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1일-9월 2일**
2년 전, 유엔 감시 하에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여기 동티모르에서 진행되기 직전 며칠간, 주민들은 극도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민병대원들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이 갑자기 사람들을 습격하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독립 찬성에 표를 던지면 이보다 더한 대가를 각오하라"고 협박하였죠.
그렇게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선거가 과연 제대로 치러질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던 선거 당일, 주민들이 하나 둘씩 투표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줄을 서고서도 고개는 땅을 향하고, 주위 어디에 있을지 모를 민병대원들의 감시를 피하려고 조심조심 서로간의 대화도 귓속말로 해야 했었죠.
투표율은 유권자 중 90%, 독립 찬성에 78%가 표를 던졌습니다. 민병대원들은 약속을 지키겠다는 듯 방화와 약탈, 살인을 시작했고 주민들은 모두 유엔 캠프 내로 피신했으며 급박하게 며칠 내로 다국적군이 파견될 때까지 동티모르 전역은 파괴될 대로 파괴되었죠.
그리고 2년이 지났습니다. 포스터에서 보시듯 이번 선거에서 유엔이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안전'입니다. 2년 전의 선거 역시 유엔이 관할하였지만, 결국 온 나라가 파괴되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기 때문에 이번 선거에는 예상되는 모든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죠.
열중쉬어 자세로 서있는 세 사람들 중 가운데는 동티모르 경찰입니다. 그간 유엔 경찰과 함께 근무하면서 경찰업무를 공동 수행하다가 선거 전날부로 총기를 지급받고 제대로 무장을 갖춘 채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보통 평일이라면 닭싸움을 시키려고 모여 있는 사람들, 외국인만 보면 한 손에 계산기를 들고 나타나 흥정을 거는 암달러상들, 좌판에 과일과 생선을 늘어놓은 아주머니들로 늘 분주한 바우카우 시장 거리는 선거 날을 맞아 한산하기 그지없습니다. 꼬마 아이들만 굴렁쇠를 굴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고, 거리에는 사람 흔적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차를 타고 계속 한산한 거리를 달리다보면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곳을 만나게 되고, 그 곳이 바로 투표소였던 거죠.
오늘의 바우카우 사람들은 고개도 빳빳이 세우고 우루루 모여 앉아 큰 소리로 웃으며 대화를 나눕니다. 독립 선거 관리 위원회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면 유엔 직원일지라도 투표소 근처 1백50 미터 이내로 접근 금지이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위기만은 화기애애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두들 일요일에 미사를 보러 갈 때만 꺼내 입는 화사한 옷을 꺼내 입고 투표소로 향했습니다. 선거가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행사인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어요.
새벽 7시부터 투표가 시작되었다는데 이미 주민들은 그 시각 이전부터 5백 미터 이상 줄을 서가며 대기했었다더군요. 투표율 90%를 넘은 지역이 허다하고, 평균 투표율도 잠정 집계 결과 93%에 달한답니다.
"투표 하셨어요?"하고 물어보면 모두들 활짝 웃으며 "당연하죠."라고 대답하고, 선거 당일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티모르 전역은 아주 평온합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해지는 걸까요. 하루 종일을 닭싸움에 소일하는 것만 같은 무기력한 젊은 남자들과 때로 몰려다니며 패싸움을 일삼곤 하는 청소년들, 그저 멍하니 하루 종일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기만 하는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겉으로 드러나는 동티모르의 단면들은 '게으르고 가능성 없는' 모습들뿐인데...
마지막 유세 날 딜리 해안도로를 가득 메웠던 수만 명의 프레틸린 지지 인파들(말이 수만 명이지 인구 80만에 못 미치는 작은 나라에서 그 숫자는 우리 식으로 따지자면 수백만에 이르는 비율이겠죠)이나, 새벽 7시 이전부터 투표소에 줄을 서서 투표하는 93%의 투표율 등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아니, 정말 놀라운 것은 민병대원들의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에 찬성표를 던지던 2년 전의 그 용기였죠. 이 포스터는 '민주주의와 독립을 향해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포스터입니다. 동티모르를 상징하는 작은 버스가 꾸불꾸불한 길을 지나 민주주의와 독립을 상징하는 마을까지 달리는 중입니다. 지금은 그 중 작은 마을 하나인 '제헌의회 선거'에 도착해 있는 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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