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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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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22>

한국군, 평화유지군 사령관 자리 또 놓치고

***5월 31일**

서티모르에서 동티모르로 귀환하는 난민들을 향해 정체불명의 괴한이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난사해서 다섯 명이 죽고 40명 이상이 다쳤습니다. 사망자는 더 늘어날 것 같다네요. 최근 들어 급격히 상황이 불안해지고 있는 와중입니다.

국가 지도자라고 할만한 구스마오는 대통령 선거 불참 선언으로 서티모르 난민들의 불안을 가중시켰고(서티모르의 민병대들이 동티모르 정치상황이 구스마오의 선거 불참까지 이르게 할 만큼 심각하며 동티모르로 돌아가 봐야 정치혼란에 말려 희생당하기 쉽다고 계속 흑색선전을 퍼뜨린다더군요.), 호르타 외무장관은 최근 들어 유엔 기구들 몇몇-특히 유엔경찰-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다가 갈등을 빚는 중이죠.

딱히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지도자도 없고, 더 큰 문제는 40%에 달하는 문맹률과 지역간 도로망 및 정보망의 부재로 인하여 국가 시책이고 뭐고 관심 없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라는 겁니다.

8월에 있을 예정인 선거는 헌법을 제정할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선거인데, 최근 여론조사에 의하면 선거가 있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대통령 선거로 알고 있던 사람, 독립찬반 투표를 다시 하는 줄 알던 사람까지 합하면 약 80%가 선거에 대해 무지했다더군요.

빈곤은 무지를 낳고, 무지는 다시 빈곤을 부르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다는 것이 보통 쉬운 일이 아닌가 봅니다. '한강의 기적'이란 말이 왜 나왔는지 여기 와서 깨닫고 있습니다.

***8월 13일**

한동안 95%의 확률로 당연히 한국군 장성이 평화유지군 사령관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가 팽배했었는데, 결국 또 신임 사령관 자리에마저 태국군이 올랐습니다. 외교력의 실패라고 자평하고 있다던데, 아쉬운 노릇이긴 하죠.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한국군이 고위직에서 다른 나라 군대들을 지휘하면 어떤 모습일까를 몹시 보고 싶었는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얼마 전에는 태국 왕비의 생일이었어요. 태국군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여왕폐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라는 노래를 부르는 와중에 그냥 멍하니 함께 서서 축하하고, 맛있는 파티음식들에 푹 빠져 즐겼었죠. 개명천지에 아직도 왕족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나라가 있다는 게 조금 이상하고 어색하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더군요.

그 파티에 왔던 딜리 사령부 공보과에서 일하는 대위가 바람을 넣고 갔어요.
"나중에 제대하고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면 여기서 이런 일 하지 말고 공보과로 옮겨 달라고 그러지? 우리 늘상 하는 일이 외신기자들한테 브리핑 해주고 여기저기 취재 다니는 일인데, 여기 있는 것보다는 개인적으로 훨씬 좋은 경험이 되지 않겠어? 공보과에 사람도 부족한데 오겠다면 내가 적극 추천할텐데."

솔깃했죠. 딜리에 가면 밥도 맛있고, 빨래, 청소 같은 거 안 해도 되고, 영어도 여기서 이상한 태국식 발음이나 듣고 사는 것보다야 훨씬 많이 늘 테고. 아닌게 아니라 딜리의 우리들 보스 H대령님도 이제 절반이 지났는데 위치 이동같은 게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생각하신다고 그러고... 정말 가족같이 잘 지내온 분들에게 이야기 꺼내기가 미안해서 머뭇거리고는 있는데, 망설여집니다.

여기서 타이핑이나 하고 전화나 받고 운전이나 하면서 곁다리로 끼어 드는 사건들에 말려 드는 것보다는 일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정말 바쁘게 지내보고도 싶은데... 무엇보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고 아무리 탁 트인 사람들이라도, 한국군은 언제나 병사들에게 몹시도 인색하기 때문에 능력대로 일한다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선거가 가까워오니까 아니나 다를까 엉망진창입니다. 소이바다라는 지역에서는 UDT(티모르 민주연합)라는 정당에서 유권자들에게 돈주고 표를 매수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이 사람들은 독립투표 와중에서 친인도네시아 계열 활동을 했던 인간들입니다.

지주, 성공한 상인, 인도네시아 시절 고위관료 등이 주 지지층인데서도 어렵잖게 성향을 짐작할 수 있지만, 독립 이후에는 말을 싹 바꿔서 "그건 프레틸린(독립운동 게릴라 단체였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단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노력이었다"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죠.

뭔가 "그건 친일이 아니라 단지 일제하에서 그렇게라도 할 수 있는 영향력있는 인물이 없는 것보다는 그나마 있는 게 나았기 때문이었다"라고 헛소리하는 인간들과 비슷해 보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가끔 편지에 적곤 했었던 엘 세트(늘상 문제를 일으키곤 하는 CPD-RDTL의 배후조종자이자 개인 경호대에 무장까지 시키고 있는 동티모르의 지하 유력자)는 타고 가던 차가 투석을 당했다고 합니다. 술 취한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진 우발적 행위로 판단중이라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경찰에 사건조사를 담당시키는 게 아니라 자기 개인 경호원들로 하여금 "범인을 검거하라"고 지시했다는 거죠.

가뜩이나 예민한데다가 CPD-RDTL의 거듭되는 돌출행동으로 주민들 감정도 엘 세트와 CPD-RDTL에 점점 비판적인데, 이 사건이 정치적인 소요로 번지지 않을까 노심초사라고 합니다. 유엔 과도행정부(UNTAET)에서야 늘 하는 소리이긴 하지만, "아무 문제없이 선거 일정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고 발표합니다.

반면, 어디에서 주민들 간에 싸움이 붙었네, 어느 지역에 일부 청년들이 몰려가 집단 방화를 저질렀네, 깃발게양을 둘러싸고 또 정당들끼리 폭력사태가 발생했네 등등 순조로운 정치 일정이 '별다른' 문제없이 진행중이죠. 이 정도 사건에는 이제 모두들 면역이 되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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