작전이 많아서 차량이 부족하니 A소령님은 자기 차로 오라고 부탁을 하는 겁니다. 차 주인이 가면 운전기사도 따라 가야죠. 할 수 없이 따라 가야 했어요.

가는 길이 쭉 뻗은 고속도로면 말을 않겠는데(하긴 그러면 네 시간씩 걸리지도 않겠다...), 진흙탕 범벅의 비포장 도로와 곳곳에 구멍이 뚫린 도로를 뾰족 자갈로 메워 놔 그 위로 지나가기 겁나는 험로를 몇 킬로씩 통과해야 하는 길이랍니다.

게다가 가는 길에는 해발 1천7백69미터의 몬테 뻬르디도('잃어버린 산'이란 뜻)를 정상 바로 옆으로 나 있는 도로를 통해 넘어가야 하고, 산을 넘자마자 나오는 비케케는 푹 꺼진 채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라서 습하고, 모기 많고, 따라서 동티모르 전역에서 말라리아 발병율이 가장 높기로 악명이 높고, 더위는 얼마나 살인적인지... 투덜투덜...

그래도, 사령관이 직접 더듬거리는 영어로 주민들에게 "우리는 여러분들의 안전을 위해 이곳에 파병된 평화유지군입니다. 언제나 여러분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동티모르의 모든 사람들이 화해 속에 지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행사를 계속 준비하여 여러분들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겁니다"라며 설명하고, 테툼어와 인도네시아어로 통역하는 모습은 참 보기가 좋았습니다. 이 사령관의 존경할 만한 점이 언제 어디에서건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인 것 같아요.

언제 어디서건 짧은 영어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통역 대신에 최대한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려고 노력하고, 그러기 위해서 새벽 3시까지 연설문을 외우고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고 한답니다. 그런데, 이런 부지런한 사람이 지금의 지위에 오른 공적이란 것이 태국 공산 반군을 수도 없이 죽인 결과랍니다. 오늘 처음 들었어요. 그간 이 사람의 좋은 면만 보아 왔었는데 그 전력을 보니 좀 달리 보이는군요. 태국의 빈민운동가도, 반정부 데모에 앞장서던 학생들도 한 때 이 사령관의 손에 죽을 수 있었다는 거죠.

관심을 좀 가지신다면 태국군이 '반군'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시게 되겠지만, 이 사령관처럼 훌륭한 군인의 손에 죽어간 '반군'들은 때로는, 아니 대개의 경우는 그 훌륭한 군인들보다 몇 배나 훌륭하고 영웅적인 사람들인 경우도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도 '공산주의 영향을 받은' 프레틸린(동티모르 독립혁명 전선)과 그에 동조하는 동티모르 민중들을 20만 명 가까이 학살한 공로로 미국으로부터 '자유를 지킨 온건주의자'라는 칭송을 얻었던 사람이죠. 박정희 전 대통령도 유신시대를 열었건 어쨌건 중동의 산업역군들에게 시바스 리갈로 폭탄주를 만들어 주며 얼싸안고 조국을 위해 눈물을 흘렸던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고요.

오늘 자 신문들을 보니 구스마오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의사를 확인하더군요. "내 입술을 읽어 보십시오. No라고 말하면 정말 No입니다." 지금 대통령이 정계은퇴 선언까지 했던 사람인 나라에 살다보니 정치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는 것에 몹시도 어색해 하는 한국 청년에게 구스마오가 내뱉는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나는 딱히 잘하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아... 한 가지 있군요. 전쟁터에서 적을 죽이는 일은 잘 합니다. 그런 내가 동티모르의 대통령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동티모르가 한두 사람의 정치적 선택에 의해 미래가 좌우되어야 하는 나라라면, 내가 대통령이 되어도 험난한 시기는 계속될 겁니다.

게다가 나는 사람들에게 '참아야 한다, 지금은 어려운 시기이고 모두 고생해야만 한다'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내가 정치권 내에서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비난하겠죠. 특혜를 누리고 있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그러나 내가 정치권 밖에서 동티모르의 형제들을 향해 쓴 소리를 한다면 그들은 나를 믿을 겁니다. 게다가 동티모르에 지금 필요한 것은 외국으로부터의 협조이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외국의 원조입니다.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 원조를 얻어내는 일이 될 테고, 그 일에 적격인 사람은 나보다는 라모스 호르타입니다. 나는 국회의장직의 후임으로서 호르타를 지지할 뿐 아니라 차기 동티모르의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그를 지지합니다."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평화유지군 파병 결정이 뉴욕 유엔 본부에서 내려지기 전, 미국에 있던 라모스 호르타는 두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벨로 주교로부터의 첫 통화는 "큰일났어, 민병대가 파괴를 저지르기 시작했어... 딸칵" 이었죠. 그리고 곧이어 그의 여동생으로부터 "오빠, 집에 민병대가 들어오려고 해!... 딸칵."

그 후 그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연고를 동원해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까지 만나가며 유엔에서 파병결의안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바로 구스마오에게 전화를 걸죠. "조금 전에 클린턴을 만났어." 구스마오가 대답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데?" "평화유지군이 거기로 갈 거라는 이야기야!"

그리고 그들은 한 명은 국회의장으로, 한 명은 외무장관으로 독립을 향해 걷는 중인 나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한 명은 다시 게릴라 생활처럼 정해진 자리 없이 떠도는 생활로 복귀하고, 다른 한 명은 그 친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원조를 구걸하러 돌아다녀야만 할' 자리의 물망에 오르는 중입니다. 인구 80만도 되지 않는, 그저 한국의 지방도시만한 나라에서 보고 느끼는 이 모든 것들이 단지 혼자 알고 있기 아까워서 그 마음 하나로 주절주절 써서 보내 드립니다.

새만한 나방이 날아다니고 게처럼 옆 걸음 걷는 도마뱀이 사방에서 출몰하고 있지만, 점점 이 곳이 좋아집니다. 존경스럽다거나 배울 만하다거나 따위의 거창한 게 아니라 그저 시골이 고향이면 이런 느낌을 받으려니 싶도록 포근하게 이 땅에 안겨 갑니다.

첫 파병이어서 그런지 상록수부대에서도 이곳에서 그런 감정을 얻은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전임 공보장교 하던 분은 귀국 후 이 곳 생각이 어른거려 한국에서의 생활이 어려울 지경이어서 독하게 마음먹고 앨범을 불태우고 외신이라고는 쳐다도 보지 않기 시작하고 나서야 간신히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한 병사는 동티모르인들과 직접 얘기하고 싶어서 호주에서 나오는 '테툼어-영어사전'을 구해 달달 외우다시피 해서 6개월 동안 의사소통에 지장 없을 정도의 테툼어를 배웠답니다. 이 사람들과 이 나라를 그 만큼의 애정으로 대했던 그런 사람들의 존재가 이곳에서 한국군이 사랑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된 거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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