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일**
상쾌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덜컹거리는 지프를 타고 구불구불 산길을 달려 내려가면서 라디오를 틀어 봅니다. 유엔 과도행정부(UNTAET)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방송은 시간대별로 영어, 포르투갈어, 인도네시아어, 테툼어 등의 네 가지 언어 방송으로 나뉘죠.
금요일 오전에는 일주간의 뉴스를 모아 바우카우 지역 유엔 과도행정부(UNTAET) 정치국 담당이 나와 부연 설명과 함께 뉴스 진행자의 질문에 답변을 해줍니다. 최근의 화제는 역시 임박한 제헌의회 선거입니다. 포르투갈 시절부터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해왔던 프레틸린이 압승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는군요. 프레틸린은 그들의 역사가 곧 동티모르의 독립사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식민통치 기간 동안 끊임없이 싸워왔던 단체입니다.
마땅히 선거 포스터를 붙일 게시판도 별로 없는 동티모르에서 각 후보 정당들은 자신들의 스티커를 도로 옆에 있는 나무들에 붙여 놓습니다. 한 때 부서져서 버려져 있던 건물 위에도 지금은 정당깃발이 꼽혀 펄럭이고, 차도를 돌아다니는 앞 유리마저 깨어져 버린 고물트럭 위에 올라탄 젊은이들이 열심히 손을 흔들며 깃발을 흔들며 선거시즌이라는 걸 보여 주고 있어요.
선거 벽보 대신에 도로변에 늘어선 나무에는 각 정당들이 붙여놓은 스티커들이 즐비하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유엔 과도행정부(UNTAET)에서 붙여놓은 선거 관련 교육용 배너가 노란색으로 반짝입니다.
최근 들어 평화유지군들은 선거 시 예상되는 소요사태에 대비해 요인 경호, 소요 진압 등의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금요일에는 상록수부대에서 훈련이 있었어요.
"성당 옆 시장길 농구장에서 사회민주당(PSD)의 유세도중 정글도로 무장한 괴한5~6명이 출현. 현재 경찰이 출동 중이며 흥분한 청년들의 참여로 사태 확산 우려. 각 지역대는 비상출동태세를 갖추고 대기하기 바람."
몹시 심각한 목소리로 부대 전체 스피커로 방송을 하는 걸 듣고서는 훈련 내용을 모르던 제 입장에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인가보다, 어쩌지... 등등 걱정을 하고 있는데, 알고 보니 다가올 사회민주당의 선거유세를 대비한 훈련이었다더군요. 금요일에 예정되었던 사회민주당의 유세는 춤과 노래와 함께 즐겁게 끝났다고 합니다. 이 곳 바우카우 지역에서도 태국군들이 같은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유엔기구 사무실들에 직접 가서 연막을 뿌리고, 얼굴에 스키마스크를 한 채 대 테러부대마냥 차려입은 군인들이 진압 시연을 하죠. 선거 일정이 대체로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이렇게 경계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유가 바로 25년 전 그 일 탓이라고 하는군요.
1974년 포르투갈이 자국내의 무혈 시민혁명을 통해 파시스트 정부를 붕괴시키고 민주정부를 구성하게 되자 동티모르에서도 독립의 싹이 트기 시작합니다. 당시 동티모르에 있던 포르투갈 총독은 곧 정당구성을 허락하는 법령을 선포하고,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티모르 민주연합, 티모르 사회민주연합 등등의 정당들이 이 때 생겨나게 됩니다.
당시 최대정당이었던 티모르 민주연합과 티모르 사회민주연합은 연정 구성에 합의하고 75년 1월 독립정부를 위한 과도정부를 함께 구성하죠. 그런데, 티모르 민주연합이 5월에 이 연합을 깨버립니다. 7월 지방선거에서 사회민주연합이 프레틸린으로 이름을 바꾸고 55%의 득표로 제1당이 되자 티모르 민주연합은 인도네시아를 끌어들여 내전을 일으키게 되죠. 프레틸린은 이 쿠데타 기도를 봉쇄하고 11월에는 독립 동티모르 민주공화국(RDTL)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동티모르 민주협의회(APODETI)와 티모르 민주연합은 인도네시아 외무장관과 함께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에게 주권을 양도한다"는 서명을 합니다. 일주일 뒤 하늘에서 인도네시아 공수부대가 시커멓게 떨어져 내려오면서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은 일주일의 짧은 생명을 마감하죠.
그리고, 지금 다시 그 민주공화국을 부활시키려하는 과정을 보는 동티모르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어쩔 수 없이 25년 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과 인도네시아 침략의 기억이 떠오르게 될 겁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선거까지의 과정보다는 선거 이후 결과가 드러난 이후의 상황을 더욱 우려하고 있습니다. 금품살포라거나 유세장에서의 작은 소요사태 정도는 내전까지 이어졌던 25년 전의 지방의회 선거 이후를 떠올리자면 소매치기와 비행기 공중납치의 차이라고 할 테니까요.
라디오와 신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일까요. 묘하게도, 프레틸린, 티모르 민주연합, 선거 등등의 단어보다 단연 앞에 나서는 단어가 '민주주의' 'Democracy'라는 단어입니다. 포르투갈 지배기 동안에도, 인도네시아 지배기 동안에도 동티모르 사람들이 들었던 '민주주의'라는 말은 늘 '독립'이란 단어와 함께 쓰였다고 합니다.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자!"라고 소리치는 이야기만 거의 평생동안 듣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보니, 막상 독립을 얻고 났어도 뭐가 독립이라는 건지 영 감이 안 잡힌다고 해요.
나라가 독립했다고는 하는데, 좋은 거라고는 가끔씩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고, 길거리에서, 논밭에서 어디에서건 나타나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 가는 관료들이 없다는 것뿐이랍니다. 불탄 집과 망가진 사회 인프라 등등을 보면 딱히 독립이란 것이 그렇게 좋기만 한 것인가 싶어질 때도 가끔씩 있다는 군요. 그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은 더욱 멀게 느껴질 뿐이겠죠.
한마디 더하자면, '민주주의'와 '선거'라는 말을 등치시켜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는 동티모르 사람들은 75년 선거에서도 그랬고, 이번 선거에서도 자신의 판단대로 주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투표하겠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60%도 안 된다는 겁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25년 전에 그러했듯이 마을의 나이 많은 어르신이나 부자 나으리가 찍자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루루 표를 몰아줄 가능성이 높다는군요. 내전이 25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여전히 현재형으로 위협이 되고 있는 이유에는 이렇게 한번도 '민주주의'라는 걸 겪어볼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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