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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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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3>

김기협 위원의 SF기획 - 보네거트 작/박웅희 옮김

호텔 엘도라도는 5층짜리 관광호텔로, 장식이 없는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신축 건물이었다. 가로 세로 높이의 비율이 앞면에 유리를 댄 책장과도 같아서 전체적으로 높고 넓고 얇았으며, 풍기는 분위기도 그런 책장과 비슷했다. 모든 침실의 서쪽 벽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통유리로 되어 있어, 대형 선박들이 들락거리는 3킬로미터 저편 삼각주의 부둣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과거, 이 부두는 그야말로 성시를 이루던 곳이었다. 세계 도처의 배들이 육류며 곡물이며 채소, 과일, 자동차, 의복, 기계류, 가재 도구 같은 것들을 실어 와서는 에콰도르에서 나는 커피, 코코아, 설탕, 석유, 금 등은 물론 '파나마 모자'를 비롯한 인디언 공예품으로 맞바꾸어 갔던 것이다. '파나마 모자'는 실은 에콰도르에서 만든 것이었는데, 이상하게 늘 그 이름으로 통했다.

하지만 제임스 웨이트가 호텔 라운지에 앉아 코카콜라를 탄 럼주를 한 잔 홀짝이고 있는 지금은 부두에 정박해 있는 선박이 단 두 척뿐이었다. 웨이트는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머리를 굴려 살아야 하는 사기꾼의 처지에서 두개골 속에 들어 있는 대형 컴퓨터의 정교한 스위치들이 알코올 기운 때문에 이상 작동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음주는 셔츠에 달린 우스꽝스러운 가격표처럼 일종의 연극용 소도구에 불과했다.

부두의 현 상황이 정상이든 아니든, 그로서는 지금 그런 것을 따질 경황이 아니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과야킬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이 지구상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그였다. 아니, 적도 아래로 내려와 본 것도 이번이 난생 처음이었다. 그에게는 호텔 엘도라도도 과거 캐나다 서스캐처원의 무스조, 멕시코의 산이냐시오, 미국 뉴욕의 워터블리엣 등지에서 일시적 은신처로 삼았던 이런저런 호텔들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그는 뉴욕 시 케네디 국제공항의 발착(發着) 안내판에서 그 이름을 골라냈다. 열일곱 번째 아내―일리노이 주 스코키의 일흔 살 과부―를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뒤 시카고 어름에다 내팽개치고 이제 막 도망쳐 오는 길이었는데, 과야킬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오자 그곳이라면 그녀가 아무리 용을 써도 자기를 찾아내지 못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여자가 어쩌면 그렇게 못생기고 미련한지, 그런 여자는 정말이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 같았다. 그런 여자인데도 웨이트는 두 번째 남편이었다.

호텔 로비의 여행사에서 '세기의 자연 유람' 티켓을 샀으니, 그가 호텔 엘도라도에 머무를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해가 이미 많이 기울었건만, 날은 지옥문의 돌쩌귀보다도 더 뜨거웠다. 바깥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기는 호텔 안에 있고, 호텔은 냉방 중이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이 도시는 곧 떠날 터였다. 그가 탈 바이아 데 다윈 호는 바로 다음날, 그러니까 1986년 11월 28일 금요일 정오에 출항할 예정이었다. 백만 년 전이었다.

․ ․ ․

웨이트를 태워 갈 교통 수단이 이름을 따온 그 만 ('바이아 데 다윈'은 스페인어로 '다윈의 만'이라는 뜻)은 갈라파고스의 한 섬 헤노베사에서 남쪽으로 열려 있었다. 웨이트는 갈라파고스 제도는 금시초문이었다. 단지 언젠가 신혼 여행차 갔던 하와이나 한때 은신했던 괌과 비슷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넓은 백사장과 푸른 산호초가 펼쳐져 있는 가운데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 사이로 갈색 피부의 원주민 처녀들이 뛰노는 그런 섬 말이다.

호텔 로비의 여행사에서 나누어 준 여행 안내 책자는 아직 들춰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 안내서는 지금 그가 앉아 있는 라운지의 판매대 위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갈라파고스 제도가 얼마나 험한 곳인지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예비 승객들에게 건강 상태가 꽤 좋아야 하며, 해병대처럼 해안의 바위 언덕을 기어 올라가야 할 때도 있으니 튼튼한 부츠와 두터운 옷들을 준비하라고 당부하는 말씀도 들어 있었다. 웨이트가 승선권을 신청할 때 여행사 직원은 일언반구 설명도 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 ․ ․

'다윈 만'은 영국의 위대한 과학자 찰스 다윈을 기려 붙인 이름이었다. 다윈은 1835년에 다섯 주 동안 헤노베사와 인근의 섬 몇 곳을 탐사한 바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스물여섯이었으니까, 웨이트보다 아홉 살이 어릴 때였다. 다윈은 무급(無給) 자연사 연구가 신분으로 여왕의 탐사선 비글 호에 탈 수 있었는데, 이 배의 임무는 다섯 해에 걸쳐 세계를 일주하며 지도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쾌락추구자보다는 자연애호가의 구미에 신경을 더 쓴 듯한 그 항해 여행 안내서에는 갈라파고스의 전형적인 섬에 대한 다윈 자신의 설명이 실려 있었다. 그의 첫 저서 ꡔ비글호의 항해ꡕ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첫 인상이 그렇게도 정나미 떨어지는 곳이 또 있을까. 산더미 같은 파도 속에 내던져진 채 무시무시한 균열이 아로새겨진 울퉁불퉁한 흑색의 현무암질 용암 대지가 햇볕에 시들어 자라다 만 듯한, 생명의 징후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관목 덤불에 완전히 뒤덮여 있었다. 그 바싹 마른 지면이 한낮의 햇볕에 달구어지며 대기 속에 토해내는 열기는 숨이 확확 막히는 것이 마치 화롯불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러자 덤불에서 뭔가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 환상마저 찾아드는 것이었다.

다윈은 계속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면은 온통 …… 지하의 증기가 뚫고 지나간 듯이 마치 체와 같은 모습이었다. 용암은 아직 무른 상태일 때 여기저기 부풀어 올라 커다란 거품을 이루었고, 같은 방식으로 형성된 동굴의 천장이 무너져 내려 가파른 벽들만 남아 있는 곳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장면이 생생히 떠오르더라고 했다.

커다란 주철 공장들이 즐비한 스태퍼드셔의 그런 곳들이……

칵테일 라운지의 판매대 뒤편에는 다윈의 초상이 선반널과 술병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철제 도판(圖版)에 확대한 초상화였는데, 갈라파고스를 탐사하는 청년의 모습이 아니라 영국으로 귀국한 후 턱수염을 산타 할아버지만큼이나 무성하게 기른 풍채 좋은 가장의 모습이었다. 웨이트가 부티크에서 벌써 두 벌이나 산 티셔츠에도 가슴팍에 똑같은 초상화가 찍혀 있었다. 그 초상화를 그릴 무렵 다윈은 친지들의 강권에 못 이겨 그들 자신과 여왕까지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이 어떻게 해서 19세기 당시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종이에 기록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저술한 과학 서적은 저 커다란 두뇌들의 시대를 통틀어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의 저작은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변덕스런 견해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공으로 따지면 어떤 책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기여했느냐고? 그 냉혹한 책의 내용을 그대로 요약해 놓은 제목을 좀 보라. ꡔ자연 선택에 의한 종들의 기원, 혹은 생존 투쟁에서 선택된 종족들의 존속에 관하여ꡕ란다.

․ ․ ․

웨이트는 다윈의 책을 읽은 적이 없고 다윈이라는 이름도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경우에 따라 번듯한 식자 행세를 해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세기의 자연 유람'에 참여하는 동안은 최근에 암으로 아내를 여읜 캐나다 서스캐처원 주 무스조 출신의 기계 기사로 행세할 생각이었다.

실상 그의 학력은 출생지인 오하이오주 미들랜드의 실업 고교에서 2년간 자동차 정비를 배운 것이 고작이었다. 고아나 다를 바 없었던 그는 당시 이집 저집에서 수양살이를 하던 중에 다섯 번째 집에서 살고 있었다. 무슨 기구한 운명인지 그는 부녀(父女) 간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자식이었다. 그 부녀는 그를 낳자마자 그 도시를 떠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달아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자, 그 역시 지나가는 자동차를 얻어 타고 맨해튼 섬으로 갔다. 거기서 어떤 포주가 그를 거두어 들여 남창으로 성공하는 법, 옷에 가격표를 남겨 두는 법, 언제고 여자를 미치도록 즐겁게 만드는 법 등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웨이트는 그때 정말 고운 미소년이었다.

미소년 티가 가시기 시작하자, 어느 댄스 강습소에서 볼룸 댄스를 가르쳤다. 그는 타고난 무용수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의 부모도 미들랜드 시에서 내로라는 무용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의 리듬 감각은 필시 내림이었을 것이다. 그가 열일곱 아내들 중 첫 아내를 만난 것도 바로 그 댄스 강습소에서였다.

․ ․ ․

웨이트는 어린 시절 내내 양부모들에게서 사사건건 호된 벌을 받았다. 친부모에게서 나쁜 피를 물려받았으니 아무래도 요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예단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 호텔 엘도라도에 그 요물이 와 있는 것이다. 자기 딴에는 행복하고 부유하고 건강한 사내가 곧 닥칠 또 한 번의 생존술 시험을 고대하면서.

․ ․ ․

말 나온 김에 고백하거니와, 한때는 나도 제임스 웨이트와 같은 십대 가출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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