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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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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21>

배째라식 협상으로 수입 올리기도

***4월 10일**

망명 외교관뿐만 아니라, 노련한 게릴라 베테랑 역시 신망을 얻었던 모양입니다. 호르타는 구스마오의 후임을 선출하는 국회 36인 멤버들의 비밀투표에서 13대 13으로 게릴라 출신 카라스칼라오와 동률을 기록하자 후보를 사퇴했어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심 없이 주요 직위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좀 익숙지 못한 풍경이어서 제게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지만, 어쨌건 기를 쓰고 자기만이 대안이라며 우겨대는 정치풍토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5월 4일**

호주의 로터리클럽에서 좋은 일 좀 해보고 싶었던지 동티모르에 'steel manufacturing factory'를 하나 지어줬어요. 굳이 영어로 쓴 것이, 그 호주 사람들이 직역하자면 '철강 제조 공장'정도가 될 이 장소를 그렇게 불렀거든요.

그런데 가보니까 이름에서 풍기는 어마어마한 공장과는 거리가 있더군요. 공장이란 게 꼭 굴뚝 몇 개 있고, 부지가 몇 천 평이고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달랑 프레임 뽑아내고 함석 지붕 펴내는 기계 하나 가져다 놓은 곳에 대해 동티모르 유일의 철강 제조 공장 어쩌고 하는 게 좀 조화가 안 되어서요.

참, 하려던 얘기는 그게 아니죠. 이 나름대로 굉장히 성능이 좋다는 기계를 호주 로터리클럽에서 아무 조건 없이 독립정부 수립 이전까지는 클럽이 관리하고, 독립 후 바로 동티모르 정부에 기증하겠다고 이야기했거든요. 로터리클럽이란 곳이 원래 인정 넘치고 돈 많은 사회 유지들이 좋은 일 좀 해보자고 하는 곳이니까, 실용적 관점에서 아니, 어떤 관점에서 보건 간에 거저 쓸모 있는 기계를 주고, 관리법도가르쳐주고, 비용도 다 대주겠다는 데 손뼉치고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 제 생각과는 달리 환영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 봅니다. 바우카우에 호주 로터리클럽이 기증한 기계와 공장이 들어서자 주민들이 몰려들었지요.
"24시간 경계를 서주고 시설을 보호해 주겠다."
로터리클럽에서 보낸 호주인 엔지니어가 대답합니다.
"고맙다."
주민들이 이야기하죠.
"그런데, 경계를 우리가 서주니까 돈을 내라."
공짜로 기계 가져다주고 사용법까지 알려주고 있던 이 기술자는 당황해 합니다.
"필요 없다. 그냥 문만 잠그면 되지, 이 큰 기계를 누가 들고 가겠나?"

그러나, 주민들은 더욱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이 땅이 호주 땅인가? 우리가 언제 이런 기계 가져다 달라고 그랬나? 경계가 필요 없으면 말아라. 대신에 자릿세를 내놔라."
돈에, 기계에, 기술자에 모두 지원하는 이들로서는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당연히 이들은 주민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민들은 공장 문에 커다란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호주인들이 문을 강제로 열까봐 24시간 경계를 서고 있습니다.(공장을 지은 것도, 그 공장의 주인도 모두 호주인인데... 더구나 그 공장 쓰는 법만 가르쳐 주고 나서 그냥 주겠다는데!)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쓸데없는 경계를 서고 있어야 하는 주민들이나, 좋은 일 해보자고 했다가 봉변 당하는 호주인들이나 모두 불만이게 마련이죠. 그래서 동티모르 방위군 사령관인 마탄 루악-기억하실 지 모르겠는데, 지난달에 한국에 왔었는데 어느 언론에서도 보도하지 않았던, 그 불쌍한 동티모르 방위군 최고 책임자-이 중재를 하기 위해 오늘 바우카우로 왔습니다.

주민들 왈, "필요하지도 않아 보이는 기계 가져다가 들여놓고 뭔가 뚝딱거리면 우리에게도 득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마을 땅에 공장 지어놓고 우리에게 돌아오는 건 하나도 없다."
호주 사람들 왈, "이 기계가 얼마나 유용한 건데 그러느냐, 앞으로 1년 이내에 이게 당신들 게 될 것이고, 지금도 우리가 이걸 사용하는 법을 무료로 가르쳐 주지 않느냐. 우리가 그러면서 무슨 대가를 요구한 적이 있느냐?"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이런 논쟁이 지속되면서 호주 사람들의 심기가 몹시도 불편해졌습니다.
"그러면 관둬라. 우리 그냥 철수하겠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 아니냐."
주민들의 반발이 압권이었죠.
"올 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갈 때도 그렇게 될 줄 아느냐. 철수하기 전에 공장에 불지르고 기계를 부숴 버리겠다."

결국 이 배째라식 협상의 결과 로터리클럽에서 지대 겸 사업 착공비 겸(도대체 여기서 이윤을 뽑아내려는 게 아닌데 이게 무슨 사업이라고...)해서 2천 달러(미화 1천 달러 상당)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덧붙여 공장이 동티모르로 접수되기 이전에도 주민들을 고용해서 월급을 주기로 하고요. 당장 공장 열쇠가 호주인들 손으로 넘어 왔고, 24시간 경계는 서지 않기로 했답니다.

문맹률 50%에다, 이 작은 땅에서 쓰이는 말이 수십 가지에 이르고, 번듯한 정당 사무소 하나 개설할 능력 없는 정당들이 서로 살인하고 불지르고 하는 것이 동티모르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다리를 놓아주는 것에 감사하지 않는 이들의 모습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오늘의 경우처럼 당장 지붕 없는 집에 비를 피할 양철지붕이라도 얹어 줄 수 있는 기계를 무상으로 지원하는 데 대해서도 완고한 이 곳 사람들의 모습에는 저 역시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어요.

유엔이 과도정부를 이끈지도 벌써 2년을 바라보고 있고, 바우카우 정도의 큰 도시라면 이제 외국인들과의 거래에도 익숙해졌을 법 한데,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들도 언젠가 자신들의 과거를 바라보면서 깨닫겠지요. 그 때 그런 거래에서는 우리가 얻을 게 훨씬 많았었는데, 후회된다, 우리가 무지했었다라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우리가 수도 없이 미숙함으로 인해 손해를 보아 왔었고, 아직도 이 곳 저 곳에서 단지 '잘 몰라서', '경험 부족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듯이 말입니다.

유엔이 이 곳에 온 것이 이 곳 사람들의 그런 미숙함을 최대한 보완해주고, 경험과 요령을 전달해주기 위한 것인데, 동티모르인들은 우리를 믿지 못하고, 우리는 그런 그들에게 자꾸 설득력 없는 '믿어달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멍청이처럼 여기는 나라의 군인과 경찰들(얼마 전 필리핀 연락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자기들은 필리핀에서도 분리독립하겠다는 곳들을 찾아다니며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동티모르처럼 인도네시아 땅에서 분리한 나라 자체가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다고요.)이 이 곳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고, 전 식민종주국 포르투갈과 셀 수 없는 배신을 앞장서서 저질렀던 호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어와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어찌 쉽게 해결되겠어요.

많은 유엔 직원들과 만나면서 염증도 많이 느끼고, 실망도 수없이 했지만, 그래도 유엔에는 '국제사회를 위해 뭔가 해보겠다'고 뜻을 품고 들어 온 훌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 대한 신뢰가 국제 사회에 깔려 있기 때문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폭격기가 폭탄을 쏟아 붓던 이 땅에 "평화유지군의 하늘색 베레모 위로 총을 뽑아들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라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소총 한 자루씩만 들고 우리가 여기에 들어와 있는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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