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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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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25>

티모르인들은 악어의 자손

***9월 5일**

독립국가가 된 이후 유명한 여행 출판사 론리 플래닛에서 동티모르에 대한 최초의 여행 안내서가 나왔습니다. 가이드북은 아니고, 회화집인데 회화뿐 아니라 나름대로 재미있는 정보들이 많이 실려 있어요. 그간 7개월도 훌쩍 넘겨가며 근무해놓고도 몰랐던 많은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여행자를 위한 책이어서인지 아주 유용하더군요.

부대 안에 들어와서 심부름하는 꼬마 녀석이랑 함께 그저 맘 편하게 책에 써 있는 대로 '사람을 만날 때' 장을 펼쳐서 "안녕? 만나서 반갑다. 여기 사니? 이건 뭐라고 불러?" 식의 질문을 써 있는 대로 읽어나가니까 쉽게 대화가 되더군요. 아이들도 신기해서 계속 옆에 붙어서 말 걸어 주고요.

그런데... 문제는 테툼어라는 게 동티모르 남부 해안가에 많이 살던 테툼족의 언어이기 때문에 표준어라는 기준도 없고, 그저 구어로 전승되는 거라서 철자 규칙도 없는 언어라는 데 있어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선교 목적으로 종교적인 기록을 테툼어로 기록한 게 테툼어가 문자화된 시작이었고, 99년 이후에서야 비로소 유엔 신문이라거나 포스터, 그 외 문서에서 드문드문 글자로 쓰이는 중인 거죠. 이 나라에서는 그래서 나라만 체계를 잡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언어까지도 새롭게 태어나면서 체계를 갖추는 중입니다.

어쨌거나, 그 결과 사투리가 무지하게 심하다는 게 외국인들에게 약간의 고통이죠. 제가 말을 하면 알아들어 주지만, 제가 이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기는 그리 쉬운 게 아니에요. 가장 많이 쓰는 '표준 테툼어'는 수도 딜리에서 쓰는 포르투갈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테툼어인데, 그게 약간씩만 지역이 달라져도 단어 선택부터 발음규칙까지 천차만별이랍니다.

예를 들어, 표준 테툼어로 '실례합니다'에 해당되는 말은 '꼬리센사'라고 책에 적혀 있는데, 막상 "꼬리센사" 하고 한마디 했더니 꼬마 녀석들 하하하 웃으면서 그건 그냥 "리센사"라고 하는 거라고 고쳐 줍니다.

그 정도는 애교죠. 책에 써 있는 단어들을 조합해서 딜리 옆 메티나로라는 곳 방위군 사령부에서 근무하던 동티모르 군인 아저씨에게 말을 걸면 엄지손가락을 추어올리면서 "디악!(훌륭해!)"이라고 칭찬해 주는데, 어제 저녁 길가에 촛불을 죽 늘어 세우는 사람들에게 떠듬거리며 "왜 불을 붙인 겁니까?"하고 물어보자 사람들 왈, "라 하떼네 잉글레스(난 영어 못해요)"라고 대답하더군요.

역시 열심히 땀을 빼가며 "나 지금 테툼어로 얘기하는 중이라니까요"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대답은 "난 몰라"죠. 무심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조금만 귀기울여 들으면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어쨌거나,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라 티모르 섬에 얽힌 전설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영국이 토끼 모양이고, 이태리가 장화 모양이고, 우리 나라는 호랑이 모양이고 등등등, 나라의 국토 지형에 얽힌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티모르 섬은 그 땅이 '악어' 모양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 티모르 섬 모양을 악어라고 보는 데 대한 전설은 이래요.

옛날, 아주 오랜 옛날이었습니다. 바다가 육지에 둘러 싸여 호수처럼 되어 버린 염호에서 태어난 새끼 악어 한 마리가 바다로 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었어요. 그러나 새끼 악어는 너무 어려서 혼자 힘으로 도저히 바다로 나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 주위를 지나던 어린 소년이 악어를 가엾게 여기고는 자신의 두 팔로 악어를 안아서 바다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악어는 소년이 너무 고마워서 한 가지 약속을 했어요. "오늘 내가 네 도움으로 바다에 왔으니까 앞으로 언제건 네가 원하면 내 이름을 세 번 불러. 그러면 내가 나타나서 너를 어디로든 태워줄 거야."

시간이 흐르고 새끼 악어는 어엿한 어른 악어가 되었습니다. 소년은 한동안 못 만났던 악어가 보고 싶어서 약속대로 바닷가에 나가서 악어를 세 번 불렀죠. 악어는 약속대로 나타났고, 둘은 모처럼 만의 만남이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 후 악어와 소년은 계속 함께 다니면서 전 세계를 여행했어요. 그렇지만, 악어가 완전히 자라게 되자 둘 사이에는 심각한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야성에 눈을 뜬 악어가 자꾸 소년을 잡아먹고 싶어지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악어는 고래, 호랑이, 버팔로에게 차례로 상의를 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은 하나같이 "소년은 네 친구니까 잡아먹어서는 안 되는 거야"라고 이야기했죠. 그래도 욕망을 다스리기 어렵던 악어는 현명하기로 유명했던 원숭이를 찾아갔습니다. 원숭이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원숭이는 악어를 마구 꾸짖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은인을 잡아먹을 생각을 할 수가 있느냐고요.

악어는 너무 부끄러웠고 소년이 자기에게 얼마나 잘 해 줬으며 훌륭한 친구였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둘 사이의 우정은 계속 깊어갔고, 어느덧 악어가 늙어서 죽을 때가 가까워졌어요. 물론, 소년은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었죠. 악어는 한 때나마 소년을 잡아먹으려 했던 자신은 끝까지 자신을 믿어 준 소년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년에게 마지막 약속을 하나 했어요. "난 이제 죽을 때가 된 것 같아. 하지만, 그간 네가 나에게 베풀어 준 호의와 우정은 정말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이었어. 그래서 내가 한 가지 약속할게. 난 죽어서 섬이 될 거야. 그러면 네 후손들이 그 섬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 그게 내가 네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야."

약속대로 악어는 죽어서 지금의 티모르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년의 자손들은 지금의 티모르인들이 되었죠. 그래서 티모르인들은 소년의 자손이지만 스스로를 악어의 자손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아직도 티모르인들은 그들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강이나 바다를 건널 때면 큰 소리로 소리를 치고 건너간답니다.
"할아버지, 지금 건너가는 건 할아버지의 손자들이에요. 잡아먹으면 안돼요."

***9월 28일**

갑자기 모든 게 거짓말처럼 안정적으로 보입니다. 제헌의회가 소집되고, 정당들이 헌법 초안 구성에 들어가고, 곳곳에 새 건물들이 들어서는군요. 외국인들로 득시글거리던 각종 행정기관들에 동티모르인들이 벌써 절반도 넘게 들어가서 업무를 인계 받는 중입니다.

경찰, 군인, 유엔 과도행정부(UNTAET) 행정직원, 기자들이 그간 동티모르 외국인 구성의 절대다수였다면 지금은 그 비율이 많이 변했어요. 공장을 세우러 온 건축업자, 슈퍼마켓을 만든 상인들, 렌터카 회사와 여행사의 직원들, 영어와 포르투갈어를 가르치러온 선생들, 심지어 관광객까지 드문드문 눈에 띕니다.

도대체 뭘 하고 지냈었나 지난 편지들을 다시 생각해보니 제게도 그간 꽤 많은 일들이 일어났더군요. 난민 복귀자들과 남아있던 주민들간의 갈등, 소수 회교도들에 대한 주민들의 방화, 유엔 직원들을 향해 터진 각종 테러, 요르단 경찰들이 일으킨 말썽들, 게으르고 나태한 유엔직원들과의 실랑이, 영어에 얽힌 각종 사건들... 그 사이사이 여행도 많이 다니고, 군인 아니랄까봐 변심한 여자 문제로 고민도 하고, 여기서 실수, 저기서 실수, 그러면서 스스로 돌아볼 기회도 참 많았고. 아마 이 편지도 조만간 마침표를 찍을 것 같군요.

혹시나, 행여나, 선거 후에 무슨 일이 터지면 어쩌나 노심초사했었는데 동티모르 사람들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건 아닌가 싶어요. 하루씩 달력의 날짜를 지워가며, 남은 군 생활을 손으로 꼽아 가는 병장 말년의 나날 속에서 문득 깨닫고는 합니다.

함께 근무하는 군인 분들도 참 훌륭하고,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는 비정부기구 직원들이나 자원봉사자들도 존경스럽지만,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감탄하게 하고 놀라 돌아보게 만드는 이 작은 나라 사람들이야말로 가슴속 깊이 우정과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9월 3일 저녁, 바우카우 거리에서 2년전 민병대의 난동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며 도로변에 촛불을 꽂아 놓던 동티모르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사나나 구스마오가 자서전에 적었던 말이 있어요. 포르투갈 식민지배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 동티모르인들 사이에 허무적인 생각이 가득하던 때 한 티모르 노인이 주지사에게 했던 말이랍니다.
"우리 티모르인은 물이 새지만 결코 가라앉지 않는 배와 같은 존재 아니던가요?"

민병대의 테러가 한창이던 와중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도로변에 바람에 흔들리는 초를 세우던 그 사람들을 보며 구스마오가 말했던 그 '가라앉지 않는 배'를 본 느낌이었죠.

꺼질 듯 꺼질 듯 애처롭게 흔들리는 초가 유도등을 켜놓은 공항 활주로마냥 군데군데 망가진 도로를 환하게 비추며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모습은 아주 엄숙한 의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초가 꺼지지 않게 차를 천천히 몰아달라고 주위에 서있던 청년이 부탁했지만, 그런 부탁이 없었어도 그 때 이미 그 도로를 빨리 달려서 지나칠 마음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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