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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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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27>

못버리는 잣대 "쟤들은 우리 60년대 수준"

***3월 10일**

가끔 도저히 여기의 유엔 직원들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이 나라는 아주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유엔 직원들이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키스하다가 주민들한테 항의 받고(실제로 시장에서 유엔 직원과 NGO로 보이는 아시아계 여성이 대놓고 키스하다가 격분한 주민들이 유엔 과도행정부 건물로 몰려들어 풍기문란에 대해 사과하라고 시위를 벌인 적도 있습니다) 해변에서는 그렇게 주민들이 말리는데도 비키니 수영복을 고집하다가(결국 이젠 유엔 직원들이 쉴 수 있는 해변이 몇 군데로 제한되었습니다) 동티모르인들로부터 해변에서 쫓겨나다시피 하고...

뭐, 키스하는 거나 비키니 입는 거나 사실 무슨 문제겠어요. 하지만, 동티모르 사람들이 그게 무슨 문제냐고 얘기하는 것과 유엔 직원들이 얘기하는 건 다른 문제 같습니다. 아무래도 유엔 직원들은 그 과정에서 고압적이거나 거만하게 보이기 마련이거든요. 중국이 미국에게 항의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겠죠. 미국에선 저 무식한 인권도 모르는 짱꼴라라고 손가락질하고, 중국은 내정간섭이라고 불쾌해 하고... 그 배경에는 아무래도 "우리는 선진국, 너네보다 우수해"라는 의식이 깔리게 마련이니까요.

그런 의식이 근저에 있다면, 겉으로 인권이네 평등이네 해봐야 결국 뒤로는 우리는 '선민'이고, 너희는 '후진 인간'이라는 불평등이 뿌리깊어지는 것 아니겠어요? 늘상 얘기하지만, 한국 사람들 세계 어디를 가도 GNP로 성적 석차 매기듯 국가간 순위를 매기는 버릇이 있는데, 그러니까 항상 남들 보면 "쟤들은 우리 60년대 수준, 쟤들은 70년대 수준"하고 점수나 세고 있죠.

당연히 결과적으로 그런 의식이 백인한테 한없이 약하고 유색인종에게 한없이 거만한 이중성을 만들어냅니다. 손가락질 받고 비웃음 사도 할 말이 없어요, 할 말이 없어.

***3월 14일**

가끔씩 별 일 없이 즐거운 하루를 보내다가도 멈칫 우울해서 멈춰 서게 됩니다. 마치 길을 잘 걷고 있었는데 얘기치 못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이, 그렇게 사람들은 슬럼프를 만나게 되나보죠.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도착해야 하는 목적지 생각에 마음이 몹시 급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발 앞을 살펴보는 아주 사소한, 그러나 늘 해야 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마련이잖아요.

쉽게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으면 좋은 일이지만, 가끔씩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곳이 재수없게도 진창일 수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옷을 다 버리게 된다던가, 무릎이 좀 까지는 정도로 끝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관절이 삐긋해서 걷는데 심하게 불편하게 된다거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럴 때엔 그냥 툭툭 털고 모른 척 길을 걸어가고 싶은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는데,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거나 병원에 가야만 하는 법일 텐데, 가끔 악재는 겹치는 법이잖아요. 머피의 법칙처럼.

지갑을 보니 집에 갈 차비가 모자르다거나 하필이면 돌부리에 걸린 오늘이 병원이 문을 닫은 일요일 오전일수도 있는 게 삶이겠죠. 그냥 오늘 갑자기 멈춰서서 돌아보니까 저도 그 돌부리에 걸린 모양이더라구요. 사실, 그동안 잘난 척하며 한국이 어쩌고 세계가 어쩌고 행복한 인생이 어쩌고 했는데, 오늘은 그런 생각이 너무 보기 싫어져서요. 정말, 제 머릿속에 들은 생각을 꺼내서 인형으로 만들면 귀여운 못난이 인형처럼 보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다 저마다 조금씩 자기 나름대로 여기저기 무릎이 까지기도 하고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고 그냥 먼지가 조금 묻기도 하면서 길을 걸어가는 중이잖아요. 중동 산유국의 석유재벌이건, 일본의 샐러리맨이건, 이탈리아의 집시건 간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가능성은 정말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법인데, 자꾸 그런 사실을 애써 붙여놓은 반창고 개수로 환산되는 아픔인양 세려고 한 모양이에요.

아프리카에서 총을 들고 마약을 주사맞은 채 전쟁터로 끌려 나가는 아이들이 물론 훨씬 더 불쌍해 보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시험공부하다 스트레스 받아서 자살하는 아이들이 그 아이들보다 덜 불쌍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 제가 아무 것도 모르고 떠들고 있다는 생각에 환멸을 느낍니다.

여기 사람들하고 직접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면서 유엔에서 배포하는 편견 가득한 자료만 가지고 평가하고, 재단하고, 외국인의 눈으로 몇 백년간을 싸워온 사람들의 성향을 이리저리 나누고... 그 와중에 또 다시 여기에 없는 세상 천지 모든 사람들을 배부르고 복에 겨운 사람들인 양,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역시 마음대로 재단하고... 스스로가 못난이 인형 같아요. 다들 그 못난 얼굴을 못났어도 조건 없이 그냥 귀여워해 주는. 아마도 잠시 휴가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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