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한국은 역사상 최초로 서민대통령을 맞게 되었다.
수천년간 전제군주 치하에 있었고, 20세기 전반기에는 일제 총독의 압제에 시달렸다. 꿈같이 찾아온 8.15 해방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혁명이었으나, 그 뒤의 역사는 독재와 권위주의 통치로 점철되었다. 김영삼ㆍ김대중 대통령도 3김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서민적인 체취와는 거리가 있다.
20세기 내내 한국인은 따뜻하게 아픔을 어루만져 줄 통치자나 대통령을 갖지 못했다. 여운형 김구 조봉암은 지도자였지만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얼굴 생긴 모습이나 미소, 말투에서 우선 서민정취가 물씬 난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중학교를 '외상'으로 다니기도 했고, 고교때는 야간 경비도 섰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채 한때는 건설현장 막노동꾼이었고, 국회의원이 돼서는 노동자와 억울한 사람들 편에 서서 싸웠다. 노무현 당선자만큼 서민의 고통과 서러움을 잘 아는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사실 노 후보의 당선 자체가 하나의 혁명이었다. 한국은 수천년간 혈연과 지연, 학연이 지배한 사회였는데, 노 후보는 이중 어느 것하고도 인연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지연이나 학연을 부수는 데 앞장섰다. 이제 한국인은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대통령을 갖게 되었거니와 그보다 더 극적인 것은 부인이 여고 중퇴자라는 점이다.
청와대 영부인자리에 여고 중퇴자가 들어올 것을 어느 누가 꿈이나 꿀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이번 선거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2002년 대통령선거는 1956년 정ㆍ부통령선거, 1971년 대통령선거와 함께 현대사에서 정치사의 의미 있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최초로 도입된 국민경선은 활기가 넘쳐흘렀고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주로 선거 때 자금 받고 동원되는 엉터리 당원,'가짜' 당원이 많았는데, 노사모란 자발적인 모임이 생겨난 것도 정치사상 경이로웠다. 더구나 재벌들한테 받은 돈으로 선거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순수한 성금이 답지하였고, 돼지저금통 분양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놀라운 사태였다.
폭로 비방이 기승을 부렸는데도 별반 먹혀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1948년 5.10선거 이래 역대 선거에서 약방의 감초였던 색깔공격이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은 - 더구나 후보부인 부친이 빨치산ㆍ남로당 관계자였고 북핵이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했는데도 -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어떻게 되어 놀랍게도 이처럼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역사의 고비마다 나타났던 한국인의 저력이 아닐까.
한국은 정치혁명의 과정에 들어서고 있다. 이미 국민경선, 노사모, 돼지저금통 등을 통해 정치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확실히 정당은 과거의 모습과는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낡은 정치가 하루아침에 청산될 바는 아니지만, 지난 늦여름 초가을에 후보교체를 운운하며 노 후보를 흔들어대던 낡은 정치인이 상당수 조락하여 민주당이 저절로 정화되기도 했지만, 민주당은 새롭게 탄생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어 있다.
노후보 진영의 중추가 통추나 꼬마민주당 관계자였던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한나라당도 변신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대북정책이나 색깔공격, 폭로ㆍ비방전에서 이회창 후보의 핵심참모였던 극우적 수구세력이 한층 더 어려운 고비를 만났다. 5ㆍ6공세력도 그렇지만, 3김정치도 일단락되었다.
낡은 정치의 청산은 지금까지 지겹게 본 해바라기성 정치인의 도태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 점에서도 노무현 당선자는 강점이 있다. 일제강점기나 해방이후 격동의 근현대사를 반영하여 정치계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배신과 변절, 야합이 무수히 있어왔다. 학생운동 출신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기성정치인 뺨치게 변화무쌍한 행태를 보였다. 일관성 있게 소신과 원칙을 지킨, 우리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정치인답게 노 당선자는 과감히 물갈이 개혁을 해야 할 것이다.
6월민주항쟁 이후 정치발전에 암적인 존재가 지역갈등이었다. 그러나 지역분할 투표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 당선자의 출신 지역과 몰표를 던진 지역이 일치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 당선자만큼 지역갈등 타파에 앞장선 정치인도, 그래서 그 때문에 희생된 정치인도 드물기 때문에 말썽 많은 인사배치에 과거의 나뿐 관행을 반복할 리가 만무하다.
또 하나의 암적인 존재인 정경유착도 선거자금문제나 공약을 볼 때 고리가 끊긴 것이나 다름없다. 노 당선자는 재벌과 유착할 하등의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만큼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부분에서 투명성이 높아지게 되어 있다.
일부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진보 대 보수의 갈등이나 세대 갈등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경직된 갈등은 지양되어야지만, 그러나 정치는 원래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이 정책을 중심으로 대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진보세력의 성장에 의한 진보 대 보수의 경쟁은 바람직한 현상으로 우리 정치를 한 단계 높여줄 것이다.
한국은 1920, 1930년대, 1980년대에 심한 세대갈등을 겪은 바 있다. 이번 투표를 둘러싼 각 가정에서의 갈등은 마치 학생운동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80년대의 그것을 방불케 하였다. 세대갈등은 지역갈등과는 성격이 명백히 다르다. 기득권자가 가진 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낡고 늙은 사회에서 젊은이의 신선한 발언은 역동적인 활력소라 아니 할 수 없다.
노무현 당선자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소신 있게 살았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 전날 밤의 '경험'도 있어 차분하고 능숙한 모습을 기대한다. 그러나 주위 환경이 어쩔 수 없이 몰아넣는 경우도 있다.
남과 북은 미국 일본과 특수한 관계에 있으며, 미ㆍ일 때문에 남북관계가 결정적인 어려움에 처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이번 선거는 노무현의 승리이자 국민의 승리이다. 촛불을 켜고 평화시위를 벌일 때의 그 간절한 마음으로 노무현당선자를 밀어주고 견제하고 채찍질하여 우리의 정치문화와 남북관계, 미ㆍ일관계를 한 차원 높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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