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동티모르 최동단 투투알라라는 마을 앞 3백 미터 정도 바다에 자코섬이라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바다거북들의 집단 서식지로 유명해서 인도네시아 때부터 지금 유엔 과도행정부 때까지 계속해서 거주가 금지된 섬이죠. 공식적으로는 출입도 통제 받고 있지만, 사실상 누구도 감시하지 않기 때문에 유엔 직원들부터 관광차 보트로 자주 건너다닙니다.
오늘은 그곳에 갔어요. 동부여단장님이 관할지역 순찰의 명목으로 사실상 소풍 간 겁니다. 확실히 돌아갈 때가 되었어요. 군인들이, 그것도 지역사령관과 주요 직위자들이 평일에 업무를 빙자하여 보트 타고 통제구역에 신분상의 특권을 이용해 오간 것이니까요.
즐겁게 함께 따라가 보트를 타긴 했지만,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정말 이제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다 끝났구나. 감축이 빨리 진행되는 게 동티모르인들을 돕는 길이겠구나.'
어쨌거나 바다는 정말이지 환상적이었습니다. 발목이 잠기는 모래사장에 찰랑이는 파도는 유리처럼 투명하고, 깊이가 무릎정도에서 허리정도까지 잠기는 바다는 한여름 햇빛에 반짝이는 활엽수 이파리 마냥 환한 초록빛입니다. 더 깊어지면 거짓말처럼 새파란 하늘빛, 더 나가면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마냥 진하게 푸른 정말 '바다빛'이었어요. 세상에 태어나 바다를 묘사하는 빛깔들이 생겨난 이유를 오늘 처음 본 것 같습니다.
너무너무 깨끗해서 소금물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한 손 가득 퍼담아 마셔보고 싶은 바닷물이었어요. 섬의 모래사장도 발길이 닿지 않은 덕인지 새하얗고 폭신폭신해서 발자국을 남기는 게 미안할 정도였지만, 그간 다녀간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남겨 둔 쓰레기가 군데군데 남아 있더군요. 아름다운 곳은 그냥 놓아둬야 하는 것 같아요. 누구도 들어가지 말고, 누구도 건드리지 말고, 그냥 거북이와 앵무새들만 살도록 두어야 할 듯싶습니다.
티모르섬 동쪽해변과 자코섬 사이의 바다를 5명만 타면 가라앉을 듯 휘청거리는 작은 카누에 모터를 달아 왕복하는 것도 처음 겪는 경험이었습니다. 파도가 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잔물결이 출렁일 뿐인 조용한 바다였는데도, 그 잔물결 하나 하나가 배 안으로 들어와 옷을 적셨고 우리는 쉬지 않고 그 물을 퍼내야 했죠.
배 옆에서는 거북이가 헤엄치고 있고, 사람들마다 제각각 주장하는 바가 달라서 누구는 가오리를 봤다고 우기고, 누구는 상어를 봤다는 겁니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자기가 무얼 봤는지 앞다투어 자랑하던 중 돌고래 떼가 섬과 섬 사이의 작은 해변을 가로질러 갔습니다. 프리윌리 영화 예고편에서나 봤던 돌고래가 떼를 지어 점프를 하면서 바다를 가로지르는 광경을 불과 50 미터 앞에서 본 거죠.
가오리고 상어고 떠들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저마다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고 파도가 발을 살짝 적실 때까지 바다에 다가가서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돌아가자고 차에 올랐던 여단장님도 후다닥 차에서 내리더니 카메라를 들고 뛰었습니다. 저희 일행들도 "이야~ 이런 광경 난생 처음이야!"하고 소리치면서 예외 없이 바다로 달려갔습니다. 잿빛 돌고래 수십 마리가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모습을 여기 아니면 또 언제 볼 수 있겠어요.
그렇게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바다로 나아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을 빼앗기던 동안 드디어 아프가니스탄에 미제 미사일이 떨어지기 시작했더군요. 처음에 동티모르로 올 때 엄청나게 반대하시던 어머니께서 월드트레이드센터에 비행기가 부딪히자 사람 운명이 어쩔지는 누구도 모르는거라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분쟁지역에 군인으로 내보낸 아들은 물놀이하며 바다거북과 돌고래 틈에서 놀고 있는데 분명히 그 집안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을 월드트레이드센터에서 근무하던 남의 집 아들 머리 위로는 건물이 무너졌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도대체 왜 자신들의 머리위로 그들 1년 수입을 모두 합한 것보다 훨씬 비싼 미사일들이 떨어지는지 모르는 아프간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겠죠.
빈 라덴의 성명도 봤습니다.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민간인들이 죽어간 것을 살인자들의 죽음으로 오도하는 테러범의 뻔뻔함이 미국에 빌미를 주는 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미국의 전쟁 개시에 박수를 치는 건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무너질 때 박수를 치는 것만큼이나 광기일 테죠.
일요일에는, 기억 못하시겠지만 언젠가 편지에 적었던 호주 영어교사 크리스틴과 저녁을 같이 먹었습니다. 대개 게으르고 동티모르인들에 대한 편견으로 똘똘 뭉친 채 허구헌 날 동티모르보다는 자신들의 복지에만 관심을 쏟는 유엔 직원들 책상에는 늘 톰 클랜시의 소설이나 잘 해야 성경책 정도 올라있을 뿐이에요. 대개 석사나 박사학위 소지자들인데도 전공분야 이외에는 갑갑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편견을 벗고 싶은데, 잘 안 되더군요.
반면, 가끔 놀러오는 크리스틴이 들고 있는 책 목록은 눈길을 끄는 데가 있었습니다. 지금 빌려서 읽고 있는 구스마오의 자서전, 호주의 유명한 좌파 지식인이며 저널리스트 출신 대학교수인 죤 필저라는 사람이 쓴 '동티모르, 배반당한 사람들', 테툼어 사전과 교본, 유엔에서 발행하는 타이스 티모르라는 신문 스크랩북 등등. 뭔가 생각을 가지고 '돈' 말고 동티모르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곳에 온 외국 사람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밥이라도 한 번 살 테니 이야기 좀 들려달라고 그랬죠.
스물 아홉의 크리스틴은 호주국제자원봉사협회(AVI, Australian Volunteer International) 소속의 교사입니다. 대학에서는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외국에서 일하는 걸 동경해서 이 곳 저 곳 여행을 다녔다는군요. 여행도중 교사가 되면 계속해서 외국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지리라 생각했고, 그래서 귀국 후 교육학 석사 학위를 얻어서 이곳 저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는 바우카우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이 곳 사정이란 것이 영어선생이 필요하다기보다는 교육행정적인 인프라 혹은 인력들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선생 역할보다는 실무를 담당해야 하는 게 많답니다.
호주 사람 중에 죤 필져라는 저널리스트 출신의 교수가 있습니다. '호주의 노엄 촘스키'라고나 할까요. 동티모르 문제 뿐 아니라 호주 정부의 외교 정책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고 감시하는 활동을 벌이는 호주 좌파 학자의 대표격인 사람입니다. 크리스틴은 지난 10 년간 그 사람의 글들을 읽어 왔었고, 그 영향을 잔뜩 받아 대학에 다니던 때부터 학교의 솔리더리티 그룹에 가입해 동티모르에 대한 연대활동을 해왔다고 합니다. 우리로 치자면 운동권 학생 정도였겠지요.
대학에서 동티모르 연대활동을 하던 당시에는 동티모르의 이웃으로서 자신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뿐이었다지만, 시간이 지나고 지금에 이르러 돌아보니 결과적으로 그 덕에 '외국에서 일하고 싶다'라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에도 뭔가 도움을 받은 것 같다더군요. 그래도 동티모르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모두 좋은 기억만 남는 일은 아닐 겁니다. 몸이 고단한 거야 참고 나면 좋은 추억이 되지만, 마음 속 상처가 남게 되면 그건 정말 최악의 상황이 되죠.
"나쁜 기억이라면... 포기와 좌절이야. 나 자신에게 느낀 포기와 좌절, 그리고 티모르인들이 겪는 포기와 좌절 모두. 나는 뭔가 티모르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 그래서 일을 기획하고 같이 한 번 해보자고 부탁하지만 잘 되는 경우는 드물지.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면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뭣하고 있는 거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시간만 보내는 건 아닌가 싶어지는 거야. 일을 하자고 해도 의욕도 없이 움직이려 들지도 않는 티모르인들을 봐야 한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게 아냐.
예를 들어 우리 학교에서 일하는 마리아(편의상)에게 이렇게 부탁한다고 쳐.
'마리아, 이 계획 어때? 당신하고 나하고 둘이서 조금만 노력하면 이렇게 개선될거야.'
대답은 예스이지만, 마리아는 아무 것도 할 생각이 없지. 나는 그걸 지루함과 좌절이라고 불러. 식민통치기간 동안 스스로 일을 기획해서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잖아. 무슨 일이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는 법 자체를 모르는 것일 수도, 약간의 격려, 약간의 자신감을 북돋는 말이 필요한데, 그 약간을 넘어서기까지가 너무 어려운 것일 수도 있어. 난 늘 그들에게 나를 이용하라고, 당신들에게 이용되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나도 그들도 그다지 변화되지는 않은 것 같아."
크리스틴이 1년을 마치고 돌아가며 해 준 이야기가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
"내 인생 최고의 1년이었던 것 같고, 좋은 기억, 멋진 경험들로 가득했어. 하고 싶었던 일을 했었으니까. 하지만, 알다시피 선거가 끝난 다음 지금은 지나치게 평온하잖아. 내 생각에는 나뿐 아니라 모든 동티모르의 외국인들은 지금이 사라져 줘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 지금 동티모르인들에게 필요한 건 홀로 서는 연습인데, 언제까지고 외국인들이 행정기관에서, 학교에서, 병원에서 동티모르인들의 자리를 대신한다면 뭐가 달라지겠어."
그리고 저 역시 동티모르를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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