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퇴치를 목적으로 지난 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렸던 세계식량정상회담은 아무런 성과없이 폐막됐다. 미국 등 선진국 정상들의 대거 불참으로 8억명에 이르는, 굶주린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도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세계적 차원에서 보자면 기아 문제는 수억명의 목숨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다. 하지만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에 비하면 거의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고 있다. 테러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중대 관심사인 반면, 기아는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의 고통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빈곤의 문제를 천착한 공로로 199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 아마티야 센 교수(영국 트리니티대 학장)는 지난 16일 영국 주간지 옵서버에 기고한 글을 통해 기아 문제의 정치사회적 뿌리를 파헤쳤다.
센 교수에 따르면 굶주림은 정치체제의 산물이다. 백성의 뜻이 권력의 향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주국가에서라면 정권이 굶주리는 국민들을 못본 체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민주체제에서는 극단적 기아란 있을 수 없다.
나아가 아프리카 등 개도국에서 민주화가 후퇴한 데에는 미국 등 강대국들의 책임이 크다. 또한 부자 나라들은 무역자유화란 이름 아래 자국 산품을 수출하는 데만 관심이 있지, 개도국들의 물건을 사들여 이들의 경제개발을 돕는 데는 인색하다.
센 교수는 세계 기아 문제의 해결에는 부자 나라들이 앞장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강조한다. 개도국들의 민주화를 격려하는 한편 이들 나라의 수출품을 사들여 개도국의 경제개발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 개도국들이 필요한 식량은 살 수 있을 정도의 소득은 보장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지구상의 절반이 굶는 이유(Why Half the Planet is Hungry)'라는 제목의 센 교수의 칼럼을 소개한다. 편집자
***21세기에 8억명이 굶주림 속에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계 도처에 만연하고 있는 굶주림은 기본적으로 가난과 관련이 있다. 식량생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얘기다. 사실 지난 25년간 주식 작물(쌀, 보리 등)의 가격은 실질가치로 절반 이상 떨어졌다. 현재의 기술 수준이나 가용자원의 현황으로 보아 식량 수요가 늘어나면 식량 생산은 그에 따라 늘어날 수 있다.
식량 수요가 늘지 않는 것은 소득이 낮기 때문이다. 전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고 있는 것은 소득이 낮기 때문이다. 이들의 소득수준으로는 충분한 양의 식량을 살 수 없으며 이 때문에 굶주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득수준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굶주림이 만연하게 만드는 정치적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일 한 정부의 존립이 굶주림의 만연으로 위협받게 된다면 그 정부는 이 상황에 대처해야 할 동기를 갖게 되는 셈이다. 그 정부는 전반적인 소득 수준을 높이든가 재분배정책 등에 의해 굶주림의 근본 원인 중 하나인 낮은 소득 문제에 대처하려 할 것이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 하더라도 민주적 국가에서는 집권세력의 존립이 굶주림에 의해 위협받게 된다. 굶주림이 만연한 상태에서 선거에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야당이나 언론의 비판에 견뎌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민주국가에서는 기아가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아직도 민주체제를 갖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 70-80년대 매우 어려운 식량 환경 속에서도 기아 문제에 잘 대처했던 짐바브웨는 민주체제가 무너지면서 이같은 대처 능력이 크게 약화됐다. 권위주의화된 지금의 짐바브웨는 상당한 정도의 기아 위협에 직면해 있다.
불행하게도 만성적 영양부족이라는 형태의 굶주림은 이러한 정치적 폭발성을 깆지 못한 것으로 때때로 드러난다. 심지어 민주적 정부도 일상적 영양부족 상태로부터는 거의 아무런 정치적 압력을 느끼지 못한다. 예를 들어 민주적인 인도에서는 기아가 사라지긴 했으나(독립과 다당제 선거제도를 확보한 1947년 직후 기아는 사라졌다) 만성적 형태의 일상적 영양부족 상태는 놀라울 정도로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굶주림은 평균 수명을 줄이고 사망률을 높이며 심지어 어린이의 지적 능력의 향상을 가로막을 수 있다. 만일 정치세력들이 이같은 만성적 기아의 문제를 정치적 쟁점으로 만들지 못할 경우, 만성적 기아의 문제는 민주국가에서도 만연될 수 있다.
***부자 나라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역자유화가 해답이 될 수 있는가?**
부자 나라들은 세계의 기아를 줄이기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우선 아프리카를 비롯한 가난한 나라에서의 민주주의의 붕괴는 상당부분 냉전기간중 강대국들의 부추김에 의해 일어났다. 군부 실력자가 민주정부를 전복할 때마다 그는 소련(그가 친소적인 경우)이나 미국 등 서방(그가 반소적이거나 친서방적이라면)의 지원을 받았다. 따라서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기아 문제에 대한 지배적 세력들의 책임이 있으며 이제 부자 나라들은 전세계에 민주적 정부를 확산시키는 데 일조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둘째, 굶주림은 낮은 소득 및 실업과 관련돼 있다. 부자 나라들이 관세 장벽 등으로 시장을 폐쇄하기보다는 가난한 나라들의 수출품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가난은 매우 크게 감소될 수 있다. 보다 공정한 무역은 가난한 나라들의 가난을 줄일 수 있다.
셋째, 국제테러와 싸우기 위한 전지구적 연대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문맹을 퇴치한다거나 예방가능한 질병을 감소시킴으로써 가난한 나라들의 경제적, 사회적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보다 긍정적 목표를 위한 전지구적 연대도 필요하다.
부자 나라쪽의 무역자유화는 분명히 가난한 나라들의 고용이나 소득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들의 무역자유화는 상황이 약간 더 복잡하다. 세계무역의 확대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입은 국가들조차(한국이나 중국 등) 왕성한 수출활동에 나서기 이전 일정한 기간동안 국내산업에 대한 보호조치를 취했었다. 따라서 무역자유화는 부분적 해답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경제적 조치를 밟아나갈 때에는 그 결과를 세심하게 평가해야 한다. 단순한 구호만으로 정책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세계의 고질적 문제인 기아를 해결하기 위한 ‘마법의 탄환’은 없다. 우선 민주화를 고무하기 위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다당제 선거제도와 공개적 토론, 언론검열의 철폐 등을 지원하고 독립적 언론매체와 정보와 분석의 신속한 확산에 대해서도 경제적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또한 교역을 장려하고(특히 가난한 나라로부터 부자 나라로의 수출을) 가난한 나라의 곤궁함을 크게 줄일 수 있는 개혁(지적 재산권, 기술이전 등) 등 비전 있는 경제정책을 택해야 한다.
굶주림의 문제는 세계적인 가난과 착취라는, 보다 큰 문제에서 파생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남측 국가들이 추구하고 있는 식량자급은 기아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나?**
식량자급은 식량안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매우 어리석은 사고방식이다. 식량자급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식량안보를 이루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가난을 없애고(따라서 국민들이 식량을 살 수 있도록) 국제시장에서 모자라는 식량을 사오면 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혼동되는 이유는 지독하게 가난한 나라들의 대부분은 소득의 대부분을 식량 생산을 통해 얻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대부분 국가들이 이같은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이 소득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산업화 등 생산의 다양화를 통해), 국내 소비에 필요한 식량을 생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기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소득 수준 및 식량 조달 능력의 향상이다. 식량자급에 맹목적으로 매달릴 필요는 없다.
식량자급이 중요할 때가 있다. 전시 상황 등이 그런 경우이다. 2차대전중 영국은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조달할 수 없는 실질적 위기에 처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독특한 경우였다.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며 가까운 장래에도 그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 같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한 나라가 국민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느냐(국내에서 생산하든, 외국에서 수입하든) 하는 것이다. 이는 식량자급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가난을 없애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하며 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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